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 이요원, 엄태웅, 박예진, 유승호, 아니 이순재, 신구, 송옥숙, 이문식… 매번 캐스팅 기사가 나올 때마다 그 엄청난 규모에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MBC 창사 48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선덕여왕>(극본 김영현 박상연, 연출 박홍균 김근홍, 제작 타임박스 프러덕션)이 드디어 오는 5월 25일 밤 9시 55분 첫 방영을 기다리고 있다. <10 아시아>는 앞으로 6개월을 함께 할 이 흥미진진한 드라마에 대한 꼼꼼한 예고편을 준비했다. 유승호의 등장으로 술렁거렸던 경주 제작발표회 현장의 생생한 사진들과 함께, 김영현, 박상연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선덕과 미실 이 두 여인을 둘러싼 수많은 남자들의 라인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천하의 주인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한 여인이 그에 화답한다. “폐하, 사람을 얻는 자가 시대의 주인이 된다고 하셨습니까? 보십시오, 미실의 사람들이옵니다. 이제, 미실의 시대입니다”
오는 5월 25일 첫 방영을 앞두고 있는 <선덕여왕>은 이처럼 처음부터 쉽고 명확한 선 긋기를 감행한다. 이렇게 진흥의 시대가 가고 미실의 시대가 왔노라고.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처단하면서 나아가는 미실(고현정)에 맞서, 덕만(선덕여왕, 이요원)은 인재를 찾아서 대항하고 싸우고 또 이길 거라고. 그리고 결국,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신라 27대 왕, 5천년 역사 속 최초의 여왕으로 선덕여왕이 등극할거라고. 룰은 간단하다. 50부작으로 이어질 <선덕여왕>의 관전 포인트는 이처럼 간단한 진행 아래 얼마나 다채로운 플레이가 쏟아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전반전 후반전 화장실도 못 가고 꼼짝없이 지켜봐야 하는.

역사의 여백을 채워 넣은 경쾌한 상상력

불길한 예언 속에 살해될 운명을 지닌 아이가 극적으로 살아남고, 타국에서 온갖 진귀한 경험을 하고 결국 자신의 땅으로 귀환해 영웅이 되는 이야기. 제우스도 모세도 주몽도 일지매도, 이 고행의 여정은 ‘글로벌 히어로 오디세이 101 코스’다. 그런 덕만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어 문화적 외교적 중흥의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익숙한 결론 역시 이 코스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사다 보니 근거가 불분명하거나, 자료와 기록이 서로 엇갈리거나, 자세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자료의 혼란은 오히려 상상력의 공간을 넓혀 주었다”는 박상연 작가의 말처럼 <선덕여왕>은 역사의 샬레 위에 발아된 상상력이 뻗어가는 허구의 땅으로 과감하게 발을 옮긴다.

진평왕은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명의 딸을 얻는다. 하나는 천명(박예진)이고 다른 하나는 덕만(선덕여왕, 이요원)이다. 여기서 드라마는 엉뚱한 가정을 시작한다. 혹시 두 공주가 쌍둥이였지 않을까. 결국 ‘어출쌍생 성골남진(御出雙生 聖骨男盡, 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 즉 왕족 남자의 씨가 마른다)는 신라왕실의 저주 때문에 천명은 공주로 키워지고 덕만은 태어나자마자 궁궐 시녀의 품에 안겨 국경을 넘게 된다. 지난 2월 중국 닝샤성 은천 서부 세트장과 텅거리 사막, 감숙성 돈황 지질 공원 및 월아천 등지에서 이루어진 해외촬영은 <선덕여왕>의 광대한 스케일을 예상 할 수 있는 감칠맛 나는 에피타이저다. 특히 어린 덕만(남지현)이 미실(고현정)이 보낸 자객 칠숙(안길강)에게 쫓겨 추격전을 벌이다 양어머니인 소화(서영희)가 사막의 모래 늪 속으로 사라져가는 장면은 모래바람 속에 울려 퍼지는 장엄한 레퀴엠이다. 또한 소화를 잃고 홀로 타지에서 자라나는 덕만의 성장기는 외국어와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알려진 선덕여왕의 ‘조기교육’의 근거처럼 보인다. 신라로 돌아온 후 사내처럼 행동하는 덕만(이요원)을 남자로 알고 있는 김유신(엄태웅)이 화랑훈련을 함께 받으며 묘한 감정을 느끼는 에피소드 역시 지금의 드라마 속으로 옮겨놓는다 해도 무리 없을 ‘화랑 프린스 1호점’이다. 이후 김유신과 김춘추가 선덕여왕과 함께 손을 잡고 거대한 미실의 아성을 무너트리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아가는 과정은 “올 포 원, 원 포 올”을 외치는 <삼총사>의 경쾌한 활극을 예상케 한다.

여왕이 넘고자 했던 여인 미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덕만

1989년, <삼국사기>, <삼국유사>같은 정사의 기록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신라사회의 구체적 보고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세상의 수면 위로 떠오르자 가장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 바로 ‘미실’이었다. 대원신통(왕의 혼인상대가 되는 여자를 공급하는 계통)의 집안에서 태어나 타고난 미모와 색기로 진흥, 진지, 진평 3대 왕을 섬겼고, 뛰어난 지략과 술수로 화랑도를 쥐락펴락했으며, 결국 신라를 호령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성장하는 미실. 이 훔치고 싶은 캐릭터는 이후 김별아의 소설 <미실>로 출간되기도 했고, 동명의 연극이 올려 졌으며, 한동안 영화계의 핫 아이템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악당의 존재감과 파워가 크면 클수록 그를 무찌른 영웅을 향한 나팔소리는 더욱 크게 울리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미실(고현정)은 전투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적수다. 그러나 이 희대의 ‘악녀’는 독기를 뿜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포효하지 않는다. 꼬박꼬박 경어를 쓰고 사람을 하대하는 법이 없다. 그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면 제거할 뿐이고, 임무 수행에 실패한 자에게는 조용히 검을 빼 들고 목을 칠뿐이다. 고요한 물결 위에 모래알이 튄 것처럼, 흩뿌려지는 피에 살짝 눈을 움찔거리며…

무릇 역사극은 누설된 드라마요, 사실과 진실 사이의 엇갈린 기록이다, 박제된 결과를 향해 가는 길에 그 과정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 인가. 수많은 사료 속에 아우성치는 목소리들 중 누구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줄 것 인가. “미실이 꿈꾼 건 겨우 황후였고, 덕만이 이룩한 건 결국 왕이었다”라는 결론은 <선덕여왕>의 방향성을 가장 빠르게 짐작 할 수 있는 단초다. 신라금관을 차지하기 위해 패를 나눈 두 여자의 악다구니 이전투구가 아니라, 1300년 전 그 어떤 사내들보다 치열히 자신의 삶을 살아냈던 두 여인의 역사를, <선덕여왕>은 어떻게 그려내게 될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인간 선덕여왕. 누구도 잘 몰랐지만 서슬 퍼런 존재감으로 여전히 눈을 감지 않고 있던 미실. 그녀들이 지금 천 년의 고분을 뚫고 21세기의 안방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고 있다.

사진제공_ MBC

글. 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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