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가 공인하는 ‘근대적’ 지식인 이광수는 1932년, <여성의 십계명>이라는 논설을 통해 ‘처녀는 배우자 선택에, 아내는 일하는 남편을 정신적 협조를 주기에 힘쓸 것’이라는 규율을 여성들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보다 3년 전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은 이혼을 하고 전 남편에게 당당하게 위자료를 요구했다. 한국의 역사에서 근대로 분류되는 1920~30년대의 풍경은 이렇게 혼란스러웠다. 지금 봤을 때 이광수는 전근대적인 가부장주의자고, 나혜석의 행동이야 말로 훨씬 근대적이지만 그 ‘지금’을 만들기 위해 많은 근대인들은 그 안개 같은 시간 속을 나침반 없이 몸으로 부딪혔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한국근대미술걸작전 : 근대를 묻다>는 그래서 흥미롭다.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손녀>, 이중섭의 <흰 소>,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처럼 알만한 작가의 알만한 작품도 많지만 한국 근대 특유의 어지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 역시 눈길을 끈다.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전통적인 복장인 두루마기를 입고 서양에서 온 팔레트를 든 초기 서양화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언밸런스한 모습과 달리 작품 속 화가의 눈빛은 너무나 확고하다. 그는 전통과 변화의 한 가운데서 어느 곳을 바라보았기에 그런 눈빛일 수 있었을까. 화폭에 신사임당을 담듯 여성 과학도를 그린 이유태의 <탐구>도 재밌는 작품이다. 정갈한 모습의 그녀는 아마 신기한 도구인 현미경을 통해 무엇인가를 ‘탐구’할 것이다. 화가는 어떤 의경의 심정으로 그 모습을 그렸을까. 세계일주를 하며 이국의 무희를 그린 나혜석의 <무희>에서처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매혹과 떨림을 느끼지 않았을까.

<오빠의 탄생>이경훈│2003년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식민지 시기는 풍속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자칭 지식인이라 칭하는 문필가들에게도 마찬가지. 이광수부터 이상까지 근대문학을 이끈 사람들의 작품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풍속을 담는 동시에 스스로 풍속 자체가 되었다. <오빠의 탄생>은 그 모습을 연구한 당최 재미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문학비평집’이다. 하지만 오빠라는 존재의 탄생을 통해 한국 근대문학에 담긴 당시의 정서를 찾아가는 과정은 제법 흥미롭다. 그 오빠들에게 근대란 어떤 의미였을 것인가.

<원스 어폰 어 타임>
감독 정용기│2008년

이 영화는 코미디다. 그것도 다분히 현대적인 감각의 오락물이다. 식민지 시절이라는 설정은 그야말로 시대적 설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춘자가 노래하는 클럽과 경성의 전반적으로 유혹적인 분위기인 건 주목할 만하다. 무엇이 유혹적인 건 위태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담는 풍경에는 의외로 근대 특유의 떨림과 매혹의 정서가 담겨있다. 특히 주인공 봉구처럼 지식인과 놈팽이 사이에서 자의식을 뽐내는 당시의 모던보이는 그 자체로 근대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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