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빈칸을 채워보시오 “여배우는 00해야 한다.” 누군가는 여기에 ‘섹시’, 누군가는 ‘청순’ 등을 적을 수도 있다. 몇 세대 전에는 ‘정숙’같은 단어를 쓸 수도 있었겠다. 언제나 대중에게 노출되는 여배우는 사회로부터 그 시대의 윤리적, 도덕적 규범을 지키도록 요구받는 동시에 가장 세련되고 유행에 민감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많은 여배우들이 작품 속에서는 한껏 섹시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인터뷰에서는 늘 윤리적으로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회의 이런 보이지 않는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단어로도 규정되길 거부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시대가 원하는 여배우의 한계를 뛰어넘은 여성들, 더 나아가 여성의 정의를 바꿔 놓은 여성들에 대한 10가지 순간들.

여배우들│지붕 뚫고 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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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
“동양여자로서는 불가능한 맵시 좋은 스타일의 소유자” 1920년대의 한 잡지에서 묘사한 것처럼, 윤심덕은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한국 최초의 멀티 엔터테이너였다.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이자 인기 가수이며 MC이자 패션모델이었고, 당시 언론이 “누구를 만나도 존대를 쓰는 일이 드물다”고 표현했을 만큼 강한 성격도 갖고 있었다. 윤심덕이 결국 연인이었던 소설가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은 그를 받아줄 수 없는 시대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윤심덕을 시작으로 ‘20세기 신여성’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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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첫 키스
“키스 장면 찍다가 이혼당할 뻔 했다.” 배우 윤인자는 1954년 영화 에 출연한 뒤 ‘키스의 어려움’을 털어놨다고 한다. 남한의 군 장교와 여자 간첩의 사랑을 그린 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키스 신을 등장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유교적 분위기에 눌려있던 당시 여성들은 ‘키스’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한국 전쟁 종료와 함께 찾아온 ‘키스 신’은 여배우들에게 새로운 도전과제가 됐다. 한동안은 키스를 한 여배우에게 테러 협박이 이어지기도 했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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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스커트는 가짜
윤복희가 1968년 한국 최초의 패션잡지 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사진 촬영을 하는 순간 한국의 모든 여자 연예인, 더 나아가서는 한국 여성들은 당시 패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 재능 있는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이며 ‘미국에서 건너온 트렌드세터’의 패션을 계기로 여성들은 보다 과감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스타일을 꾸밀 수 있었고, 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으려는 여성들과 자를 재고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려던 공무원들 사이에는 쫓고 쫓기는 촌극이 벌어졌다. 다만 윤복희가 1967년 미니스커트를 입고 한국에 귀국한 것이 방송되면서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다는 것은 일종의 ‘도시 전설’이다. 윤복희는 귀국 당일엔 너무 추워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소문이 돌 만큼, 미니스커트가 그 당시 한국에 충격적인 아이템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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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이 나가신다
“저질 퇴폐 작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에 대해 당시 언론의 표현이다. 젊은 시절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사회의 도덕관념과 끊임없이 부딪쳤다. 은 처녀가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비난을 받았고, 은 혼전 임신을 다뤄 조기종영 당했다. 하지만 김수현 작가는 한국의 가족 제도 안에서 일어나는 그 시대의 균열을 잡아내고, 거기서 조금씩 달라지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다. 에서 ‘한국의 어머니’ 김혜자가 어머니의 자리를 그만 두겠다고 하는 모습은 김수현 작가의 ‘한국 현대 여성사’를 일단락 짓는 것이기도 했다. 드라마 집필 40년째에도 당대 여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작가. 그것이 김수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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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의 이혼
