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연호(年號)로 맹박(盲撲) 이년(二年). 민초(民草)들은 그냥 붙여서 맹박이년, 우스개로 맹박이놈이라 부르던 시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쥐떼가 논과 밭부터 곳간까지 가리지 않고 민가를 침범하는 기현상(奇現象) 때문에 민심은 흉흉해졌다. 민심과 별개일 수 없는 강호(江湖)에도 불안감이 감돈 건 당연한 일. 훗날 오대여협(五大女俠)이라 기록될 다섯 명의 여자 고수들이 강호의 균형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여기저기 난립하는 군웅(軍雄) 때문에 강호의 분란은 끊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불안한 평화도 잠시. 쥐떼의 약탈이 끝나기 무섭게 전설로만 내려오던 태양진경(太陽眞經)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가 떠돌며 무림(武林)의 분위기는 급변한다. 태양진경! 동이족(東夷族)의 수장(首長)으로서 강궁(强弓) 하나로 중원을 평정했던 여걸(女傑), 천추태후(千秋太后)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희대의 무공비급(武功秘?)이자 오할(五割)만 익혀도 강호 최강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의 무공이 아니던가! 서로의 실력차가 일일지장(一日之長)에 지나지 않는 다섯 고수가 태양진경을 통해 강호의 절대자가 되길 원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 바야흐로 혈풍(血風)이 몰아치는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강호에 도래한 것이다.신화파(神話波) 수장(首長) 강희수
태어날 때부터 승자(勝者)였고 이기는 법만 배우며 자랐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강호 오대문파(五大門派) 중 가장 많은 수하를 거느린 신화파(神話波) 장문(掌門)의 아내가 되었고, 잘못된 운공(運功)으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남편 대신 신화파의 수장(首長)이 된다. 덕분에 가문의 모든 절기(絶技)와 신화파 제자들의 충성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 시대의 여걸인 이유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화파의 세(勢)를 불려나가는 욕망의 화신이기 때문일 터. 내공증진(內功增進)에 도움이 된다면 오랑캐의 무공조차 기쁘게 흡수한다는 신화파의 비급 애매내이(愛買來夷) 신공(神功)을 역대 수장 중 가장 자유자재로 쓸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선 그 살상력 때문에 강호에서 금기시하는 화포(火砲)인 애읍후포(哀邑後砲)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방해가 되는 것들은 초모(草茅), 즉 잔디처럼 짓밟으며 신화파의 세력을 무림 전체로 확장하던 그녀가 태양진경의 등장에 자신이 그 주인이 되리라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하지만 세상 모든 걸 배웠으되 지는 법만을 배우지 못한 그녀는 다른 절정고수들과의 일합(一合)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강호 전체를 피로 물들일 계략을 세운다.
제이(第二) 복수혈검(復讐血劍) 구은재
마음에 오직 복수라는 한 단어만 새긴 채 강호를 유랑하는 좌도우검(左刀右劍)의 고수. 어릴 적 뛰어난 무공 잠재력을 가졌음에도 출신 때문에 강호와는 거리가 먼 촌 아낙으로 살았다. 그녀의 재능을 시기한 죽마고우(竹馬故友) 애리니언이 천지회(天地會)의 지질교빈(脂侄咬貧)과 결탁해 그녀에게 불의의 일격을 날리기 전까진. 임독이맥(任督二脈)이 막혀 빈사(瀕死) 상태로 강을 따라 떠내려 오던 그녀는 기연(奇緣)으로 전설의 고수 애리본좌를 만나고, 애리본좌가 그녀의 임독이맥을 뚫어주는 과정에서 무한한 내력을 얻는다. 복수할 힘을 달라고 울부짖는 그녀에게 애리본좌가 전수한 건 노래 두 수, 할거예요(割居禮謠)와 해벌계요(海閥計謠). 워낙에 총명해 두 노래에 담긴 검결과 도법을 이해해 당대 십인 안에 들 고수로 재탄생한 그녀는 휘두르는 것만으로 네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검(劍) 살사(殺四)와 하늘의 버팀목이라 불리는 도(刀) 탱고(撑高)를 쥔 채 분한 기세를 폭발시켜 주위를 허허롭게 하는 절세무공 세분폭허(勢忿爆虛)를 쓴다. 평소에는 은혜로운 마음을 낮은 곳에 비춘다하여 군은임(君恩臨)이란 별호로 불리지만, 천지회와 애리니언을 상대할 땐 20년 전 강호에 피고름을 뿌렸던 복수혈검(復讐血劍) 아리영과 닮았다 하여 제이(第二) 복수혈검이라 불린다.
