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 공주 촌놈. no.3도 아닌 no.4. 국가대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코리안 특급. 5년간 6500만 달러를 받는 거물 투수. 부상을 달고 다니는 고액 연봉자. 연봉 60만 달러를 받는 한물 간 불펜 투수. 재기. 다시 선발 도전. 화려한 시절은 지나갔다. 비난은 잊혀졌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야구선수다.
오영세 : 박찬호의 공주 중학교 재학 시절 야구 감독. 박찬호가 인생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분 중 한 명으로, 당시 3루수로 뛰던 박찬호에게 키가 크고 어깨 힘도 좋으니 투수로 뛰어보라고 권유, 박찬호를 투수로 전향시켰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인사를 한 사람도 오영세였다. 당시 오영세는 박찬호에게 개인 훈련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박찬호는 중학교 시절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운동을 하고, 자신의 담력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스윙 연습을 할 만큼 연습벌레가 됐다. 중학교 학생이 왜 그렇게 연습에 매달렸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박찬호의 부모님이 초등학생이던 박찬호의 장래를 염려해 그가 야구 하는 것을 반대하고, 반대로 다른 학부모들이 박찬호의 집에 찾아와 야구를 할 것을 부탁할 정도로 어린 운동선수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하던 사회였다. 오영세 역시 당장의 성적보다는 선수의 가능성을 키워주기 위해 박찬호를 몇 차례 투수로 기용했다 학교와 마찰을 빚어 감독직을 사퇴했다. 그만큼 박찬호는 필사적으로 야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성민 : 전직 야구선수. 고교시절 임선동, 손경수 등과 함께 조성민은 ‘빅 3’로 통했다. 박찬호는 고교시절 이들에 비해 지명도가 밀렸다. 박찬호 스스로도 자신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뒤에야 신문에 이름이 실리기 시작했다고 했을 정도. 하지만 박찬호는 그럴수록 이 ‘빅 3’에게 강한 경쟁심을 가졌다. 그는 고교시절 이들에게 틈나는 대로 전화를 걸어 연습 여부를 확인한 뒤,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습했다. 박찬호가 조성민, 임선동 등에게 강한 경쟁 의식을 가진 건 그 스스로 ‘공주 촌놈’이라 말하는 특유의 정서가 큰 영향을 미쳤다. 초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를 하다 “유니폼이 멋있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야구를 하기 시작했던 박찬호는 서울로 경기를 하러 가서 서울 아이들의 ‘멋진 유니폼’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고, 이때부터 서울의 야구선수들을 이기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박찬호는 자신이 매스컴의 주목을 덜 받았던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이 서울이 아닌 공주 출신이었다는 점을 꼽기도 했다. 실제로 언론 매체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살았던 그를 ‘시골에서 어렵게 살다 성공한’ 선수로 묘사하기도 했다.
토미 라소다 : 전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감독. 박찬호가 스스로 ‘양아버지’라고 할 만큼 일반적인 선수와 감독 사이를 뛰어 넘는 우애를 다졌다. 토미 라소다 감독이 틈나는 대로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식사를 했을 정도. 박찬호는 토미 라소다 감독의 애정 아래 빠르게 메이저리그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미 라소다의 애정이 박찬호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과 미국 내 한인 교포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생각하던 LA 다저스 측은 박찬호의 상품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에게 다양한 배려를 했고, 여기에 토미 라소다의 애정은 박찬호의 신인 시절 같은 팀 경쟁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가 됐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 시절 그가 먹는 한국 음식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선수들과 마찰을 빚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자신이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은연중에 그에게 안 좋은 말을 했던 동료와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팀의 최고 인기 선수였던 마이크 피아자는 아시아와 남미계 선수 등이 따로 어울리면서 팀워크를 망친다는 공개 비난까지 했을 정도. 이 때문에 박찬호는 LA다저스 시절 팀 동료들이 일종의 ‘신인 신고식’으로 그의 양복을 찢어놓자 자신을 차별하는 줄 알고 엄청나게 화를 내기도 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박찬호가 미국 생활에서 얻은 교훈들은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야구하는 것은 친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미국에서는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바보 된다”같은 것들. 박찬호는 데뷔 당시부터 양아버지 같은 감독의 사랑과,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라는 극단적인 대우를 경험한 셈이다. 그가 한 때 언론 인터뷰에서 최대한 말을 아꼈던 것도 이런 경험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게리 셰필드 :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 LA 다저스 시절 일명 ‘찬호 도우미’로 유명했다. ‘찬호 도우미’는 언론이 박찬호의 등판 경기에서 활약한 선수에게 붙인 별명으로, 게리 셰필드를 시작으로 숀 그린,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 박찬호와 한 팀에서 뛴 강타자들은 모두 ‘찬호 도우미’가 됐다. 이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 후 그가 뛰는 팀이 ‘국민 야구팀’이 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준 예. 1997년에는 박찬호의 LA 다저스의 홈 경기 때마다 평균관객수가 14.4% 늘어났고, LA에는 박찬호와 관련된 상품만을 취급하는 전문 상점이 생겼다. 또한 한국에서 박찬호의 경기는 오전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시청률 15%대, 시청 점유율 70%대를 기록했다. 심지어 박찬호의 이름을 딴 빙과 제품인 ‘찬호박’이란 제품이 출시되고, LA다저스를 소재로 한 개그 프로그램도 생겼다. 그리고 2001년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된 뒤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 선수(FA)가 돼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기간 5년, 총 연봉 6500만 달러를 받는 계약을 하는 슈퍼스타가 됐다. ‘공주 촌놈’이 한국의 ‘국민투수’로 올라선 순간.