김지미는 한국 최고의 톱스타이자 가장 많은 이혼을 한 여배우였다. 그는 홍성기 감독, 최무룡, 나훈아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숱한 화제를 뿌렸다. 최무룡과 결혼 당시에는 아내가 있던 최무룡을 이혼시켜 불륜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1살 연하인 나훈아와 결혼할 때는 그가 출연하는 영화에 대한 관람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김지미는 최무룡이 전처에게 줘야할 위자료를 부담해 세간의 여론을 반전시켰고, 이혼 당시에는 최무룡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역사적인 발언을 남기며 헤어져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이 됐다. 또한 나훈아와의 결혼을 위해 3년간 작품 활동을 쉬기도 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 시절에 자기 뜻대로 사랑하며 톱스타의 자리를 유지한 것은 그 자체로 놀랍다. 정말 당대의 여배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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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스타 강수연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 한국의 ‘월드스타’는 강수연이었다. 강수연이 베니스 영화제와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연이어 수상한 것은 “남자 배우도 이루지 못한 쾌거”였고, 강수연은 ‘남녀평등’과 ‘여권 신장’등의 단어가 세간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여성의 능력을 증명하는 ‘아이콘’이었다. 특히 노출 부담이 있었던 로 세계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으면서 사회적으로 여배우가 눈요기가 아닌 작품성 때문에 노출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젊고 예쁜 여배우’가 연기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만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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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세대의 수다
1990년대와 함께 등장한 ‘X세대’는 말 그대로 사회 현상이었다. 미디어는 그들을 신기한 종족처럼 바라봤고, 전 세대와 다른 의식 구조를 가진 여성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쏟아졌다. MBC 같은 트렌디 드라마는 일과 사랑을 모두 열심히 해 나가는 커리어 우먼을 등장시켰고, 영화 에서 정선경이 보여준 파격적인 베드 신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1990년대 말에 나온 는 여성의 성담론을 스크린에 끌어들이면서 여성의 일상과 성을 밀착시켰다. 그렇게 여성은, 여배우는 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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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삼순
나이 서른, 결혼정보업체에서도 난색을 표하는 조건, 약간 통통한 몸매, 그래도 남아있는 꿈과 사랑. 30대가 된 X세대의 여성들이 누구의 아내나 노처녀로 불리는 대신 ‘내 이름’을 원하던 그 때 등장한 MBC 은 여성 드라마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자신의 일과 사랑, 성에 대해 긍정적이고 솔직한 김삼순이 등장하면서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삶은 그것을 보는 여성의 삶과 공명했고, 그 영향력은 tvN 까지 이어졌다. 한국 드라마에서 술 마시면 주정하고 욕하기도 하는 여성이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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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의 죽음
CF스타였고, 드라마의 요정이었으며, 스포츠 스타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며 복귀했고, 40세에도 사랑스러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수많은 루머와 비난과 악플에 시달렸고, 결국 스스로 세상과 이별했다. 최진실의 등장과 이별은 한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이 어떤 영광과 어떤 상처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 가장 슬픈 경우다. 지금은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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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의 탄생
미스코리아 출신이고, 1990년대 톱스타였다가 재벌가의 남자와 결혼했으며, 이혼했다. 그러나 그게 지금의 고현정에게 무슨 상관인가. 복귀 후 홍상수의 영화와 액션 연기가 필요했던 MBC , 평범한 30대 여성의 일상을 다룬 MBC 로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연기의 폭을 넓혔던 고현정은 MBC 의 미실을 연기하며 자신의 연기력은 물론 영향력도 최강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는 지금 이름만으로도 작품의 제작을 추진토록 할 수 있는 영향력과 그에 준하는 연기력, 그리고 우아한 ‘여신’으로만 사는 대신 같은 영화에서 술잔을 든 채 다른 여배우에게 시비를 거는 연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행보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고현정의 현재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던 여자 미실의 모습과도 겹친다. 사극 사상 가장 새로운 ‘여왕’의 캐릭터가 ‘여신’이 아닌 ‘여제’의 대관식을 치러주었다. 고현정이 돌아왔고, 미실이 탄생했다. 그리고 여배우의 역사도 또다시 변하고 있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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