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EBS를 틀었더니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섬뜩하리만큼 아름다워요. 주제가인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가 흐를 때 해변을 걷던 연인의 뒤에서 덮칠 듯 넘실대던 파도도, “나를 위해 <미스티>를 틀어줘요”라고 속삭이던 그 여자의 전화도, 사실 엄청난 긴장을 품고 있는 장면들임에도 불구하고 볼 때 마다 감미롭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40년 전 클린트 이스트우드 라니. 마치 비고 모텐슨과 발 킬머, 주드 로를 한데 섞어 놓은 듯 한 이 튼튼한 미국의 종마는 ‘젊음’이란 단어와 동의어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젊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보다는 나이 들어가는 그가 좋아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스페이스 카우보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예전만큼 젊고 예민하지 않지만, 노인이라는 수식어로 가둘 수 없는, 궁극의 섹시함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아니 현명함과 허무가 5:5 로 섞이고, 멋진 주름이 보너스로 깃든 그 눈매를 보고 있으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섹시해지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죠.

지난 연말 이런저런 방송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남자’는 G-드래곤도 송승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멋진 턱시도 차림에 580년 변함없는 그 찡- 하고 박히는 듯 한 목소리로 시상대에 올라 소감을 말하던 배철수였습니다. ‘미노년 배철수’라는 관중석 피켓을 비춘 후 카메라에 잡힌 그의 머리엔 어느덧 하얗게 서리가 내렸고, 예나 지금이나 동안도 아니지만, 배철수는 여전히 씩씩한 청년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어제 밤 KBS <콘서트 7080>은 그런 배철수와 최백호가 나란히 서있는 풍경을 우리에게 선사했습니다. “올해 60세가 되었다”는 최백호는 여느 흘러간 가수들이 자주 선보이는 ‘히트곡 한 박자 당겨 부르기 신공’ 따위를 발휘하지 않고도, 도라지 위스키 한잔이면 세상 어떤 여심도 흔들 것 같은 목소리로 낭만에 대하여 노래하고, 영일만 친구를 힘차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MBC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한 1934년생, 일흔 여섯의 이순재가 “나이를 먹는다고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고 이야기 하는 순간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선생님’ 이 아니라 ‘남자’ 이순재였습니다. 90년대 코미디언 최양락이 2009년의 예능계로 복귀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여전히 ‘네로 25시’와 ‘도시의 사냥꾼’에서 보여 준 철딱서니 없이 사랑스러운 태도로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숙이 권위로, 나이 들어감이 무게잡음으로 오해되는 세상. 희끗희끗한 반백의, 화끈한 백발의 청년들이 더 많이 튀어나와, 우리를 유혹해 주기를, 변함없이 까불어 주기를, 체통 따위 개나 줘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주 21일은 또 한 명의 로맨스그레이, 황인뢰 감독이 MBC <돌아온 일지매>로 귀환하는군요.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마는,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 나가주세요. 여어어어-영 맨,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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