지난 3월 SBS 다큐멘터리 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 안에서 다양한 여배우들은 언제나 미모와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갈수록 배역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여배우의 상황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만큼 한국에서 여배우는 독특한 시선을 받는 존재다. 그들은 때론 가장 아름다울 것을 요구 받지만, 때론 연기파가 되길 요구받기도 하며, 어느 순간에는 숱한 루머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여배우로 살기 위한 고단한 과정들. 그 과정 속에서 순간의 실수로 인생의 비극에 빠진 한 여자의 고백을 들어보자.“다 끝났어! 나 죽고 싶어! “ 늦은 밤, K기자의 잠을 깨운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거칠고 다급했다. 하지만 의 K기자는 옷을 갈아입으며 툴툴 거렸다. “그 때 같이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택시를 타고 도착한 호프집에는 T양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한 눈에 세기도 어려울 만큼의 500cc 맥주잔을 비운 채. “집에 가자.” “왔어? K, 나 어떡해…..” “어떡하긴 니 술 값 니가 내고 가야지.” “나 은퇴할 거야! 은퇴할 거란 말야!” “또?” “으아아아아앙~” T양이 또 울기 시작했다. K기자는 처음 인터뷰 할 때의 T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귀여운 용모, 나름 열심히 관리한 듯한 몸매, 그리고 귀여운 말투. 하지만 지금 K기자 앞에 있는 T양의 얼굴은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웠고, 그의 허벅지는 튼실했다. “내가 왜 이래야 해? 왜! 왜!” “그래. 또 시작해라.” K기자는 눈물로 범벅된 T양을 보며 또다시 측은함을 느꼈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될 T양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K도 알지? 내가 데뷔 했을 때 난리도 아니었잖아…..” “기사 보고 왔어요. 그거 조작 아니죠?” “그걸 어떻게 조작해요” “그럼 보여줄래요?” T양은 하던 대로 눈에 힘을 줘 쌍꺼풀을 만들었다. “와, 대박이다!” ‘1초 전태아’. 그게 요즘 T양의 별명이다. 처음엔 장난으로 눈에 쌍꺼풀을 만들고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본 의 구리포터가 “1초 전태아? 네티즌 환호”라는 기사를 쓰면서 일이 커졌다. T양의 앞에 선 남자도 그 기사를 보고 온 텐크라운 엔터테인먼트의 위 부장. 그는 T양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계획에 확신을 가졌다. “합시다” “네?” “계약.” “컷!” “수고하셨습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서 있는 T양은 스태프들에게 연신 인사했다. 스태프들은 T양이 아닌 진짜 전태아에게 달려가긴 했지만. “괜찮아. 그래도 이게 어디야?” T양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없는 화질! MB TV는 가짜도 진짜로 만들어줍니다”라는 카피가 좀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가짜 전태아’로나마 전태아와 함께 CF를 찍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위 부장은 T양과 계약 후 그를 온갖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시켰고, T양은 어느 덧 쌍꺼풀을 유지한 채 ‘전태아 얼굴’로 모팔모와 윤문식 성대모사를 번갈아 할 정도가 됐다. 위 부장은 “T양, 쌍꺼풀 수술 절대 안 해요”란 보도자료를 뿌렸고, T양에겐 수많은 예능 섭외와 모바일화보 제의가 들어왔다. T양은 생각했다. “연예인 되기 쉽구나.” “뭐 더 없어요?” 연예인이 되기는 쉽다. 하지만 오랫동안 하기는 어렵다. T양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전태아 흉내 내면서 윤문식 성대모사 하며 문워크까지 하면 됐지 뭘 더하란 말인가. 예능 프로그램 섭외가 슬슬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위 부장이 드라마 출연을 알아봐줬다는 사실. T양은 아침 드라마 에서 주인공의 친구의 동생을 괴롭히는 악녀로, 훗날 주인공 시어머니의 배다른 일란성 쌍둥이 동생의 전남편의 숨겨진 자식으로 밝혀지는 역을 열심히 연기했다. 밥 먹는 시간을 빼곤 입에 연필을 물고 대본을 읽을 만큼.