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배용준은 박제된 얼굴로 기억되었다. MBC 이후 2년 사이 우리에게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몇 편의 광고와, 현해탄 건너로부터 꾸준히 날아오는 일본 관광객들의 존재 정도였다. 명동 거리에 놓인 판넬에서 늘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 배용준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그래서 더욱 흥미롭고 진기한 것이었다. 이것은 9월 30일 일본 도쿄 돔에서 열린 출판 기념 이벤트 후 있었던 인터뷰의 기록이다. 예정되었던 짧은 티타임에서 점점 길어져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간 인터뷰 내내 배용준은 미소로, 반문으로, 농담으로, 혹은 진지한 표정을 통해 글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통’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부디 이 기록이 우리 모두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조금도 알지 못했던 ‘인간 배용준’을 향한 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가 되기를 바란다.배용준 씨에게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을 기대하는 시선도 있고, 시대의 흐름 자체가 디지털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오히려 그런 대세로부터 거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세계적인 것보다 한국적인 것,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가까운 책 작업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한데요.
배용준 : 그동안 저 때문에 한국 촬영 현장에 오셨던 가족 분들이 촬영장만 보고 돌아가시는 게 항상 참 안타까웠어요. 그리고 <태왕사신기>를 끝내고 건강 때문에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 중 ‘과연 내가 어떤 것들에 둘러싸여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현재는 과거가 축적된 결과니까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무엇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했는지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과거를 되짚어 봤구요. 또, 사실 자국 문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관심들을 조금만 더 가져 주면 우리 문화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고, 즐기다가 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뭔가 새로운 걸 창조해내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게 가장 옳은 답인 것 같아요.
“팬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해요”
일본에 와서 느낀 건 배용준 씨의 존재가 한국에서 느낀 위상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사실인데요.
배용준 : 사실 한국에서는 (기자들을 가리키며) 여기 계신 분들이 인정을 안 해주시니까. (웃음) 대중은 언론에서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예전부터 제가 ‘한류’라는 말을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건 그렇게 일방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보다 서로 문화를 교류하는 느낌으로 가는 게 보기 좋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쓰는 기사들, 일본에서도 다 보고 그대로 기사화 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게 정말 우리나라를, 우리 자신을 위한 건지 좀 더 생각하면 정말 더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한일 양국에서 인기의 온도차가 다소 있는 것 같습니다.
배용준 : 제가 한국에서는 인기가 없다는 말씀이신 거죠? (웃음) 하지만 한국에도 충분히 저희 가족(팬)들이 많아요. 사실 이번 도쿄 돔 행사에서도 한국에서 오신 분들 때문에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났거든요.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이하 <한아여>) 출판 기념 도쿄 돔 이벤트에서 직접 팬들에게 엽서를 쓴다거나 하는 무대 연출 등의 아이디어는 직접 내신 건가요.
배용준 : 네, 제가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줄 수도 없고, 물론 마음은 그렇지만 그런 방식으로 전달할 능력이 없거든요. 연기를 보여드릴 수도 없고. 그러니까 엽서는 제 마음을 전달하고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도구였어요. 사실 일본어로 얘기를 좀 해보고 싶기도 했는데 이번에 아프면서 열이 40도까지 오르는 바람에 공부한 것들이 거의 지워져 버렸죠.
책을 낸 것 외에도 한국의 전통문화인 해금 연주나 사물놀이, 고전무용 공연 등을 이벤트 무대에 올린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전통문화를 알리고 문화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는 일종의 사명감이나 책임감도 필요할 것 같은데요.
배용준 : 분명, 누가 끌어주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제가 그런 생각, 그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건 우리 가족들이세요. “당신은 이러이러해서 정말 대단하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뭔가 더 많은 걸 하고 싶고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몇 년 전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어느 교포 분이 울면서 저한테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순간 ‘미약하더라도 내가 할 일이 있겠구나. 좀 더, 뭔가를 해야 되는 일들이 생기겠구나’ 싶었어요. 사실, 그런 생각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누가 만들어서도 아니고, 내 근본 바탕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 해도 전통문화에 대해 세세한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한아여>에 실린 것 같은 글이 나올 수는 없을 텐데,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뭔가요.
배용준 : 공부하는 시간을 합치면 책 작업에 한 1년 반 정도가 걸렸어요. 일단은 모든 분야의,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을 다 사서 공부했고 자료를 보며 과연 이게 정확한 정보인가, 여기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저기서는 다르게 얘기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했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각 분야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 말씀이 정답이란 믿음을 토대로 정보를 실었고, 항상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선생님들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녹음해 집에 와서 다시 듣곤 했지요. 그런데 제가 원래 글을 썼던 사람이 아니다 보니 느낀 것, 생각한 것들을 표현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어요. 세 달 정도 거의 잠을 못 잤고, 결국 글을 막바지까지 붙잡고 있는 바람에 출판사 분들이 사흘 만에 교정, 교열을 보셔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오타도 좀 있어요.
“미륵사지에서 느낀 단상들은 내가 쓰고도 감탄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쓰는 작업이 연기나 사진과는 다른 면에서 희열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배용준 : 연기할 때도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뭔가 분명히 느껴질 때가 있긴 있어요.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내가 써 놓은 글을 보며 ‘우와,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는 거죠. (웃음)
이를테면 어떤 구절인가요?
배용준 : 도쿄 돔 출판기념 이벤트에서도 낭독한, 미륵사지에서 느낀 단상들이라던가, ‘인정(人情)’이라는 정서가 우리의 의식주를 관통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도 사실은 혼자서 속으로 ‘아, 정말 내가 이런 생각을!’ 그랬어요. (웃음) 그런데 앞으로 또 책을 쓰지는 못할 것 같아요. 힘들어서. 그래서 ‘다시 책을 만들게 되면 사진 위주로 하겠다’고 한 것도 있는데 사실 이번 책에서 사진이 좀 많이 아쉽기도 했어요. 취재하면서 사진을 찍고 나중에 글을 쓰다 보니 필요한 사진이 없길래 어떤 사진들이 필요하다고 쭉 적어서 붙여놨지만 계속 밤을 새고 글을 쓰다 보니 다시 찍으러 갈 수가 없었거든요.
책에 직접 찍은 사진도 다수 실었는데, 전문성을 갖춘 포토그래퍼가 되는 데는 어느 정도 공부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배용준 : 사실 사진의 형식적인 면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중요한 건 감성이라, 항상 느끼는 건데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만 결국 셔터를 누르는 건 제 가슴이거든요. 가슴이 허락하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 셔터를 누르는 거니까 테크닉 보다는 감성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디지털 작업을 잘 하지 않아요. 필름을 쓰는데, 디지털로 찍으면 (앞에 있는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저렇게 막 누르거든요. 이러면 하나 건지겠지, 하고. (웃음)
평소에는 본인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데 책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하는 장난스런 모습이 많이 담겨 있어요.
배용준 : 이 책은, 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절대 못 쓰는 거예요. 제가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만들어낼 수도 없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제 안에 있는 게 다 그대로 나왔죠. 밤샌 다음 날에는 우리 직원들, 동료들에게 문자로 “나 지금 잔다. 토할 것 같아”라고 보내기도 하고, 어떨 땐 진짜 “우웩!” 이라고 보내기도 했어요. (웃음)
인터뷰. 도쿄=백은하 (one@10asia.co.kr)
인터뷰. 도쿄=최지은 (five@10asia.co.kr)
글. 도쿄=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도쿄=이진혁 (eleven@10asia.co.kr)
사진. 도쿄=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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