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일이다. ‘저건 내 스타일이 아냐!’ 감히 단언했던 것조차 트렌드가 되면 좋아진다. 자꾸 보다 보니까 거부감이 줄어들기 때문인지, 군중심리에 부합하고 싶은 내 나약한 정신 때문인지, ‘난 늘 트렌디해’라고 뻐기고 싶은 나의 허영심 때문인지….
1980년대 스타일의 형광 플라스틱 귀고리가 트렌드일 땐 그나마 좀 낫다. 트렌드를 따르고 싶어하는 마음과 내 스타일을 지키려는 고집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거나 말거나 일단 사버리면 그만이다. 내 아무리 가진 게 없다 한들, 5천 원 내외의 액세서리를 사서 서랍에 고이 모셔놓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요즘처럼 모피 코트가 유행일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꾸 눈에 보이니까 ‘그럼 나도 한 번?” 하는 마음이 들기는 하는데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마르고 닳도록 입으리란 확신이 서질 않는다. 가격은 또 오죽 비싼가. 게다가 비싸면 비쌀수록 더 멋져질 수 밖에 없는 대표적인 아이템이 모피다. 근데 내 통장엔 지금 얼마가 있지? 아아, 괴롭다. 그만하자.

사모님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이탈리아 여자들이 평균적으로 자신의 첫 모피 코트를 갖는 시기는 19살 때라고 한다. 그녀들은 프랑스 여자들이 스카프를 모으고, 미국 여자들이 청바지를 모으는 것처럼 평생 모피를 수집한다고 한다. 그렇게 모피를 늘 가까이하다 보니 모피 코트, 모피 스톨, 모피 베스트 등을 멋지게 활용하는 법에 있어선 그 어느 나라 여자들도 감히 이탈리아 여자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녀들은 아르마니 수트나 발렌티노 드레스 뿐 아니라 리바이스 청바지와 갭 미니스커트에도 모피 코트를 멋스럽게 매치한다. 그런데 요즘 TV를 보고 있으면 이탈리아 여자들이고 뭐고, 세상에서 모피를 가장 사랑하고, 잘 입는 여자들은 대한민국 여자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젊은 여자도, 덜 젊은 여자도, 우아한 여자도, 까부는 여자도 요즘 TV에 나오는 멋쟁이 여자들은 죄다 모피 차림이다. 그녀들은 모피를 주로 우아하게 입지만, 이제 뉴요커들처럼 캐주얼하거나 펑키하게 입을 줄도 안다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의 윤영(배종옥)을 보자. 그녀는 모피 베스트, 모피 코트, 모피 머플러에 이르기까지 매회 ‘모피 패션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이는데 그런 그녀의 모피 쇼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여전히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여배우’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특히 이서우(김여진)와 술잔을 기울이다 촬영장으로 가기 직전에 입고 있던 하얗고 반지르르한 퍼 베스트는 푸르스름한 동틀 녘의 대기 빛깔과 어우러져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그 옷을 입은 윤영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섹시하고,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다. 모르긴 해도, 이 장면으로 인해 퍼 베스트 구입을 결심한 ‘사모님’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난 고귀한 몸이야”의 포스를 팍팍 풍기면서도 풍덩한 퍼 코트와 달리 젊어 보이게 해주는 퍼 베스트의 마력을 어느 사모님인들 마다할까.

황갈색으로 꼭 좀 부탁드려요

윤영이 30대 후반 이상의 마음을 달뜨게 한 범인이라면, 백지영은 20대 중후반의 마음을 설레게 한 장본인이다. KBS <샴페인> 보셨는지. 그녀가 입고 나온, 푸들 털을 깎아 만든 것처럼 털의 길이가 긴 모피 베스트는 모피의 느끼함을 저어하던 젊은 여성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기름기를 쫙 빼낸, 라면으로 치면 기름에 튀기지 않은 생라면 같았던 그녀의 퍼 베스트! 그런 퍼 베스트 하나만 있다면 평상시는 물론이고 차려 입고 참석해야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 앞에서도 고민할 필요가 없으리라.

모피를 즐겨 사용하는 디자이너의 패션쇼 장에서 종종 PETA(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보았다. “살인마!” “당신이 죽인 동물들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등등의 문구를 적은 헝겊 쪼가리를 들고 런웨이로 뛰어올라가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 윤영이나 백지영처럼 모피 아이템으로 멋지게 치장한 여자들을 보면 어찌나 심술이 나고 질투심이 이는지 PETA에 전화해 항의하고 싶어진다. 요즘 캠페인을 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냐고. 이쯤에서 런웨이가 아닌 브라운관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냐고…. 그들이 요즘 뭘 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고 난 요즘 기도 중이다. PETA의 활약을 기다리느니 이 편이 빠를 것 같다. 매일 밤 나의 주기도문. “신이시여, 저를 사랑하시지요? 간절히 원하는 것은 주신댔지요? 간절히 원합니다. 황갈색 밍크 코트요. 어떤 디자인인지 잘 모르시겠으면 영화 <로열 테넌바움>의 기네스 펠트로를 참고하세요!”

심정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