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재미있는 시트콤과 재미없는 시트콤이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그 둘을 나누어야 할 때 가장 간단하고 정확도가 높은 기준은 김병욱의 시트콤이냐 아니냐다. 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시트콤이 나타났다 소리 없이 사라졌지만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귀엽거나 혹은 미치거나>, <거침없이 하이킥> 등 김병욱 감독의 작품들은 거의 예외 없는 히트를 기록했고 수년이 지난 뒤에도 끊임없이 회자되며 시청자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미달이, 영규, 영삼이라는 캐릭터들의 이름을 친척이나 친구처럼 쉽게 부르고 전 세대로부터 존경받는 노배우였던 이순재는 MBC <거침없이 하이킥>에 출연한 뒤 칠순이 넘어 ‘야동순재’라는 코믹한 별명을 얻었으며 갓 스물의 신인이었던 정일우는 ‘윤호’ 역을 만나 일약 청춘스타로 발돋움했다. 이 모든 것은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그러나 정작 시트콤보다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비극에 끌린다는 김병욱 감독은 앞에 나서거나 남을 웃기는 타입이 아니다. 재미있는 시트콤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웃기는 힘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에 대한 그의 대답 역시 지극히 차분하고 진지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 같은 걸 미리 예측하는 버릇이 있는데, 좋은 드라마의 특징은 거의 예측에서 벗어난다는 거예요. MBC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하이든(쥬니)이 김갑용(이순재) 선생한테 어려운 집안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학비 좀 보태 달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 장면에선 누구나 그 애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사실이에요. 그런 식으로 대사 뿐 아니라 서사까지 예측에서 어긋나게 하려면 일상에 대한 조금 더 깊은 관찰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나쁜 드라마는, 특히 조연들이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 박물관에서 똑같은 자세로 방아 찧는 인형처럼 박제된 캐릭터일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주의하는 건, 아무리 잠깐 나오는 캐릭터라도 그 사람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코미디이기 때문에 즉물적으로 웃기게 될 때도 물론 있지만 어느 순간 깊은 얘기를 해야 할 때는 그 사람의 비중이 작든 크든 완성된 정신세계가 필요하거든요”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진짜 코미디는 웃음에 대한 가장 진지한 접근으로부터 나온다는 가설에 새삼스레 한 표를 던지게 된다. 그래서 코미디보다는 멜로드라마, 그 중에서도 비극에 끌린다는 김병욱 감독이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작품들 역시 예상과는 다르지만 흥미롭다.
美 <프렌즈>(Friends) NBC
1994~2004년
“2000년대 들어 헐리웃 자본이 투입되면서 미국 드라마도 블록버스터 급 시리즈가 많아졌지만 <프렌즈>는 그 전 가난하고 돈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스튜디오물의 전형 같은 시리즈에요. 항상 집과 커피숍만 오가고, 어디 놀러만 가면 비와서 밖에 못 나가고 (웃음) 공항 신 같은 걸 봐도 규모가 형편없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조잡한 스튜디오 물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순풍 산부인과>에 대해 갖는 향수가 그런 걸 수도 있겠죠. 그리고 내 나이가 예순이 되고 정말 할 일이 없을 때 나에게 남은 게 뭘까 생각해 보면, 그 땐 <프렌즈>를 다시 보는 낙이 있을 것 같아요. 이건 TV 속의 세계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또 다른 세계인데 그 이유는 <프렌즈>야 말로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KBS <푸른 안개>
2001년, 극본 이금림, 연출 표민수
“부인의 집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성공한 중년 남자 성재(이경영)가 스포츠 센터 댄스 강사 신우(이요원)와 사랑에 빠지는, 말하자면 ‘불륜’ 드라마에요. 처음에는 제목의 ‘안개’가 사랑에 눈이 멀고 바람기로 몽롱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 성재가 말하길,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삶 자체가 안개 같은 거였는데 신우와의 사랑을 통해 그게 걷힌 것 같다고 해요. 사실 윤리적인 잣대를 빼고 생각하면 이들의 사랑 역시 일종의 자아 찾기 같은 거예요.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소유하는 걸 넘어 영혼까지 소유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인데 결혼이라는 제도가 그걸 요구하니까 사람들은 일단 받아들이지만 평생 그 약속을 지키는 데는 무리가 따르거든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개인이 자아를 찾으려는 욕망이 제도와 격렬하게 부딪힐 때 과연 각자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였던 것 같아요”