유탕소저(油?小姐) 애리니언
본 성명은 신애리다. 강호의 태산북두(泰山北斗) 애리본좌와 감히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 평소의 언행 습관을 따 ‘진흙탕 같은 말’이란 뜻의 니언(泥言)을 이름 뒤에 붙여 애리니언이라 불린다. 서역(西域) 너머의 나라 불란서(佛蘭西)에서 진기한 무공인 매익후업(梅翼侯業)을 익혀 바람에 날리는 매화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강호에서 명성을 쌓았고, 문하생마다 각기 다른 재주와 무공을 지닌 문파인 유학파(遊學波)의 요직에 앉는다. 그런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동문수학(同門受學) 했던 시골 아낙 구은재를 해하려 했던 건 무공 잠재력을 시기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강호를 떠나 순리대로 사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자신도 모르게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절정고수가 되어 돌아온 구은재와의 대결에서 세 초식(招式)만에 극심한 내상(內傷)을 입으며 강호에서의 입지가 단숨에 줄어들자 자신이 저지른 악행(惡行)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구은재를 꺾을 궁리만 한다. 마음의 격렬한 분노를 화염으로 화하여 뿜어내는 화야신공(火也神功)을 익히고서도 구은재를 꺾을 수 없자 태양진경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갖게 된다.
빙옥여제(氷玉女帝) 한명인
강호 오대문파 중 하나인 명진회(明進會) 장문의 딸로 태어났지만 그녀의 인생은 신화파 강희수와는 전혀 달랐다. 허울뿐인 명망(名望)만을 남긴 채 문파의 세력은 그믐달처럼 기울었고, 모든 명예와 의무 따위 버린 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강호를 떠나 살려 했지만 이빨만 남은 육식동물 파파라치(跛跛羅齒)의 공격에 정인(情人)을 잃었다. 그 때부터였으리라, 그녀의 마음이 얼음처럼 차가워진 것은. 이후 세상에 복수하듯 이를 악물며 무공을 연마하고 명진회의 세력을 키워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되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다. 그래서 강호인들은 그녀를 빙옥여제(氷玉女帝)라 부른다. 아홉 개 손톱에 검기를 모아 상대의 목을 베어 정벌하는 구조조정(九爪徂征)과 칼끝을 타고 다니는 경공술(輕功術)인 인사이동(刃徙移動)을 구사하는 절세고수이자 차가운 머리로 정세를 파악하는 지략가인 그녀지만 현재의 남편과 초미일관(初美一貫) 은혜정이 오랜 시간 은밀히 정을 통한 것을 알고 분노하며 은혜정을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태양진경을 획득하려 한다. 세상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마음 속 외로움을 채우던 그녀이기에 자신의 소유물을 건드린다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초미일관(初美一貫) 은혜정
만약 아름다움만으로 따진다면 강호의 제일인(第一人)은 애리본좌가 아닌 그녀일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나 절세미인(絶世美人)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미색(美色)의 소유자인 그녀는 노래와 춤, 연기를 보여주는 예인(藝人)이지만 무공에도 능하다. 그녀의 방에는 어릴 적부터 가죽에 싸움의 기록을 적어 기념한 투로피(鬪勞皮)가 가득이나 그녀에게도 뼈아픈 첫 패배의 기억이 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사랑하는 이의 어머니 황보여사(皇甫女史)와의 비무(比武)에서. 예인 따위에겐 아들을 내줄 수 없다던 황보여사와 사랑을 건 승부를 벌였으나 지고 말았고, 때문에 정인(情人)이 명진회 장문의 사위가 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다시 한번 사랑을 걸고 싸울 일이 생기면 다시는 지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무공을 닦았고 그 일념(一念) 하나로 이젠 그의 아내인 빙옥여제 한명인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초고수가 되었다. 예인답게 노리개의 일종인 아이오패(娥利烏佩)를 무기로 달빛처럼 찬란한 빛을 뿜으며 손을 뻗는 비기(秘技) 월두수타(月斗手打)를 펼치는 그녀에게 그 싸움의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일 대 일의 정정당당한 승부는 아니었다.
온니원(溫尼元) 애리본좌
강호가 있고 나서 그녀가 있었는지 그녀가 있고 나서 강호가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절대 고수로 군림해왔다. 혹자는 그녀의 정체가 불사약을 가진 신화 속 서왕모(西王母)일 거라 말하며 실제로 그녀는 도영모(桃英母), 새벽모(塞碧母), 소희모(少喜母)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영겁의 세월을 강호와 함께했다. 제이(第二) 복수혈검(復讐血劍) 구은재를 비롯해 안아운서(安我雲西) 신도영 같은 당대 고수들의 실질적 스승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강호 제일인(第一人)조차 그녀가 강호를 무대로 움직이는 장기짝이라는 말도 과장은 아니다. 평소에는 자신만의 은신처에서 맑고 깨끗한 땅에서 자란 밤인 시청률(始淸栗)을 따먹으며 따뜻한 마음의 절대자 온니원(溫尼元)으로서 조용히 지내지만 그녀가 강호에 나오는 순간 강호의 모든 판도가 뒤바뀐다. 천추태후의 비급 태양진경조차 사방천리(四方千里)를 마(魔)의 기운으로 뒤덮을 수 있는 그녀의 엄마신공(掩魔神功)에 미치지 못하기에 그녀가 오대여협(五大女俠)처럼 태양진경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에 뛰어들 이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녀가 강호에 출두(出頭)하자 강호인 모두가 긴장하고 그녀의 행보를 지켜본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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