스캇 보라스 : 메이저리그의 최고, 혹은 최악의 에이전트. 선수들에게는 최고의 계약을 이끌어내지만, 그만큼 구단에는 엄청난 계약으로 타격을 입혀 악마라는 말까지 듣는다. 박찬호 역시 스캇 보라스를 통해 5년 동안 6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계약을 끌어냈다. 하지만 이 계약 이후 박찬호는 많은 것을 잃었다. FA를 앞두고 무리를 하며 얻은 허리 부상은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내내 그를 괴롭혔고, 이로 인해 특유의 강속구를 잃은 그는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내내 부진한 성적에 머문다. 미국의 텍사스 레인저스 팬들은 그에게 “사라져라”라는 말까지 했고, 언론은 그를 ‘최악의 FA선수’로 선정했다. 하지만 박찬호를 더 가슴 아프게 했던 건 한국에서의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야구에 관한 각종 통계가 소개되면서 박찬호는 그 어떤 야구 선수보다도 엄격한 기준에 의해 평가됐다. 승수와 방어율은 물론, 피홈런수와 좌/우 타자 상대 성적, 홈/원정 경기 성적 등이 모두 도마 위에 올랐고, 그의 성적은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들과 비교됐다. 그리고 그가 부진해지자 인터넷의 어떤 악플러들은 그를 ‘박먹튀’(먹튀 : 몸값에 비해 성적이 부진한 선수를 비하하는 말)라 부르며 조롱했다. 물론 야구 선수는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박찬호는 나라 단위로 ‘역적 취급’을 받아야 했다.
노모 히데오 : 일본인 야구 선수. 박찬호와 LA 다저스에서 함께 활약했다. 박찬호는 노모가 자신보다 프로 경력이 더 많은 상태에서 LA 다저스에 입단, 더 많은 계약금을 받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묘한 경쟁의식을 느꼈다고. 박찬호는 나중에 그것이 ‘민족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언론은 박찬호가 활약할 때마다 두 사람의 활약상을 비교하며 경쟁을 부추겼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는 야구선수들. 노모가 메이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일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큰 역할을 했듯, 박찬호도 메이저리그에 한국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노모는 전성기가 지난 뒤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열정을 보여줬고, 박찬호 역시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FA계약이 종료된 뒤에도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계속 선발 투수에 도전하고 있다. 그 사이 박찬호는 6500만 달러를 받던 선수에서 1년 60만 달러라는 메이저리그 최하 수준의 연봉 계약을 하기도 했고, 작년에는 재기에 성공해 올해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250만 달러를 받는다. 이미 그는 충분한 돈을 벌었고, 온갖 영광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야구를 계속한다. 한 때는 경기 결과에 따라 사진 기자의 촬영에도 민감해 하던 그가 KBS <해피선데이>의 ‘1박 2일’에서 과거사를 돌아보며 여유 있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이제 그가 해야 할 일 이 ‘공을 던지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 유니폼이 멋져 보여서 야구를 시작했고, 지기 싫어 야구를 했으며, 이국 땅에서 생존경쟁을 위해 야구를 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 오직 야구만을 위해 야구를 할 수 있다. 이제는 ‘코리안 특급’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열광이나 비아냥을 보내는 대신, 그저 그가 던지는 것을 지켜볼 때가 됐다.
