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개봉을 앞둔 을 보기 전.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예상은 강호동, 김C, 이승기 대신 윤여정, 고현정, 김민희가 나오는 ‘1박 2일’같을 거라는 거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 104분의 퍼포먼스는 6명의 여배우가 동시에 출연한 ‘무릎 팍 도사’ 에 가까웠다. 실명으로 연기하는 왁자지껄한 리얼리티 소동극 보다는 시종일관 재미의 고삐를 놓치지 않는 진심의 토크쇼. 마치 꼼꼼하고 위트 있는 인터뷰를 훔쳐 읽는 느낌이 들어서 을 보는 내내 인터뷰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약간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다음은 오랫동안 여배우들을 흠모해온 한 기자와 그 연모를 마침내 스크린 위로 펼쳐낸 한 감독이 나눈 오후의 대화다.

여배우들│“여배우들이 까다롭다고? 가장 상식적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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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그나저나 과연 남자, 여자를 뛰어넘는 ‘여배우’라는 존재는 뭘까?
이재용: 사실 모든 여배우를 대표하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거창한 의지 보다 내가 만난 몇몇 여배우의 이야기를 관객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언젠가 윤여정 선생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 ‘배우’(俳優)라는 한자를 보면 아닐 비(非)를 써서,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들을 슬프게 만드는’ 존재라고. 어느 순간을 지나면 인기는 떨어지고, 나이는 들어가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미모를 경쟁해야 하고, 연기를 경쟁해야 하는 직업.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대중에게 보여지는 일.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남자나 여자들의 삶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결국 그 사람들만이 가진 속성들을 좀 드러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생각 했던 거고.

백은하: 영화 시작에 가장 큰 영감을 준 배우는 누구였나?
이재용: 끝내고 지난 해 한참 백수로 지내면서 윤여정, 고현정 같은 배우와 자주 만나 어울렸는데 너무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윤여정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고현정은 아마 남자, 여자를 통틀어 이런 인간이 없을 정도다. 영화 일을 시작하고 몇몇 여배우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이들이 할 말이 진짜 많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백은하: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웃음)
이재용: 그랬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혹은 출연하겠다고 결심한 여배우들은 우리가 혹은 내가 가진 ‘여배우’라는 보편적인 속성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가장 ‘여배우’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배우들은 어쩐지 여신 같고, 베일에 싸여있을 거 같고 예민하고 혹은 쓸데없이 신경질적일 거 같고 그렇지 않나. 그런데 이들은 여배우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깨준 사람들이었다. 가령 조심스럽게 “여배우들은 같이 잘 못 모인다고 들었는데 이런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요?” 물었을 때 “왜 못해? 자신들이 없어서 못하는 거죠” 이렇게 탁 대답하는 사람들인 거지.

백은하: 을 보면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영화감독적 태도보다는 오랫동안 ‘여배우’ 라는 동물을 관찰해온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의 결과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여배우들과 함께 이런 식의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게 언제인가?
이재용: 딱 이런 식은 아니고 를 끝내고 모든 등장인물이 여자들인 느와르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싶었다.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은 늘 남자고 여자들은 늘 꽃이나 팜므파탈로만 등장하는 구도니까 그걸 뒤집어서 ‘여자들이 다 해보자’ 하는 식의 발단이었다. 결국 내 모든 영화는 주류영화를 약간씩 뒤집는 데서 출발하는 거 같다. 도 주류영화 같지만 그 동안 봤던 한국 불륜멜로의 흐름을 조금 비틀어 보자는 거였고, 도 내가 아는 한국식 사극을 좀 새롭게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그 다음에 생각한 게 ‘욕망의 사닥다리’라고(웃음)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얽히고설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고, 그리고 픽션과 논픽션이 섞인 영화, 혹은 페이크다큐 형식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들도 꽤 있었다. 시작은 즉흥적인 아이디어였지만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들의 총체가 이 된 거 같다.

백은하: 영화사를 돌아보면 유럽이나 할리우드의 경우를 장르의 발달 혹은 사회 환경 일 수도 있겠지만, 여배우들이 갖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그에 비해 한국 주류영화에서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90년대 이전의 여성캐릭터나 여배우들은 피해자거나 대상화 되어있었다는 생각도 들고.
이재용: 현재도 남성위주의 영화들이 주류지 않나. 여배우들도 다들 ‘여자들을 위한 영화가 이렇게 없느냐’고 아우성치고. 결국 여배우들이 자기 재능을 썩히고 있는 현실과 여배우들은 왜 한번쯤 멋지게 뭔가를 해볼 기회조차 없는가 하는 의문이 나의 비주류적 감성을 만나면서 이 영화가 발화된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배우들│“여배우들이 까다롭다고? 가장 상식적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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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영화를 만들기 전 한 명의 관객으로서 여배우를 선망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텐데, 여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첫 기억은 누구였나.
이재용: 물론 그 전에도 당대에도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긴 했지만 저 사람은 여배우, 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던 건 이미숙 씨였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연기까지 잘 하다니. (웃음) , , 특히 좋아했던 까지 한 가지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기보다는 계속 뭔가를 깨면서 가는 사람 같았다. 어린 느낌에도 너무 멋있었다. 역시 ‘이미숙의 컴백작품’ 이라는 데 욕심이 생겼다. 아니! 내가 이미숙이랑 첫 영화를 하게 되다니!

