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방송계는 지난 10년 사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격랑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방송사가 흔들리고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제작진이 징계를 받는 무수한 사건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희생되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은 방송계의 ‘약한 고리’인 방송작가들이다. 올해만 해도 MBC 광우병 편의 구성작가 긴급체포, KBS 드라마 작가 선급금 회수 논란, KBS의 PD 집필제 시행 논란 등 유례없는 사건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방송환경의 변화로 인해 일어났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어이없고 엄청나게 큰 파급력을 가진다. 2007년 3월 취임한 김옥영 한국방송작가협회(이하 작가협회) 이사장으로부터 현 상황에 대한 입장을 들었다.

취임 이후 1년 3개월여 동안 작가협회 차원에서 중요했던 이슈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김옥영:
오자마자 KBS 단막극이 폐지됐다. 이 문제가 워낙 심각해서 작가협회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결국 KBS가 단막극을 부활시키기로 해 TF팀도 만들었는데 경제난에 맞닥뜨리며 예산 문제가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방송진흥원(KBI)으로부터 어느 정도를 지원받기로 했다던데, 아직 이 문제는 진행 중이다. 그러고 나서 MBC 문제가 터졌고, 드라마 작가 선급금 사건, PD 집필제 시행 문제가 차례로 터졌다. 사실 이 모든 게 다 끝났다기보다는 일단락이 지어졌을 뿐 아직 진행 중인 사건들이다.

“일한지 2개월 된 보조 작가까지 기소하는 건 웃음거리”

구성작가 긴급체포 사건은 계약서나 소속이 없는 구성작가가 어디로부터도 보호받기 힘든 직업이란 것을 깨닫게 한 계기였고, PD가 아닌 작가에게까지 이미 방송된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을 묻는 전무후무한 경우였다. 작가협회 차원에서도 대응에 고민이 많았을 듯하다.
김옥영: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광우병 편 심의를 할 때 시사교양 작가들이 연명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것과 별도로 작가협회에서도 성명서를 냈다. 우리가 이렇게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 자체가 작년부터 시작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방송작가들이 1년에 한 번씩 검찰청을 방문하는 행사가 있는데 시사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같이 가서 임채진 검찰 총장에게 김은희 작가 문제에 대해 굉장히 신랄한 질의를 던지기도 했고, 김 작가가 긴급 체포된 이후로는 검찰청 앞에 가서 시위도 했다. 지금은 제작진들이 풀려났기 때문에 잠시 소강상태에 있지만 계속 주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사건이다. 일한지 2개월 된 보조 작가까지 기소한다는 건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일이다.

사건에서 공권력이 작가의 업무 부분을 침해했다면 KBS가 봄 개편부터 실시하고 있는 PD 집필제는 구성작가라는 직업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옥영:
, <추적 60분>, <6시 내 고향> 등 11개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부분적, 혹은 전면적으로 작가를 쓰지 않고 PD가 작가의 일을 하겠다는 게 PD 집필제의 골자다. KBS 측에서 내건 이유는 ‘PD 경쟁력 강화’라고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 제도를 통해 봄 개편 때는 1억 5천만 원, 가을 개편 때는 1억 9천만 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PD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어떤 시스템도 없으면서 갑자기 PD 집필제를 시행하는 건 구호적인 명분에 불과하다. KBS는 NHK와 같은 에디터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하는데, 일단 NHK는 한 채널에 시사교양 PD가 450명에 에디터가 250명 이상인 데 비해 KBS는 두 채널에 시사교양 PD가 230명이고 그렇게 훈련된 에디터가 없다. 게다가 에디터 시스템을 도입한다 해도 에디터의 업무와 작가가 해온 업무의 영역은 전혀 다르다. PD들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면 작가가 해왔던 스토리텔링이나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역량을 PD가 가져야 할 텐데, 일단 작가만 현장에서 내보낸다는 것 외에 아무런 방안도 없는 게 PD 집필제다. 실제로 글을 잘 써서 혼자 원고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PD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걸 강제적으로 “어느 프로그램은 40%를 PD가 쓰고, 어느 프로그램은 100%를 쓰라”고 하는 건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다.

일선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들의 반응은 어떤가.
김옥영:
사실 내부 조직원으로서는 PD집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능한 PD’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라 다른 사안들만큼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일단 문제가 되고 있는 게 업무의 과부하다. 지금 시행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갖가지 변칙이 등장하고 있다. 이미 작가로 입봉한 사람에게 ‘리서처’라는 직함을 주어 작가 일을 하게 한다던가, 그냥 아는 작가에게 원고를 부탁한 뒤 PD의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내보낸다던가, 심지어 ‘작가’ 대신 ‘스페셜 라이터’라는 이름을 걸고 내보내기도 한다. 영어로 쓰면 작가가 아닌가. (웃음) 심지어 PD가 원고를 쓸 시간이 도저히 없는 상황이면 내부에서 사비를 갹출해 작가를 불러 쓰는 일까지 있다고 들었다.