이지혜 seven@10asia.co.kr
오영세 : 박찬호의 공주 중학교 재학 시절 야구 감독. 박찬호가 인생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분 중 한 명으로, 당시 3루수로 뛰던 박찬호에게 키가 크고 어깨 힘도 좋으니 투수로 뛰어보라고 권유, 박찬호를 투수로 전향시켰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인사를 한 사람도 오영세였다. 당시 오영세는 박찬호에게 개인 훈련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박찬호는 중학교 시절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운동을 하고, 자신의 담력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스윙 연습을 할 만큼 연습벌레가 됐다. 중학교 학생이 왜 그렇게 연습에 매달렸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박찬호의 부모님이 초등학생이던 박찬호의 장래를 염려해 그가 야구 하는 것을 반대하고, 반대로 다른 학부모들이 박찬호의 집에 찾아와 야구를 할 것을 부탁할 정도로 어린 운동선수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하던 사회였다. 오영세 역시 당장의 성적보다는 선수의 가능성을 키워주기 위해 박찬호를 몇 차례 투수로 기용했다 학교와 마찰을 빚어 감독직을 사퇴했다. 그만큼 박찬호는 필사적으로 야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성민 : 전직 야구선수. 고교시절 임선동, 손경수 등과 함께 조성민은 ‘빅 3’로 통했다. 박찬호는 고교시절 이들에 비해 지명도가 밀렸다. 박찬호 스스로도 자신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뒤에야 신문에 이름이 실리기 시작했다고 했을 정도. 하지만 박찬호는 그럴수록 이 ‘빅 3’에게 강한 경쟁심을 가졌다. 그는 고교시절 이들에게 틈나는 대로 전화를 걸어 연습 여부를 확인한 뒤,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습했다. 박찬호가 조성민, 임선동 등에게 강한 경쟁 의식을 가진 건 그 스스로 ‘공주 촌놈’이라 말하는 특유의 정서가 큰 영향을 미쳤다. 초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를 하다 “유니폼이 멋있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야구를 하기 시작했던 박찬호는 서울로 경기를 하러 가서 서울 아이들의 ‘멋진 유니폼’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고, 이때부터 서울의 야구선수들을 이기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박찬호는 자신이 매스컴의 주목을 덜 받았던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이 서울이 아닌 공주 출신이었다는 점을 꼽기도 했다. 실제로 언론 매체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살았던 그를 ‘시골에서 어렵게 살다 성공한’ 선수로 묘사하기도 했다.
토미 라소다 : 전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감독. 박찬호가 스스로 ‘양아버지’라고 할 만큼 일반적인 선수와 감독 사이를 뛰어 넘는 우애를 다졌다. 토미 라소다 감독이 틈나는 대로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식사를 했을 정도. 박찬호는 토미 라소다 감독의 애정 아래 빠르게 메이저리그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미 라소다의 애정이 박찬호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과 미국 내 한인 교포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생각하던 LA 다저스 측은 박찬호의 상품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에게 다양한 배려를 했고, 여기에 토미 라소다의 애정은 박찬호의 신인 시절 같은 팀 경쟁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가 됐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 시절 그가 먹는 한국 음식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선수들과 마찰을 빚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자신이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은연중에 그에게 안 좋은 말을 했던 동료와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팀의 최고 인기 선수였던 마이크 피아자는 아시아와 남미계 선수 등이 따로 어울리면서 팀워크를 망친다는 공개 비난까지 했을 정도. 이 때문에 박찬호는 LA다저스 시절 팀 동료들이 일종의 ‘신인 신고식’으로 그의 양복을 찢어놓자 자신을 차별하는 줄 알고 엄청나게 화를 내기도 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박찬호가 미국 생활에서 얻은 교훈들은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야구하는 것은 친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미국에서는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바보 된다”같은 것들. 박찬호는 데뷔 당시부터 양아버지 같은 감독의 사랑과,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라는 극단적인 대우를 경험한 셈이다. 그가 한 때 언론 인터뷰에서 최대한 말을 아꼈던 것도 이런 경험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게리 셰필드 :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 LA 다저스 시절 일명 ‘찬호 도우미’로 유명했다. ‘찬호 도우미’는 언론이 박찬호의 등판 경기에서 활약한 선수에게 붙인 별명으로, 게리 셰필드를 시작으로 숀 그린,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 박찬호와 한 팀에서 뛴 강타자들은 모두 ‘찬호 도우미’가 됐다. 이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 후 그가 뛰는 팀이 ‘국민 야구팀’이 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준 예. 1997년에는 박찬호의 LA 다저스의 홈 경기 때마다 평균관객수가 14.4% 늘어났고, LA에는 박찬호와 관련된 상품만을 취급하는 전문 상점이 생겼다. 또한 한국에서 박찬호의 경기는 오전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시청률 15%대, 시청 점유율 70%대를 기록했다. 심지어 박찬호의 이름을 딴 빙과 제품인 ‘찬호박’이란 제품이 출시되고, LA다저스를 소재로 한 개그 프로그램도 생겼다. 그리고 2001년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된 뒤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 선수(FA)가 돼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기간 5년, 총 연봉 6500만 달러를 받는 계약을 하는 슈퍼스타가 됐다. ‘공주 촌놈’이 한국의 ‘국민투수’로 올라선 순간.