백은하: 우리가 흔히 ‘여배우’라고 부르는 단어의 정의에는 괄호 열고 ‘스타’ 가 들어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혹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여배우는 기본적으로 남자 배우보다는 스타성이 요구되는데 결국 이건 속물적인 욕망들과 연결 지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어떤 영화 세트장이 아니라 화보 촬영장이고, 막걸리가 아니라 돔 페리뇽이 나와야 하는 상황인가 생각했을 때, 여배우들 안에 어쩔 수 없이 자리 잡은 속물성을 건강하게 꺼내 보여주고 싶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재용: 맞다. 그런 거다. 처음 시나리오에는 이 대단한 여배우들이 어쩌다 연극 무대 때문에 모이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각자 연락을 받고 왔는데 와보니까 자기만 연락을 받은 게 아니었고 그런 데서 벌어지는 갈등, 그걸 그리려니 여러 설정들을 무리해서 가져와야 했는데 아까 말했듯 여배우 하면 떠오르는 것 즉 ‘스타성, 패션, 미모, 경쟁’ 이런 요소와 장치들이 패션화보로 장소를 옮기니까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되더라.

백은하: 관객들은 저 배우들에게 저런 면이 있어? 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녀들을 아는 인사이더 들은 맞아 맞아 하면서 보더라.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의 경계가 참 아슬아슬하다. 꼭 배우 본인의 에피소드 아닌 것도 있었을 테고.
이재용: 넓게 얘기하면 그 동안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 들었던 여배우에 관한 에피소드들, 내가 파악한 여배우들의 특성들을 고르게 배치한 거라고 보면 된다. 실제 본인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여배우들의 공통된 속성들에서 도출된 상황이기 때문에 맞아 떨어지는 거다. 현장에 도착하는 순서에 대한 견제라던가, 촬영하러 가기 싫어서 하는 변명이라던가, 따로 찍고 나중에 합성하면 안 될까요 하는 부탁들 (웃음). 딱 어디라고 얘기할 순 없지만 들었던 것들, 혹은 충분히 그럴 것 같은 것들을 모아 낸 거다.

백은하: 고현정과 최지우의 말싸움 신은 어쩌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인데 (웃음) 질투 혹은 경쟁이라는 게 여배우들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쁜 의미로가 아니라, 그들을 분발 혹은 파이팅하게 하는.
이재용: 사실 그건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나? 기자들끼리도 다른 기자들보다 좀 더 잘 쓰려고 하고, ‘1대 1로 만나야지, 라운드인터뷰 같은 건 절대 안 해’ 이런 거 있잖아 (웃음) 이건 어느 성이나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개개인의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고, 결국은 인간적인 매력 위에 드리워진 여배우로서의 모습이 보여질 것이고, 더 나아가 여자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회상을 좀 반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열이랄까, 나름의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 같은 것들까지도. 마치 ‘분장실의 강선생님’처럼.

백은하: ‘분장실의 강선생님’이야말로 과 가장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한 거 같은데? (웃음).
이재용: 하하. 영화 찍고 있는데 이런 코미디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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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여섯 명의 여자가 ‘여배우’란 공통점으로 묶이는 부분도 있지만, 각각 생각하는 여배우상이나 대중들과 만나는 지점의 높이나 깊이 같은 게 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숙의 경우 여배우는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적당한 신비감과 거리감을 가져줘야 한다고 믿는 것 같고, 고현정의 경우는 평소 때나 영화에서나 연기에서나 태도적인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이재용: 사회가 변하는 만큼 그 안에 있는 여배우들도,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는 거라고 본다. 예전처럼 결혼하면 끝, 이혼하면 퇴출, 돌아오면 누구네 이모, 고모로 넘어가는 시대는 아니지 않나. 이미숙, 장미희, 김미숙, 그 아래 김혜수, 이영애, 고현정, 전도연까지 예전에 비하면 활동연령대도 많이 올라간 게 사실이고.

백은하: 한편 과거는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여배우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여배우들이 좀 더 다양하고 많아졌는데 다음 세대의 대표주자가 아직 등장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재용: 트로이카, 같은 상징은 늘 언론에서 만들어 내온 건 사실인데, 지금 만들어낼 수 없다는 건, 음… 그만큼 각각의 개성들이 좀 남달라서 이지 않을까?