“아무런 보완책 없이 작가만 빼 버리면 콘텐츠의 질은 저하”

타 방송사 구성작가들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예능, 번역 작가들도 PD집필제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던데 그 어느 이슈보다 PD집필제에 대한 반발이 큰 이유는 무엇일까.
김옥영:
지금 KBS 구성작가들을 비롯해 방송작가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봄 개편 때 PD집필제를 하고 가을 개편 때 더 하고, 내년에 또 하려는 게 KBS의 입장이라고 본다. 그렇게 가면 시사교양 작가들을 전부 내보내겠다는 거고, 또 워낙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걸었기 때문에 타 방송사나 지방 방송사, 외주 제작사로 퍼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원래 구호적인 명분을 가지고 실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안들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법이다.

PD집필제가 한국 방송 제작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일까.
김옥영:
한국에서는 작가-PD 협업이 이미 30년 동안 자리 잡은 시스템이다. 우리나라는 경제가 압축 성장을 한 것처럼 방송 역시 짧은 기간 동안 성장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외국 같은 시스템의 도움보다는 PD와 작가라는 ‘사람의 힘’으로 방송을 발전시켜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PD는 표준제작비 뽑는 것부터 시작해 프로그램을 만들어 편집하는 것까지 프로듀서와 디렉터의 역할을 모두 다 해야 하다 보니 비교적 낮은 임금으로 구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인 작가들이 실무 영역 대신 프로그램의 퀄리티에 대한 부분을 공동으로 맡게 된 거다. 그러니 만약 KBS가 NHK같은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면 PD 선발부터 교육까지 굉장히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는 상태다. 게다가 KBS는 80년대부터 방송작가를 키워내는 수원지 역할을 했고 이들이 MBC나 SBS로 옮겨가며 프로그램에 대한 노하우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MBC의 간판 격인 휴먼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도 KBS에서 일하던 故 박명성 작가가 MBC에 가서 <인간시대>를 만들면서 발전한 경우다. 이렇듯 방송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KBS에서 만들어진 거고 지금도 수많은 방송작가 예비군이 있는 상황에서 KBS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사실 시청자 입장에서는 프로그램의 질적인 변화가 가장 와 닿는 문제가 아닐까.
김옥영:
바로 그 점이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아무런 보완책 없이 작가만 빼 버리면 당연히 콘텐츠가 질적으로 저하될 수밖에 없다. 이미 어느 프로그램의 경우 심각한 문제가 눈에 띈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KBS 구성작가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모니터링 시스템을 가동하며 PD집필제 이후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게 우리의 시작”

KBS의 드라마 작가 선급금 회수 문제는 어떤 점이 논란이 되었나.
김옥영:
지금은 경기가 나빠져서 그런 경우가 많지 않지만 예전에는 드라마 작가들이 50편이나 100편 단위로 방송사와 계약을 했다. 만약 50회분 주말극을 이번에 쓰기로 계약한다면 일단 100회분으로 계약하고, 52회로 그 드라마가 종영하면 48회 분량이 남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작가 측이 아니라 방송사 측에서 원했던 계약이었다. 드라마는 한 작품이 잘 되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건데 드라마 작가들은 한번 뜨고 나면 원고료가 오르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작가들에게는 미리 많은 편수를 계약하고 싶어 했던 거다. 입도선매 같은 거지. 그런데 요즘 경기가 어렵고 재정난에 부딪히니까 작가에게 그 돈이 묶여있다고 생각해서 어느 날 갑자기 내용증명을 보내 “돈을 돌려달라”고 한 거다. 그러나 만약 KBS가 상황이 나빠서 돈이 필요하다면 작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의사를 묻는 게 도리인 거지 그런 식으로 진행하면 안 되는 일이라 문제가 됐다. 지금은 일단 해결이 된 상태고, 일이 이렇게 된 데는 계약서 자체가 미비했던 탓이 크기 때문에 계약서를 수정하자는 의견을 나누는 중이다.

현재 방송사의 재정난이나 경기불황에 대해 작가 차원에서 일정 정도 희생을 감수하기로 한 부분은 없나.
김옥영:
해마다 작가협회와 방송사가 원고료 협약을 맺는데 올해는 IMF 때 이후 두 번째로 규정고료를 동결했다. 사실 규정고료가 현실적으로 지나치게 적은 액수이다 보니 현장에서는 전부 별도 결제를 받은 별결 고료를 지급하는데, KBS는 올해 별결 고료를 10~13% 정도 삭감했고 작가들 역시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가 PD집필제를 시행하며 작가들을 쓰지 않겠다고 하는 점에 작가들의 분노가 크다.

한국 방송 시스템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거나 이슈가 생길 때마다 작가의 권익이 가장 쉽게 위협받는 것 같다. 이러한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김옥영:
일단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방송 콘텐츠에 대한 경영자의 철학의 부재다. 지난 달 일본의 대표적 민영방송사인 후지TV의 전략국장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제작비 절감이 콘텐츠의 질적 저하를 초래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외부 제작비를 삭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손쉽게, 내부인의 희생 없이 줄일 수 있는 게 외부 인력이다 보니 일단 외부인력 삭감하고 외주업체를 쥐어짠다. 한국 방송가에서 이어져 왔던 불공정한 문제들이 경제가 나빠지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이게 하루 아침에 고쳐질 일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힘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작가들은 아무런 힘도 없고, 작가협회 역시 노조 같은 힘을 갖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일 뿐이지만 각성한 개인들은 중요하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게 우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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