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감독들은 T양이 “주인공 친구 비주얼”이라며 비슷한 역만 캐스팅하려 했다. “망가진 전태아”라며 좋아하던 네티즌들은 언젠가부터 “언플쩐다”는 리플을 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 부장이 T양에게 한마디 던졌다. “좀 고치자.” “살짝 고쳤어요. 눈 조금 집고, 코 조금 세우고, 턱 약간 만진 정도? 호호” T양은 토크쇼 에서 자신의 성형에 대해 ‘최초 고백’하고 있었다. 물론 고백하지 않아도 그가 얼굴을 만진 건 세상사람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 T양의 성형수술 이후 많은 언론에서 “달라진 모습 눈에 띄네”라며 T양의 기사를 실었고, ‘하이브리드 트렌드 아이콘 스타일 킹왕짱 어워드’의 레드 카펫에서 T양의 상의가 살짝 흘러내린 채 사진이 찍힌 뒤에는 이 곳 저곳에서 나름 비중 있는 역의 캐스팅이 들어왔다. “싸게 전태아 쓰는 기분”이라나. 하지만 T양은 괜찮았다. “이제 연기만 잘하면 되는 거야” “T양, 애인에게 무슨 선물을 주죠?” MC의 질문에 T양은 어떤 대답을 할지 고민했다. 요즘 T양은 말 한마디가 중요했다. 성형수술을 하자 네티즌들은 “옛날엔 자연스러운 매력이 좋았는데… 미친 건가?”라는 악플을 달았고, 잠깐 만난 아이돌 스타 C군에 대해서는 “좋은 사람”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기자들이 “우리 사랑 뜨겁게 불타 올라 미칠 것 같아요”로 친절하게 번역해 주었다. 또 다른 기자는 사귄 다음 날부터 “불화설”을 쓰기 시작했다. 작품성이 좋아서 노출도 불사한 영화는 T양의 노출 신만 움짤로 만들어져 돌아다녔고, ‘연예인 압축파일’에는 “싼티에 노출 이미지가 세서 캐스팅이 힘들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사이 ‘럭셔리’한 전태아는 여전히 여러 CF에 출연했다. 물론 그도 10년 째 “연기 못한다”는 리플을 보는 것이 괴롭긴 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스친 뒤, T양은 입을 열었다. 요즘 미는 ‘섹시한 현모양처’ 이미지엔 이 말이 딱이다. “전… 십자수요!” “네?” “지금 뭐라는 거야?” 주위의 공기가 이상해졌다. 그리고 PD는 싱글거리며 외쳤다. “대박이다.” “그래서, 남성 인권 보호 위원회에서 어떻게 여자가 남자에게 성의 없이 십자수를 주냐고 항의했다는 얘기하려는 거지?” “그래~~~~!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이냐고!” “그 루저 발언만 안 했어도 좀 괜찮았을텐데….” T양은 순식간에 남성들의 적이 됐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더 이상 뜨진 못했지만 그래도 예능에서 열심히 망가지고, 레드 카펫에서는 열심히 쇄골 보여주고, 영화에서는 열심히 연기하던 T양은 순식간에 남자들의 적 ‘십자수녀’가 됐다. “이 불쌍한 여자야.” K기자는 T양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언젠가는 연기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그 옛날의 T양을 기억하며. “연기로 인정…. 연기로 인정….? 김혜자 선생님이야 그렇겠지.” “K기자님 죄송합니다. 얘가 요즘 워낙 속상한 일이 많아서…” 위 부장, 아니 이젠 위 이사가 술집에 도착했다. “위 이사님, 얘 좀 어떻게 해봐요. 위 이사님이 힘 좀 쓸 수 있잖아요.” “어떻게든 해봐야죠.” 위 이사가 많이 무거워진 T양을 업으며 말했다. “얘처럼 좋은 여자는 없으니까요.” “여기서 T양의 춤 한 번 안 볼 수 없죠!” 의 MC가 소리쳤다. 무대 중앙에 선 T양은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시건방 춤’을 신나게 췄다. 쏟아지는 웃음과 박수. 요즘 사람들은 T양이 뭘 해도 웃는다. 위 이사는 T양을 케이블 TV의 리얼 시트콤 에 출연시켰다. 망가진 몸매와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는 T양의 이야기는 또래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T양이 그의 재기를 돕는 위 이사와의 은근한 로맨스가 벌어질 때는 시청률이 3% 가까이 올랐다. 여성들은 그가 연하의 아이돌 스타와 오락 프로그램 도중 포옹을 해도 “T양이니까 괜찮아”하며 좋아했고, 30대에 접어든 그가 막 던지는 멘트들도 솔직함으로 받아들여졌다. 라면, 맥주, 30대를 위한 피부 노화 방지 화장품 CF가 이어졌고, 레드 카펫에서는 젊고 날씬할 때보다 더 큰 환호가 들렸다. 물론 언제부터인가 T양이 나올 때마다 인터넷에 “솔직해서 좋긴 한데 떡대가….” “찌긴 쪘다”는 반응이 올라오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리고 어느 날, 인터넷을 살펴보던 위 이사는 다시 그의 계획에 확신을 가졌다. “하자.” “어?” “다이어트.”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일러스트. 그루브모기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