백은하: 이나영, 송혜교, 임수정, 하지원, 신민아 등 다음세대의 여배우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전 세대를 위협할 만한 메가급의 여배우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재용: 못 나온 것도 있지만 앞서 말한 배우들의 활동 연령대가 올라가면서 분산시킨 것도 있겠지. 이영애, 전도연이 여전히 건재하니까 그 벽을 넘는 사람들이 없는 거랄까. 그건 남자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장동건, 정우성, 이정재 이후에 그 아래로는 다 분산되어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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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이미숙이 “여배우들이 표지로 나오는 게 처음이라고? 근데 왜 우리더러 프라이드를 가지란 거야? 자기들이 프라이드를 가져야지”라는 말에 참 뜨끔하더라.
이재용: 윤여정, 고현정, 이미숙은 여배우이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는 시선을 늘 거부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요즘 논란이 되는 스폰서라던지, 가방 줄 테니 행사를 와라 마라 하는 그런 거 있지 않나. 이를테면 윤 선생님은 클래식을 좋아하시고 문인들도 많이 알고 있고 그래서 무슨 명사들의 파티에 친구로서도 초대받고 가는데, 그러면 거기 온 사람들이 ‘어떻게 오셨어요’ 이렇게 묻는다고 하더라. 그게 제일 자존심 상하는 것 중 하나라고. 어떻게 오긴, 올만 하니까 온 건데 다들 ‘배우가 어떻게 이런 자리까지’ 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결국 여배우들이기 때문에 이럴 거야라는 취급을 안 받으려고, 그 편견들하고 나름 계속 싸워 온 사람들인 거다. 그러니까 당당하게 프라이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고.

백은하: 그래서 영화를 보면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은 생존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어쨌든 살아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
이재용: 이 여배우들이 공통적으로 까다롭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인데 내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사회에 상식을 자꾸 들이대니까 ‘왜 저 사람들은 대충 넘어가지 저렇게 까다롭게 하지’라는 말도 듣는 거지. 이걸 내가 왜 해? 배우라서 내가 이걸 해야 해? 라는 의문을 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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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나이가 몇 살이든 여배우는 데뷔하는 순간 나이가 멈춘다는 말을 들었다. 나쁘게 얘기하면 사회적으로 미숙하고, 어떻게 보면 환갑이 넘어도 순진함 같은 게 보통 여자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라고.
이재용: 흔히 여배우들이 영악해서 기회도 잘 잡고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순수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배우를 하는 거 같고, 감독이나 작품만 믿고 자기를 던질 수도 있고. 계산이 많으면 그럴 수가 없다. 그만큼 맑은 부분이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걸 윤여정 선생님은 ‘물색이 없다’고 표현하는데 이를테면 도 욱해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나리오도 캐스팅도 개런티도 안 나왔는데, ‘감독 님 그런 거 진짜 하고 싶어? 내가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해보지 뭐.’ 이렇게 5분 만에. 이런 걸 계산하고는 못한다.

백은하: 그런데 보통 여배우들이란 자고로 변덕이 심하고 자기 좋은 거 쫓아가고 그럴 것 같은 이미지가 많다.
이재용: 물론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예민하고. 이러니까 배우를 하는 거겠지. 아니면 일반인인 거고. 본인이 악기인 사람들인데 섬세하고 예민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이고 그만큼 상처도 쉽게 받을 수 있고 쉽게 빠져들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감정이 더 주무기인 사람들이니까 의리라는 것도 계산보다 감정에서 나오는 거고.

