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루아(Terroir)는 와인 만들어지는 모든 환경, 즉 포도가 자라는 토양과 기후조건, 자연조건 그리고 만드는 사람의 정성까지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당연히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실하다면 좋은 와인은 태어날 수 없다. 이 설명은 그대로 드라마에도 대입된다. 하나의 드라마는 대본이 인상적이거나 배우들의 연기만 뛰어나다고 해서 작품이 될 수 없다. 잘 짜인 이야기, 설득력 있는 연기, 감각 있는 연출 등 수많은 스태프들의 노력이 높은 수준에서 만났을 때 가능하다. SBS <떼루아>는 와인과 사랑, 꿈이 등장한다. 사람들의 관계는 와인을 매개로 만들어지고, 그들의 꿈 또한 와인 향이 짙게 풍긴다. 그러나 <떼루아>는 입 안에 그윽한 와인의 풍미를 남기는 대신 시청자들의 입맛을 쓰게 한다. 이 드라마가 부쇼네(코르크 냄새가 밴 상한 와인의 총칭)가 되지 않기엔 이미 늦은 것일까. TV평론가 조지영, <10 아시아> 강명석 기자가 시음한 <떼루아>의 테이스팅 노트를 공개한다. /편집자주

모든 드라마는 갈등을 먹고 자란다. 고조되는 갈등은 파국을 향해 혹은 해결을 향해 달리고, 갈등의 과정에서 인물은 캐릭터를 발전시키거나 변화를 꾀한다. 그러나 <떼루아>의 인물들에게 갈등이란 가혹한 덫 같다. 이 덫을 치우려고 하면 저 덫이 덜커덩거린다. 장애물이 되다가도 디딤돌이 되어야 할 갈등이 동시 다발로 쏟아져 나왔다. 이 갈등에는 위 아래가 없다. 강태민(김주혁)과 양대표(송승환)는 와인 사업을 가운데 둔 적대관계다. 태민에게는 1945년산 ‘샤토 무똥 마이어’를 죽기 전에 꼭 마시고 싶어하다 그만 눈을 감아버린 애틋한 삼촌 정태(정호빈)가 있었고, 삼촌이 죽자 와인 레스토랑 ‘떼루아’를 열었으나 양대표의 이런 저런 방해가 계속되어 왔다. 태민의 애인 지선(유선)은 태민 조부 강회장(박병호)에게 태민과의 결별을 종용 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이박(기태영)은 태민 부모의 사망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조이박이 사랑을 느끼는 우주(한혜진)는, 원래 전통주집 ‘남초’ 에 버려졌던 업동이 출신으로 술에 대한 절대 미각과 후각을 자랑한다. 우주는 태민을 사랑하고 있고, 그런 우주에게 지선은 묘한 적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떼루아>, 마리아주의 부재

이 우선 순위 없는 갈등의 난립 속에 와인 향기는 위태롭게 휘날린다. 밑그림엔 출생의 비밀(우주)과 부모의 죽음(태민)이 버티고 있고, 거기 삼각에 사각사랑이 거미줄을 드리운다. 와인의 존재감은 그래서 오직 ‘대결 구도’에서 살아난다. ‘샤토 무똥 마이어’ 는 태민과 양대표의 결별을 불러왔고, 지선-태민-우주간 본격 삼각구도를 예고하던 와인은 ‘라부레’였으며, 곧 명성황후가 소장했다는 와인 ‘샤토 마고트’를 둘러싸고도 태민-송승환의 ‘경합’이 예고된 바 있다.

어떤 음식의 맛과 향취를 효율적으로 보여주되, 인물간 대립 관계 및 철학의 대척점까지 한꺼번에 아울러 보여주는 장치로, ‘경합’ 만한 게 없다는 것은 MBC <대장금>이후 SBS <식객>까지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아닌 전통이다. 천재지만 정직하며 자본과 리소스가 부족한 주인공과 수재이며 승부욕이 강하고 자본력이 확실한 반동 인물의 대결이란 늘 그 결말이 예측되어도 외면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왕권이거나 상속이어도 마찬가지다. 늘상 경합구도라는 것은 시청률로 가는 지름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이 너무 익숙한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경합’ 장치뿐만 아니라 <떼루아>의 난마 같은 갈등구조와 해결방식이 모두 낯익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드라마의 조화, 즉 레스토랑 컨설턴트 다카키(다카키 리나) 식으로 말하면 ‘마리아주(음식과 와인의 좋은 궁합)’를 해친다.

샤토 무똥 마이어가 될 것인가, 발사믹 식초가 될 것인가

명성왕후의 와인을 놓고 태민과 양대표는 다시 <식객>의 김래원-권오중처럼 승부를 앞두고 있고, 틈틈히 혼자서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조이박은 SBS <파리의 연인>의 이동건처럼 애정과 의리 사이에서도 고민한다. 갑자기 나타난 명랑한 여자에게 오랜 연인을 뺏기는 지선도, 그 비슷한 운명을 거쳐갔던 SBS <연인>의 김규리처럼, 나름대로 반격을 준비할 것이다. 태민은 부모의 죽음에 대해, 우주는 아버지의 정체에 대해 지연된 비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강회장의 의식 회복은 물론, 스토리 전개의 캐스팅보트가 될 것이다.

