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20대부터 60대까지 이력도, 출신도, 스타일도 다른 이종의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영화를 찍었다는 것만으로 은 올해 최고의 센세이셔널한 기획이었다. 12월 10일 개봉하는 이 영화의 등장 앞에 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살아갈 여배우들에 대해 우리는 얼만큼 알고 있었던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여배우들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함께 고민하고, ‘여배우들’에 대해 나눈 이재용 감독과 백은하 편집장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지붕도 뚫을 만큼 강력했던 여배우들을 둘러싼 순간을 함께하거나, 지붕 아래로 떨어진 한 여우의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여배우들은 반 발짝 우리 앞으로 다가와 있을지도 모르겠다.당신에게 여배우란 어떤 존재일까. 그들은 스크린 위로 떠오른 뮤즈이거나, 브라운관 속 여왕이거나, 잡지에서 튀어나온 아이콘이거나 혹은 8인치 노트북에서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는 애장품 1호일지도 모른다. 저 하늘의 별일 수도, 씹기 좋은 껌일 수도 있다. 여배우들은 첫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고, 고결한 수녀고 요염한 창녀이며, 어머니고 누이다. 그렇게 여배우는 모든 여자를 품는다. 여배우의 얼굴은 시대를 비추는 수정구슬이다.
장진영의 부재부터 미실의 등장까지 2009년은 만개직전의 목련 같던 故 장진영을 잃었던 안타까운 해였다. 동시에 의 ‘미실’이라는 분수령적인 캐릭터를 얻은 한 해 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거나 피거나 오늘의 여배우들의 삶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여배우 한 명 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티켓파워나 시청률은 남자배우의 그것에 비하면 약하고 그에 따라 작품 선택의 범주도 한정 되는 것이 사실이다. 과감한 실험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어리지도 않은 여배우 김혜자를 톱으로 내세운 같은 영화는 오히려 2009년의 사건에 가깝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 매체수의 급증과 함께 단위 기간 내 노출의 빈도가 높아지다 보니 여배우의 세대교체 시기 역시 빨라졌고 이 흥망에 대한 불안감은 영혼을 잠식 할 정도로 덮쳐온다. 어린 나이에 독특한 매력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한 이후라도 기획사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눌려서 단명하거나, 과잉보호 되는 가운데 배우로서의 화양연화를 눈앞에서 보고도 놓쳐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유소년부터 꽃중년까지 스타덤의 기한이 긴 남자배우에 비해 여배우들은 그 기간이 짧은 편이다. 하지만 인생의 정점이든, 배우로서의 정점이든, 오를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가 있다. 과거 심은하, 이나영, 한채영, 김지수에 이어 현재 수애, 이소연 등 여배우들에 대한 체계적인 매니지먼트로 정평이 난 스타J의 정영범 대표는 “반짝하는 트렌드를 쫓아가며 자멸하는 것 보다는 명확한 타겟층을 확보한 후 접근하고 점점 넓혀나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충고한다. “소속 배우인 김남길이 비담으로 출연하고 있기도 하지만 최근 의 미실을 보며 많이 배웠다. 사실 미실은 결혼관, 경제관, 정치관, 여성관이 극단적으로 표현되어있고 굉장히 복잡한 캐릭터지 않나. 드라마의 전체가 미실을 떠받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시청자가 그리고 대중들이 그렇게 원했으니 방향이 유지되었을 것”이라며 캐릭터를 부여 받은 여배우는 오히려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척박한 시장, 무한 경쟁의 이중고 사실 멜로 영화가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부에 위치했을 때만 해도, 그들이 남성의 시선 안에 존재하는 사랑방 어머니이건, 첫사랑이건 한국 여배우는 시장 안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멜로영화가 하위 장르로 전락하고, 액션이나 스릴러, 코미디가 주류가 되고 흥행적 안전성이 증명되면서 여배우들은 남자배우 중심의 캐스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2008년 나문희, 김선아, 이경실, 고준희 이렇게 4명의 여배우들만을 내세워 영화 를 제작했던 보경사의 심보경 대표는 “충무로에서 여배우들만을 탑으로 내세웠을 때 제작의 어려움을 겪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론 장르적 영향은 있겠지만 투자자들이 일단 여배우가 