백은하: 한 명의 감독 입장에서는 솔직히 어떤 여배우들이 편한가. 이를테면 자아가 굉장히 강해서 자기주장이 있는 배우? 아니면 주장이 없는 수동적 배우? 의 감독 그랬던가요, 여배우는 기본적으로 백치라고.
이재용: 배움이 길건 짧건 간에 배우란 결국 감독의 말을 이해를 해서 그걸 표현해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영리한 배우가 좋다. 백치가 아니라 백지. 영리하면서 자기의 감정을 백지로 비울 수 있는 그런 배우. 감독이 칠하고 싶은 색이 그대로 묻어나게끔 순수한 사람들이 좋은 거다. 영악한 거랑은 다른 똑똑한 배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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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슬픈 이야기는 한데 남자배우들이 나이가 들면서 얻게 되는 것과는 달리 여배우들은 확실히 노화라는 데서 더 자유롭지 못한 거 같다.
이재용: 원래 시나리오에서 이미숙 씨의 설정은 ‘우울증 걸린 이미숙’이었어다. 겉으로 너무나 씩씩한데 스튜디오에 들어오기 전에 우울한 표정을 싹 걷고 들어오는 그런 여배우, 그런데 너무 그늘이 없더라고. (웃음) 우울증 걸려본 적도 없고, ‘전에 좀 우울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했더니 ‘그냥 하는 소리지, 진짜 우울하면 그런 말을 하겠어요?’라더라. 물론 20대, 30대, 그 미모와 그 캐릭터로 정말 거침없이 살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먹어도 안 될 수 있다라는 거에 대한 좌절감이 있을 텐데 이미숙 씨는 내면으로 많이 투쟁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농담처럼 “내가 신약 개발 하고 있으니까 다들 나중에 연락해” 하면서 노화에 대한 스트레스를 혼자 쌓아두는 게 아니라 막 풀어버린다. 대여섯 시간씩 운동을 하고, 비타민 잘 챙겨먹고. 스트레스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걸 겉으로 드러내면서 극복하는 사람인 거다. 윤여정은 본인 스스로 ‘노배우’ ‘늙은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자기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객관화하면서 오히려 그걸 극복해가는 거 같다. 남들이 먼저 ‘저 양반 왜 이렇게 늙었대?’라고 공격하기 전에 ‘나 늙은 거 알아요. 아니까 공격하지 말아요’ 하는 거 같이.

백은하: 영화에서 윤여정이 “너희들 내 앞에서 피부 얘기 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어쩌면 모두 노화라는 자연현상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각각의 정신치료법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이재용: 그거 없이는 견디기 힘든 직업 인 거다. 세상은 계속 여배우의 나이를 건드리니까. 왜 우리나라에는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메릴 스트립 같은 여배우가 없을까라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이건 여배우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문제다. 어느 시점이 지나고 스타덤의 권좌에서 내려오면 당신은 ‘끝났다’라고 쉽게 평가해버리니까 여배우가 멋진 자아를 유지해나가기 너무나 어려운 사회 환경인 거다.

백은하: 만약 남자 배우들이 모아 놓고 이런 영화를 만든다면 아주 다른 풍경이 벌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서열에 의한 평화가 조성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 닭살 돋지 않는 선에서 여자들만의 평화를 이뤄내는 방법을 이 영화에서 본 거 같았다.
이재용: 남자들은 표현하는 걸 어색해하니까 이런 식의 아기자기함은 못나올 거다. 만약 남자배우들이라면 이렇게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보다는 또래들을 모아보고 싶다. 같은 연배들이 서로 뭉칠 수만 있다면. 이병헌, 장동건, 정우성, 이정재….아니면 한류 스타들이 모여서 벌어지는 일들이 랄까. (웃음)

백은하: 여배우들처럼 정말 모일 수 있을까?
이재용: 그건 모르지. 그런데 아마 의 여배우들도 여자라서 잘 모인 것은 아닐 거다. 이 사람들이니까 한 거지. 어떤 여배우들은 모이는 거 자체가 두렵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 참여 못한 배우들이 꽤 있다. 결국 여기 나와 준 사람들은 틀에 갇힌 여배우의 이미지를 거부한 사람들인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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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영화가 ‘기록의 매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준 영화였다. 이 쟁쟁한 당대의 여배우들이 모였다는 것이, 그리고 이 여자들의 진심이나 목소리가 적어도 진실에 근접한 방식으로 기록됐다는 것이 만들어내는 가치 말이다.
이재용: 영화 속에서, 2008년 12월 24일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걸 기념으로 사진 찍자고 얘기하듯, 은 2009년 6월 2주간 우리가 이 영화를 촬영했다는 걸 먼 훗날 추억하기 위한 기념이 된 거 같다. 그들도 언젠가 변해갈 거고. 누구는 사라져갈 거다. 그럴 때, 맞아 우리 한 때 저렇게 보냈는데, 졸업 앨범 보듯 꺼내볼 수 있는 것도 같고. 출연한 여배우들은 이 영화를 통해 각각 어떤 부분이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백은하: 여기에 출연하지 않은 다른 여배우들 역시 이 영화를 보며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이재용: 결국 6명의 국가대표 여배우를 뽑았다기보다는 기꺼이 여배우들을 대표해서 대변할 사람들이 나섰다는 게 맞을 거다. 어쨌든 모든 여배우들이 한번쯤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대신 얘기해주고 있으니까.

백은하: 10년 후에 이 여배우들을 다시 한 번 모아서 영화를 찍어보면 어떨까? 2018년 크리스마스 이브 쯤 동창회처럼?
이재용: 아! 정말 그럴까? 그 땐 실제 다큐멘터리로 해도 좋을 것 같다. 보자, 그 때면 윤 선생님이 일흔 셋인데…? 모두 어떻게 변할지 꽤 궁금하기도 하다. (웃음)

인터뷰,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정리.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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