이렇게 메인 플롯이 불분명한 채 한사코 연장되거나 꼬이기만 하는 익숙한 갈등 속에서, <떼루아>는 코르크가 열리고 한참 지나야 그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깐깐한 와인 같은 드라마가 될 것인가? 우주의 테이스팅 노트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고 나니 기분이 좋아지는’ 샤토 무똥 마이어 같은 드라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것저것 섞어 만든 가짜 와인’ 같은 드라마가 될 것인가? 우주가 읊조렸듯, 그 어떤 명품 와인도 코르크가 열리고 오랜 시간이 경과되면 그냥, 식초가 되고 만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떼루아>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글 조지영

SBS <떼루아>의 장르는 ‘민폐’다. 강태민(김주혁)은 어린 시절 가장 가까운 동생 조이박(기태영)이 그의 집에 불을 질러 부모님을 죽게 했고, 할아버지는 자신과 연인 안지선(유선)을 억지로 헤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1억 원짜리 와인’을 우연히 얻은 이우주(한혜진)는 그것을 마셔버렸고, 강태민이 ‘떼루아’ 레스토랑을 차리기 전 다니던 와인 회사의 오너 양승걸(송승환)은 ‘떼루아’ 앞에 레스토랑을 차렸으며, 강태민을 시기하던 양승걸의 부하직원은 ‘떼루아’의 와인셀러를 부셔버린다. 이우주의 말대로 강태민이 ‘우젤재’(우주에서 제일 재수 없는 인간)가 된 건 당연하다. 성격이라도 나빠야 이 집단 이지메를 버틸 수 있지 않겠는가. <떼루아>가 끊임없이 강태민을 피해자로 모는 것은 이 드라마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지 않으면 드라마를 끌고 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문직 드라마? 게으른 트렌디 드라마

안지선과 강태민의 결별 이유는 조이박의 폭로에 의해 밝혀지고, 안지선과 강태민의 관계가 벌어지는 건 안지선이 ‘우연히’ 몇 번씩 강태민과 이우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떼루아>의 사건들은 대부분 사건의 시작과 해결만 있을 뿐 과정이 생략 돼 있고, 이 때문에 매번 시간이 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이 필요하다. 공육공(류현경)이 강태민의 비싼 와인을 깨뜨린 뒤 이우주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 이우주를 곤경에 빠뜨리고, 요리사 김준수(유현수)가 갑자기 조폭 출신이었음이 밝혀지는 식의 전개는 ‘시간 때우기’의 대표적인 예다. 그렇게 개연성 없는 사건을 늘어 놓지라도 않으면, <떼루아>는 한 회 분량을 채우는 것 마저 벅차 보인다. 멜로드라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조이박이 여전히 이우주와 어떤 극적인 에피소드도 없이 이우주와 강태민이 연애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 <떼루아>다.

이는 와인이 중심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강태민이 이우주에게 칵테일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조차 아무 설명 없이 이미지컷으로만 넘어가는 이 드라마의 무성의함 때문일 것이다. 물론 KBS <너는 내 운명>이 잘 보여주듯, 개연성 없는 사건으로도 작품의 상업성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들은 최소한 캐릭터의 갈등을 끌고 가기 위해 끊임없이 극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반면 모든 중요한 갈등을 제쳐둔 채 ‘떼루아’의 쉐프(김병세)가 속을 풀겠다며 동치미 국물을 찾는 에피소드로만 5분씩 잡아먹는 이 드라마에서 그런 성의를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떼루아>는 와인 전문 드라마가 아니라 해당 분야에 대한 아무런 전문지식 없이 그저 멋있어 보이는 직업으로 주인공을 치장시킨 1990년대의 트렌디 드라마에 가깝고, 그 중에서도 가장 게으른 쪽이다. 이 드라마에 온갖 트렌디 드라마의 클리셰들이 사용되는 건 그 게으름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다.

무턱대고 섞는다고 칵테일이 아니 듯이

강태민과 가장 강한 갈등관계를 갖는 양승걸이 한동안 ‘떼루아’의 손님 노릇이나 하다 10회가 돼서야 갑자기 레스토랑을 개업하는 것이 <떼루아>다. 그나마 <떼루아>에게 희망이 있다면 뒤늦게나마 양승걸이 레스토랑을 개업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들의 경쟁을 빌미로 레스토랑에 들어오는 손님이나 명성황후가 마셨던 와인처럼 새로 등장하는 와인들은 <떼루아>에서 개연성 없이 어떤 사건이든 벌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떼루아’와 양승걸의 레스토랑 사이의 갈등구조를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강태민과 이우주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조이박과 안지선의 비중은 더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우주도 아닌 공육공이 와인병이라도 깨야 드라마가 진행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떼루아>에서 이우주는 칵테일을 만드는데 실패한다. 칵테일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술을 이것저것 섞었기 때문이다. <떼루아>도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섞어 양은 채웠지만, 맛은 지독하게 없다. 이미 맛은 포기했으니, 양이라도 꽉꽉 채워 손님들에게 주길 바란다.
글 강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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