SBS <발리에서 생긴 일>
2004년, 극본 이선미 김기호, 연출 최문석
“사랑으로 인한 집착이 갈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준 작품이에요. 죽음까지 몰고 가는 집착의 힘을 드라마에서 그렇게 잘 표현했다는 게 놀라웠고, 재벌인데 무능한 남자인 재민(조인성)이나 돈 때문에 자존심도 버리는 가난한 여자 수정(하지원) 같은 캐릭터들을 그리는 방식이 남달라서 좋았어요. 극 중에서 재민이 아파트를 주니까 수정이 기뻐하며 들어가 사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드라마 여주인공이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사실 사람은 물질에 굉장히 약한 존재거든요. 저 같은 남자일수록 신데렐라 드라마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큰데 <발리에서 생긴 일>은 바로 그런 설정들을 이용해서 전복적인 이야기를 보여줬고, 심지어 시청률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중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가장 격변기였던 시절의 얘기를 하고 싶어요.”
김병욱 감독은 요즘 올 하반기 MBC에서 방영될 일일 시트콤을 준비하고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 시즌 2>를 만들 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가 지금 진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80년대를 배경으로 그 때를 살았던 평범한 가족들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의 가장 격변기였던 시절의 얘기를 하고 싶어요. 80년대는 칼라 TV와 좌변기가 처음 보급된,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문명이 막 등장한 때거든요. 그래서 겉으로는 지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국기하강식과 통행금지가 있었고 경찰이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백골단과 삼청교육대라는 말이 있었던, 폭력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이기도 해요. 식모살이를 하게 된 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본 그 때의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요즘 같은 시기에 80년대를 그린다는 것은 여러모로 만만해 보이지 않지만 김병욱 감독은 “설정이 무거워 보여서 그렇지 이것도 그냥, 코미디에요”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냥 코미디’라는 무심한 한 마디에 방심하고 있다가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웃음의 하이킥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에게 미리 부탁하고 싶다. 언젠가 우리가 나이 들고 할 일이 없어지더라도 <순풍 산부인과>와 <똑바로 살아라>와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는 낙이 남아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리스트에 많은 작품들을 더해 주기를.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그러나 정작 시트콤보다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비극에 끌린다는 김병욱 감독은 앞에 나서거나 남을 웃기는 타입이 아니다. 재미있는 시트콤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웃기는 힘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에 대한 그의 대답 역시 지극히 차분하고 진지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 같은 걸 미리 예측하는 버릇이 있는데, 좋은 드라마의 특징은 거의 예측에서 벗어난다는 거예요. MBC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하이든(쥬니)이 김갑용(이순재) 선생한테 어려운 집안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학비 좀 보태 달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 장면에선 누구나 그 애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사실이에요. 그런 식으로 대사 뿐 아니라 서사까지 예측에서 어긋나게 하려면 일상에 대한 조금 더 깊은 관찰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나쁜 드라마는, 특히 조연들이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 박물관에서 똑같은 자세로 방아 찧는 인형처럼 박제된 캐릭터일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주의하는 건, 아무리 잠깐 나오는 캐릭터라도 그 사람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코미디이기 때문에 즉물적으로 웃기게 될 때도 물론 있지만 어느 순간 깊은 얘기를 해야 할 때는 그 사람의 비중이 작든 크든 완성된 정신세계가 필요하거든요”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진짜 코미디는 웃음에 대한 가장 진지한 접근으로부터 나온다는 가설에 새삼스레 한 표를 던지게 된다. 그래서 코미디보다는 멜로드라마, 그 중에서도 비극에 끌린다는 김병욱 감독이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작품들 역시 예상과는 다르지만 흥미롭다.