스캇 보라스 : 메이저리그의 최고, 혹은 최악의 에이전트. 선수들에게는 최고의 계약을 이끌어내지만, 그만큼 구단에는 엄청난 계약으로 타격을 입혀 악마라는 말까지 듣는다. 박찬호 역시 스캇 보라스를 통해 5년 동안 6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계약을 끌어냈다. 하지만 이 계약 이후 박찬호는 많은 것을 잃었다. FA를 앞두고 무리를 하며 얻은 허리 부상은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내내 그를 괴롭혔고, 이로 인해 특유의 강속구를 잃은 그는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내내 부진한 성적에 머문다. 미국의 텍사스 레인저스 팬들은 그에게 “사라져라”라는 말까지 했고, 언론은 그를 ‘최악의 FA선수’로 선정했다. 하지만 박찬호를 더 가슴 아프게 했던 건 한국에서의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야구에 관한 각종 통계가 소개되면서 박찬호는 그 어떤 야구 선수보다도 엄격한 기준에 의해 평가됐다. 승수와 방어율은 물론, 피홈런수와 좌/우 타자 상대 성적, 홈/원정 경기 성적 등이 모두 도마 위에 올랐고, 그의 성적은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들과 비교됐다. 그리고 그가 부진해지자 인터넷의 어떤 악플러들은 그를 ‘박먹튀’(먹튀 : 몸값에 비해 성적이 부진한 선수를 비하하는 말)라 부르며 조롱했다. 물론 야구 선수는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박찬호는 나라 단위로 ‘역적 취급’을 받아야 했다.
노모 히데오 : 일본인 야구 선수. 박찬호와 LA 다저스에서 함께 활약했다. 박찬호는 노모가 자신보다 프로 경력이 더 많은 상태에서 LA 다저스에 입단, 더 많은 계약금을 받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묘한 경쟁의식을 느꼈다고. 박찬호는 나중에 그것이 ‘민족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언론은 박찬호가 활약할 때마다 두 사람의 활약상을 비교하며 경쟁을 부추겼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는 야구선수들. 노모가 메이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일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큰 역할을 했듯, 박찬호도 메이저리그에 한국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노모는 전성기가 지난 뒤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열정을 보여줬고, 박찬호 역시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FA계약이 종료된 뒤에도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계속 선발 투수에 도전하고 있다. 그 사이 박찬호는 6500만 달러를 받던 선수에서 1년 60만 달러라는 메이저리그 최하 수준의 연봉 계약을 하기도 했고, 작년에는 재기에 성공해 올해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250만 달러를 받는다. 이미 그는 충분한 돈을 벌었고, 온갖 영광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야구를 계속한다. 한 때는 경기 결과에 따라 사진 기자의 촬영에도 민감해 하던 그가 KBS <해피선데이>의 ‘1박 2일’에서 과거사를 돌아보며 여유 있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이제 그가 해야 할 일 이 ‘공을 던지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 유니폼이 멋져 보여서 야구를 시작했고, 지기 싫어 야구를 했으며, 이국 땅에서 생존경쟁을 위해 야구를 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 오직 야구만을 위해 야구를 할 수 있다. 이제는 ‘코리안 특급’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열광이나 비아냥을 보내는 대신, 그저 그가 던지는 것을 지켜볼 때가 됐다.
Who is next강명석 two@10asia.co.kr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에서 박찬호와 함께 출연한 은지원의 노래 ‘LOVE론’에 피처링을 한 이효리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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