탑인 영화는 마이너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심은하, 전도연, 김혜수에 비해 다음 세대 여배우들이 역량이 모자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다양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다만 영화산업이 열악해 지면서 그녀들의 다양성과 장점이 산업과 만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다”라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또한 영화산업의 거품이 빠진 대신, 패션에 대한 대중적 소비패턴이 바뀌고, 방송 채널 수가 급증한 미디어 환경, 할리우드 육아 트렌드의 습격에 이르면서 여배우는 ‘패셔니스타’ ‘셀러브리티’ 때론 ‘스타일리시 수퍼맘’ 자격증까지 따야 그나마 여배우로 거머쥔 스타의 옥쇄를 근근이 유지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2009년의 여배우는 배우로서 예술가로서의 내부적 한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돌파해야 하고, 엔터테이너로서의 여러 자질들까지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사진집을 내거나 음반을 내거나 아트전시회를 열거나, 취미생활의 결과물까지 대결해야 하는 삼중, 사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늙어가는 것도 특혜인 이 땅에서 스캔들부터 결혼 이혼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가 가십 뉴스들을 일상적으로 소화해버리는 속도와 정도에 비해 한국 여배우들에게 그 파장은 오랜 진동으로 남는 편이다. “개인사가 굴곡을 맞이할 때 한국 여배우들은 다소 극단적으로 나뉘는 것 같다. 그 고비를 잘 넘긴 여배우는 정말로 인격적으로 존경할만한 배우들이 된다. 영화를 고를 때도 웬만한 남자배우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대범하고 모험적이고 자기 본능에 충실한 선택을 하더라. 반대 경우엔 극단적으로 움츠러들고 결국 사라져버린다. 모 아니면 도, 극과 극이다” (심보경)
영화 에서 윤여정은 이혼 후 복귀한 고현정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예수 재림”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당시 “이혼한 여자가 TV에 나오는 것이 국민정서를 해치니, 2년 동안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통고 같은 권유를 받았다며 “주홍 글씨”가 아로새겨진 고통에 대해 토로한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배우 이혜영이 한국영화계는 여배우를 창녀처럼 다룬다고 말한 것을 보았다. 영화 에도 나오지만 오랫동안 여배우들은 부속물, 장식물 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귀족처럼 나이 들어간 유럽 여배우들과 다른 기운, 김혜자, 윤여정, 고두심 등 한국의 노장 여배우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세다, 크다, 멋있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 여배우들에게 노후를 카메라 앞에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세월 앞에 내려진 특혜가 아니라, 사회의 관습과 선입견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싸운 자에게만 사사된 빛나는 훈장에 더 가까운 셈이다.
여배우, 투쟁 속에서만 쟁취되는 빛나는 왕관 출산 후의 전도연, 미실 이후의 고현정, ‘엣지’을 내려놓은 김혜수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가. 최지우에게는 한류의 온기를 이을 숨겨진 열선이 있을까. 이영애의 캠퍼스 탈출과 전지현의 홀로서기는 언제 감행될 것 인가. 신민아는 분주한 행보를 안정된 연기로 치환 받을 수 있을까. 서른이라는 고개를 넘어 이나영과 임수정과 송혜교는 어떻게 익어갈 것 인가. 결국 21세기의 대한민국 여배우들이 싸워나가야 할 대상은 기회의 땅을 점점 장악해 들어오는 남자배우들도, 신경 쓰이는 라이벌도, 스타덤의 권좌를 노리는 수많은 내일의 ‘이브들’도, 점점 쇠락해가는 인기도, 늙어가는 육신도 아니다. 바로 여자로서의 프라이드와 배우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가운데 여자로서, 배우로서 독창적 존재감을 획득하기 위한 스스로와의 치열한 전투일 것이다.
개국 이래 가장 척박한 현실 속에 놓인 한국 여배우가 직면한 현실을 용감하면서도 위트 있고 치유적인 시선으로 품은 이재용 감독의 은 그래서 고난의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여배우들 앞에 드리우는 위로의 성탄캐럴이자, 연대의 붉은 실이다. 많은 여자들이 배우를 꿈꿀 수 있지만 아무에게나 ‘여배우’ 라는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배우. 그것은 투쟁 속에만 쟁취 될 가장 가치 있는 왕관의 이름이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