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는 어둡다. 인적조차 없다. 남자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고, 남자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분노가 이글거린다. 사내의 어금니 사이에서 잘 씹어 만든 단어가 하나하나 예리하게 허공으로 내던져진다. “기니까, 너도 소중한 걸 한번 잃어 보라.” 최치수가 등장하는 순간 SBS <카인과 아벨>의 긴장은 단단히 조여진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해 보이는 그의 존재는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고, 시청자들을 숨죽이게 한다. 인물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각인되는 깊이는 결코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만큼 최치수의 존재는 강렬하고, 그를 연기하는 배우 백승현은 능란하다.

“내일 모레면 데뷔 10년차에요. 오래 했죠”

그러나 어쩌면,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그에게 칭찬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일 모레면 데뷔 10년차에요. 오래 했죠”라고 대답하는 그는 조금 늦은 나이에 97학번으로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 잘나가던 선배들이 학교 밖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모습에 조바심이 나 온갖 오디션에 도전하던 그는 2000년 SBS 공채 탤런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늘 궁금했다. “돋보이는 외모도 아니고, 왜소하고, 특별한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감독들한테 많이 물어 봤어요. 날 왜 뽑았냐. 그러면 ‘난 널 뽑은 적 없다.’ 그러거나 ‘글쎄, 나도 니가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 그런 대답만 돌아와요.” 그래서 그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평범함이야말로 그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삼십대 은행원에서 SBS <화려한 시절>의 까불이 고등학생으로 훌쩍 건너뛰면서도 그는 들어오는 배역은 모두 소화하겠노라 다짐했다. “좋게 말하면 폭 넓은 배우지만, 사실 뚜렷한 뭐가 없었던 거죠. 하하하.” 웃는 얼굴이 선하다. 살짝 처진 눈가의 주름에는 “개대가리!”라고 악을 쓰는 악당의 그늘이라고는 없다.

선한 얼굴 뒤에 숨겨진 뜨거운 질료

딱 그 표정처럼, 그의 일상은 평온하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그러다 지치면 담배를 한 대 핀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는다. 지루하면 영화를 본다. 그마저도 지루해지면 집 앞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한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워 하지만, 그 모든 일과는 그에게 준비의 과정이다. “정말 책을 엄청나게 좋아 한다기보다는, 좋은 배우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서 뭘 채워 넣으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일부러 운동을 좀 하려고 해요. 제가 워낙 몸치라서 액션 신에 영 자신이 없거든요.” 선량하고 소탈한 목소리지만, 그의 말 꼬리에는 욕심이 묻어난다. 다만, 그가 탐하는 것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다. “꾸준히 오-래 가는 게 목표에요. 그리고 변희봉 선생님이나 백윤식, 이순재 선생님처럼 그냥 입을 열고, 말을 하는데 그게 살아 있는 문장이 되는 그런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요한 일상을 차분히 살고 있는 사내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 사내가 사막을 넘고, 제 목을 찌르고, 다른 남자를 죽이려 하는 광경의 반전은 <지킬과 하이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백승현은 냉정해질지언정 좀처럼 흥분으로 들뜨는 법이 없다. “작년에는 일이 없어서 영화를 한 280편 봤어요. 책은 일주일에 한권 정도 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일 년에 50권 보기가 힘들거든요.” 체에 놓고 거른 듯 착한 얼굴만 가진 그가 슴슴하다고 생각할 무렵, 엉뚱한 곳에서 그의 하이드가 고개를 든다. “야구요? 당연히 봤죠. 제가 롯데 팬이거든요. 강민호 밀리터리 한정판 유니폼 입고 잠실에 가서 응원도 합니다. 노래요? 롯데의 강민호-” 옥타브를 타고 오르는 그의 목소리가 주변의 공기를 금세 이완시켜 버린다. 가지런한 온유함 속에 숨어있는 뜨거운 마음. 그가 변신을 할 때 꺼내 쓰는 질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질료를 잃지 않는 한, 이제 그의 평범한 얼굴을 화면 속에서 찾아내지 못할 사람은 없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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