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경 작가는 예쁘다. 맑은 음성과 소녀 같은 웃음이 그렇고, 어떤 물음에든 잠시 망설이다 수줍게 털어놓는 이야기가 그렇다. 그는 말하기보다 묻기를 좋아하고 보통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사소한 것들을 마음 속 깊이 챙겨놓았다가 조금 다른 방향에서 찬찬히 들여다본다. 한 마디도 쉽게 말하거나 쓰지 않고 곱게, 그러나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천성은 얼굴에 가장 먼저 드러난다. 그래서 정유경 작가의 나이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는 올해로 벌써 17년차 작가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써요. 오래 한다고 경력이 쌓이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만큼 인정받는 거니까 항상 전쟁터에 나가 있는 기분이에요.” 대학을 졸업하고 아침 생방송 팀의 구성작가로 일한지 2년이 지날 무렵 습작으로 썼던 단막극 대본이 한 드라마 감독의 눈에 띄면서 그는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당시 초보 감독과 작가로 만났던 안판석 감독과는 MBC <베스트 극장> ‘이종범 아저씨께’ ‘사랑의 인사’ 를 비롯해 <예스터데이>와 <현정아 사랑해>를 함께 했다. <사과꽃 향기>와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등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에서도 특유의 서정성을 놓지 않았던 정유경 작가는 2007년, 우연한 사고로 살인 전과자가 된 여주인공의 이야기 KBS <인순이는 예쁘다>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라는 테마를 제시하며 자신의 세계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갔다.

“예전에는 작품을 쓰면서도 이런저런 불안이나 핑계가 많았지만 마흔이 넘은 뒤로는 그냥 내 멋대로 살아보리라 하는 배짱 같은 게 생겼다”는 정유경 작가는 그래서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내면의 고민을 남들과 나누기를 꿈꾼다. “삶이 제대로 방향성을 갖고 나가게 해 주는 도구가 예전엔 책이었다면 지금은 드라마의 몫이 좀 더 커진 것 같아요. 그 안에서는 작가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고, 그걸 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드라마를 처음 쓰던 시절의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돌아봐요. 내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게 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고 깊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죠.” 사람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그리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한 곳이 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그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한다. “계약금을 많이 받는 것보다 ‘이 드라마로 내 인생이 움직였어요’라는 말을 듣길 원하는 건, 아마 모든 작가가 마찬가지일 거예요.” 정유경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다.

美 ABC <케빈은 열두 살>(The Wonder Years)
1988년

“한국에서는 92년쯤 KBS에서 방송되었어요. 커서 어른이 된 주인공 케빈이 자기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인데 제가 태어난 해인 1968년이 배경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20년이나 전을 회상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진짜’ 같았던 것은 이 작품이 시대나 공간을 초월해서 본질에 충실한 무엇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가 좋았고, 케빈의 내레이션을 비롯해 담겨 있는 문학성이 좋았어요. 요즘 같은 때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느낌을 주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만든다 해도 감히 내가 그런 걸 쓸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도 있지만 여전히 부럽고 꼭 만들어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MBC <베스트극장 –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이유>
1992년. 극본 주찬옥, 연출 황인뢰

“가난한 시골 소녀에게 사춘기의 설렘을 느끼게 했던 남자애가 서울로 전학을 가요. 시간이 흐른 뒤 소녀는 벌치는 처녀가 되어 있고 남자애는 대학을 나와 공학박사가 되어 약혼녀와 함께 고향에 내려와요. 주인공이었던 김혜수와 조민기가 다시 만나 얘기를 하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는 너무 큰 괴리가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죠. ‘인어공주’ 같은 동화적 줄거리에 비해 전체적으로 너무나 서늘한 느낌의 작품이에요. 유년의 추억을 공유했지만 계급이 달라지면서 더 이상 소통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 특히 김혜수 씨가 처연한 눈빛 연기를 통해 보여 준 아이 같은 텅 빈 느낌이 기억에 오래 남았어요. 지금은 이렇게 향기 있는 작품들을 만들기 힘든 시대가 되었지만, ‘서로 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것은 여전히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해요.”

MBC <엄마의 바다>
1993년, 극본 김정수, 연출 박철

“김정수 선생님은 제가 MBC 아카데미 1기에 다니고 있을 때 강의하러 오신 걸 처음 뵙고 굉장히 좋아하게 된 분이에요. <전원일기>나 <그대 그리고 나> 같은 작품도 좋아하지만 <엄마의 바다>는 드라마라면, 연속극이라면 이렇게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전범이 되었죠. 김정수 선생님 작품에서 항상 배우고 싶은 건 콩나물 값이나 반찬 얘기 같은 작은 소재에서 얘기를 만들어내는 힘과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에요. 그래서 당시에는 저 역시 아무런 비전도 없고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는데 이 작품을 보고 희망을 갖게 되었죠. 지금 제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힘이 되는 드라마를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람이 배우자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인순이는 예쁘다> 이후 정유경 작가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올해 초,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첫 아이를 낳은 것이다. “늙은 엄마를 위해 밤에 깨서 울지 않는 맞춤형 착한 아기”임에도 그의 인생이 크게 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생명을 리드하고 보살핀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게 처음이라 힘들지만 거기서 배우는 게 많아요.” 그래서 내년 정도를 예상하고 기획안을 준비 중인 정유경 작가의 다음 작품 주인공은 그와 같은 주부가 될 전망이다. “사람이 결혼을 통해, 배우자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누구랑 결혼하던, 남들이 뭐라 하던 자기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는 얘기인 거죠.” 이상한 일이다.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임에도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진실’다운 힘을 갖는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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