美 <프렌즈>(Friends) NBC
1994~2004년
“2000년대 들어 헐리웃 자본이 투입되면서 미국 드라마도 블록버스터 급 시리즈가 많아졌지만 <프렌즈>는 그 전 가난하고 돈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스튜디오물의 전형 같은 시리즈에요. 항상 집과 커피숍만 오가고, 어디 놀러만 가면 비와서 밖에 못 나가고 (웃음) 공항 신 같은 걸 봐도 규모가 형편없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조잡한 스튜디오 물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순풍 산부인과>에 대해 갖는 향수가 그런 걸 수도 있겠죠. 그리고 내 나이가 예순이 되고 정말 할 일이 없을 때 나에게 남은 게 뭘까 생각해 보면, 그 땐 <프렌즈>를 다시 보는 낙이 있을 것 같아요. 이건 TV 속의 세계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또 다른 세계인데 그 이유는 <프렌즈>야 말로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KBS <푸른 안개>
2001년, 극본 이금림, 연출 표민수
“부인의 집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성공한 중년 남자 성재(이경영)가 스포츠 센터 댄스 강사 신우(이요원)와 사랑에 빠지는, 말하자면 ‘불륜’ 드라마에요. 처음에는 제목의 ‘안개’가 사랑에 눈이 멀고 바람기로 몽롱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 성재가 말하길,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삶 자체가 안개 같은 거였는데 신우와의 사랑을 통해 그게 걷힌 것 같다고 해요. 사실 윤리적인 잣대를 빼고 생각하면 이들의 사랑 역시 일종의 자아 찾기 같은 거예요.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소유하는 걸 넘어 영혼까지 소유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인데 결혼이라는 제도가 그걸 요구하니까 사람들은 일단 받아들이지만 평생 그 약속을 지키는 데는 무리가 따르거든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개인이 자아를 찾으려는 욕망이 제도와 격렬하게 부딪힐 때 과연 각자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였던 것 같아요”
SBS <발리에서 생긴 일>
2004년, 극본 이선미 김기호, 연출 최문석
“사랑으로 인한 집착이 갈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준 작품이에요. 죽음까지 몰고 가는 집착의 힘을 드라마에서 그렇게 잘 표현했다는 게 놀라웠고, 재벌인데 무능한 남자인 재민(조인성)이나 돈 때문에 자존심도 버리는 가난한 여자 수정(하지원) 같은 캐릭터들을 그리는 방식이 남달라서 좋았어요. 극 중에서 재민이 아파트를 주니까 수정이 기뻐하며 들어가 사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드라마 여주인공이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사실 사람은 물질에 굉장히 약한 존재거든요. 저 같은 남자일수록 신데렐라 드라마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큰데 <발리에서 생긴 일>은 바로 그런 설정들을 이용해서 전복적인 이야기를 보여줬고, 심지어 시청률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중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가장 격변기였던 시절의 얘기를 하고 싶어요.”
김병욱 감독은 요즘 올 하반기 MBC에서 방영될 일일 시트콤을 준비하고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 시즌 2>를 만들 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가 지금 진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80년대를 배경으로 그 때를 살았던 평범한 가족들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의 가장 격변기였던 시절의 얘기를 하고 싶어요. 80년대는 칼라 TV와 좌변기가 처음 보급된,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문명이 막 등장한 때거든요. 그래서 겉으로는 지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국기하강식과 통행금지가 있었고 경찰이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백골단과 삼청교육대라는 말이 있었던, 폭력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이기도 해요. 식모살이를 하게 된 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본 그 때의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요즘 같은 시기에 80년대를 그린다는 것은 여러모로 만만해 보이지 않지만 김병욱 감독은 “설정이 무거워 보여서 그렇지 이것도 그냥, 코미디에요”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냥 코미디’라는 무심한 한 마디에 방심하고 있다가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웃음의 하이킥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에게 미리 부탁하고 싶다. 언젠가 우리가 나이 들고 할 일이 없어지더라도 <순풍 산부인과>와 <똑바로 살아라>와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는 낙이 남아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리스트에 많은 작품들을 더해 주기를.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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