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제작 발표회에서 민효린은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피겨스케이팅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당시 나에게는 <트리플> 밖에는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주목받는 광고 모델로 데뷔했고,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영광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 무렵의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배우로서 연기 할 수 있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갈증을 키워가는 그녀에게 1년이라는 준비의 기간은 견뎌야 하는 짐이 아니라 즐겁게 기다릴 수 있는 기회였으리라. 덕분에 그녀는 빙판 위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테크닉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민효린이 꿈꾸는 것은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아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은 배우.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피드와 유연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다. “감독님이 대본을 제 말투에 맞게 고쳐주세요. 그래서 좀 더 하루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꼭 하루를 닮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는 그래서 요즘 머릿속을 온통 소녀시절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 넣고 있다. “아, 제가 벌써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열아홉이잖아요. 그 풋풋한 설렘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걸 늘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녀로부터 ‘사랑을 꿈꾸는 소녀에게 어울리는 노래’들을 추천 받았다. 이 노래들을 들어서 그럴까. 이미 그녀는 머리부터 발 끝 까지 소녀의 분위기로 가득 해 있었다.
“영화에서 희재가 여자주인공 이름이었잖아요. 결국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아플 때나 힘들 때 끝까지 자신의 옆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인 것 같아요. 그렇게 절절한 사랑을 보통 소녀들은 상상하지 않나요?” 민효린이 첫 번째로 꼽은 노래는 영화 <국화꽃 향기>의 O.S.T에 수록된 성시경의 ‘희재’다. 그룹 뮤턴트 출신으로 이수영과 박정현 등 여자 가수들의 인기 발라드를 주로 작업해 온 MGR이 작곡 했으며, 애절하면서도 감미로운 특유의 선율이 슬픈 가사와 잘 어우러진 곡이다. “노래도 참 좋지만 저는 도입부의 기타소리가 정말 좋아요. 쓸쓸하면서도 마음이 아파지는 느낌이랄까. 그러다가 다른 현악기 소리가 섞이는데 물감이 섞이는걸 보는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역시 성시경 선배님의 목소리겠죠.”
민효린이 두 번째로 추천한 곡은 시카고의 빅히트송인 ‘Hard To Say I`m Sorry’로, 얼핏 소녀의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노래다. 그러나 그녀가 원곡보다 훨씬 좋아한다는 웨스트라이프의 버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노래를 듣기 전에도 원래 유명한 곡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거든요. 그런데 웨스트 라이프의 목소리로 듣는 순간 정말로 이 노래가 감미롭게 느껴지더라구요. 원곡은 좀 담백한 느낌이 있는데, 웨스트라이프가 불렀을 땐 화음이 분위기를 훨씬 달콤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1968년 결성된 시카고의 ‘Hard To Say I`m Sorry’가 차트 정상을 차지한 해는 민효린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82년이었다. 그리고 웨스트 라이프 멤버들의 평균 출생 년도는 1980년이다. 좋은 음악이란 세대의 끝을 잡고 이어지는 법이다.
노래 제목만 나열해 놓고 보면 민효린의 음악 취향은 겉보기보다 옛날 노래들까지 스펙트럼이 뻗어 있다. 그러나 사실 “‘한사람을 위한 마음’은 럼블피쉬가 리메이크 한 버전을 듣고 좋아하게 된 거에요. 나중에 들어 보니까 원곡도 좋더라구요”라는 그녀의 고백을 들으면 음악의 동시대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음악이란 만들어질 때가 아니라 불려 질 때 생명을 얻는 법이다. “비오는 날이나 혼자 있을 때 듣고 싶은 그런 노래에요. 가사 중에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부분을 들을 때는 특히 그래요. 어릴 때는 사랑을 생각하면 마냥 두근거리기만 하잖아요. 그런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사랑은 마음이 아픈 거란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하루가 딱 그런 시기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것 모두가 사랑의 세트라는 걸 알게 되는 거겠죠.”
“양파 선배님의 팬이에요!”라고 노래를 고르기 전부터 양파에 대한 애정을 쏟아내는 민효린은 어린 시절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연예인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 아주 작은 여자아이였을 때 듣던 노래를 아직도 즐겨 듣고 있는 민효린에게 양파의 노래들은 단순히 좋은 선율일 뿐 아니라 초심을 돌이키게 만들어 주는 어떤 장치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아끼는 노래는 1998년 발표한 양파의 2집에 수록된 ‘소녀가…소년에게…’다. “양파 선배님 노래는 다 좋아하는데, 이 노래는 타이틀곡보다 덜 알려져서 오히려 더 애정을 갖게 되는 노래에요. 지나간 과거의 사랑을 추억하면서 후회하는 가사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중에 하루가 풍호를 기억하면서 이 노래를 들을 것 같기도 해요. 지금은 다른 사랑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항상 하루 옆에 있어 줬던 건 풍호잖아요.”
민효린이 마지막으로 추천하는 노래는 지난해 머라이어 캐리가 발표한 앨범
“지금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 하는 일에 푹 빠져 있어요”
사실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노래 실력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는 평가에 민효린은 그저 쑥스럽게 웃었다. “그때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기분이 정말 좋았지만, 당분간 무대 생각은 좀 접으려구요. 지금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 하는 일에 푹 빠져 있거든요.” ‘Stars’의 청순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이나 ‘Touch me’의 사랑스러운 발랄함이 그리운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새롭게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여배우, 민효린을 주목하는 시청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이 없다. <트리플>이 끝날 무렵에 그녀는 얼마나 더 배우가 되어 있을까. 그리고 아직 결정된 것 없는 그 다음 행보는 무엇이 될까. 과정을 지켜보고 싶은 신인의 등장이 참으로 반갑다.©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