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그들이 사는 세상>의 스타 드라마 감독 손규호에게는 친구가 없다. 시청률 제일주의, 무한 이기주의로 무장한데다 자신의 속물근성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그는 뻔뻔하지만 당당하고 재수 없지만 솔직하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따라올 사람 없는 감각”의 소유자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개새끼”일 수밖에 없는 그에게는 친구 대신 팬이 있다. 겉으로는 욕하지만 돌아서면 왠지 끌리는, 이 매력 넘치는 ‘나쁜 남자’를 너무나 손규호답게 연기하는 배우는 엄기준이다. 지난해부터 MBC <김치 치즈 스마일>과 <라이프 특별 조사팀>으로 주목받았지만 사실 그는 그 전 10여 년을 무대에서 살았던 베테랑 뮤지컬 배우이기도 하다. 단 몇 개의 신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손규호의 캐릭터는 나직나직, 짤막하게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엄기준의 말투와 어딘가 닮아 있다.

오늘도 저녁부터 촬영이 있다던데, 어떤 신인가.
엄기준
: 규호가 술에 취해서 지오(현빈)한테 찾아가서 술 사달라고 매달리는 신이다. 왜냐면, 얘가 왕따라서. 주위에 아무도 없잖나. 해진(서효림)이 말고는.

“사실 손규호는 내 주위에 있어도 친해지기 힘들 것 같다”

손규호는 자기 입으로 ‘왕따’라고 말할 때 정말 당당하던데, (웃음)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엄기준
: 불쌍한 놈이다. 친구 하나 없고, 가족은 가족대로 관계가 안 좋고. 일만 열심히 하는데 그 방식이 너무 이기적이다 보니까 주위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지만 성공은 하고. 풍요속의 빈곤이랄까. 사실 내 주위에 있어도 친해지기 힘들 것 같다. (웃음) 그런데 어제 찍은 신 중에 규호가 지오 집에 가서 “술 사 줘. 술 더 줘!”하면서 둘이 대본 다섯 장 정도 분량을 쭉 이어가는 게 있다. 여기서 규호가 처음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말을 한다. 가족사부터 시작해서 해진이와의 관계, 동생과의 관계까지 술 마시면서 주절주절 떠든다. 그 장면을 찍으면서 참 좋았다.

<김치 치즈 스마일>이나 <라이프 특별 조사팀>에서는 굉장히 인간적이고 허점이 많은 캐릭터들을 연기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냉철하고 개인주의적인 역할이다.
엄기준
: 얄밉지 않나? (웃음) 그런데 살다 보면 손규호처럼 좀 이기적이고 싶을 때가 있다. 지오랑 규호를 비교해 봐도, 지오는 여기저기 다 챙기고 뒤치다꺼리 다 하고 오지랖이 넓은 대신 따르는 선배도 많고 후배도 많다. 물론 주위에 사람이 많은 건 좋은데 그러다보니 능력 있는 감독이면서 정 때문에 손해 보는 경우도 있고. 아니, 그래서 두 사람을 좀 믹스해서 일도 어느 정도 잘 하고, 믿을 만한 친구 몇 명만 있고 그러면 좋을 텐데 나도 그게 잘 안 된다.

규호 주위에 사람이 없다지만 극 중에서도 은근히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있다. ‘나쁜 남자’가 매력 있다고도 하는데, 규호의 매력은 뭘까.
엄기준
: 솔직히 잘 모르겠다. (웃음) 그냥, 속은 참 약한데 강한 척 하는 느낌은 있다. 얘도 분명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인데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기댈 데가 없고, 그래서 약간 챙겨주고 싶은 구석이 있는데 본인은 그걸 안 들키려고 노력하는 캐릭터. 그런데 그런 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나?

규호는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지만 시청자에게는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드러나는’ 그 미묘한 감정을 보여 줄 필요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하나.
엄기준
: 작품 초반에는 손규호가 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지금은 점점 규호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까 규호가 누굴 갈군다든지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할 때, 일부러 그 감정을 안 들키려고 더 빨리 말을 내뱉어 버리는 편이다. 무슨 말을 들었을 때 잠깐 마음이 흔들리는 걸 안 들키려고 “어 그런데, 내가 왜? 뭐!”하면서 오버랩으로 대사를 쳐 버리는 경우라던가, 그리고 뒤 돌면서 “아이 씨…”하고 찡그리는 느낌 같은 것.

규호는 악역처럼 보이지만 악역은 아니다. 왜 이 사람을 미워할 수 없을까?
엄기준
: 얘도 아픈 놈이니까. 만약 해진이를 가지고 놀았다면 정말 나쁜 놈이겠지만, 앞으로의 방영분에서 해진이와 헤어질 때도 그렇지는 않다.

“나의 20대는 24시간 편의점이었다, 쉬어 본 적이 없으니까”

TV에 출연하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지만 연기 경력은 10년이 훌쩍 넘는다. 출발이 궁금하다.
엄기준
: 처음엔 단순히 탤런트가 되고 싶었다. 어느 날 TV에서 보니까 되게 멋있는 것 같아서. 그게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그 전까지는 그냥 공부도 중간 정도, 장난치는 거 좋아하고 몰래 술도 먹고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엄기준
: 없는 살림에 부모님을 졸라 연기 학원에 다녔다. 하지만 대학은 다 떨어졌고, 졸업하면 수료증이 나오던 명지대 사회교육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3학기 다녔을 때, 1995년 국립극단 정기공연 <리처드 3세>에 객원으로 출연하면서 처음 무대에 섰고, 1996년에 뮤지컬 <올리버>에 출연해 지방공연까지 돌았다. 오페라도 한 작품 했는데, 내가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를 하지는 못하니까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종업원 역할을 했다. (웃음) 그리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바로 다시 뮤지컬을 했다.

참 용감했던 것 같다. 그 어린 나이에, 아무도 밀어주는 사람 없이 무조건 자기가 좋다는 이유로 쭉 한 길을 갈 수 있었다는 게.
엄기준
: 할 줄 아는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 무식하고 단순했던 거다. (웃음) 사실 무대 바닥에 발을 들이고 연기라는 걸 시작하고 나서는 내가 연기를 참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배우 이인철 선생님께서 “계속 연기를 할 거면 10년만 버티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게 스무 살 때다. 그리고 서른 살 때까지 무대에 섰고, 서른 한 살이 됐을 때 KBS <드라마 시티>에 출연하면서 지금의 기획사에 들어갔다.

그 10년 동안 도저히 앞이 안 보인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을 텐데.
엄기준
: 코러스, 앙상블을 하다가 주연으로 올라와서 처음 작품을 했는데 그 다음에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앙상블을 하다가, 어떻게 다시 주연이 되어서 갔는데 연습만 6개월을 했다. 중간에 다른 작품으로 나가려던 선배가 계속 하면서 내가 설 자리가 없어져서, 적금 깨고 그랬다. (웃음)

그동안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뮤지컬 <헤드윅>을 비롯해 굉장히 많은 연극, 뮤지컬 무대에 섰는데 특히 <그리스>의 대니 역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무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엄기준
: 이젠 늙어서 그렇게 못 뛴다. (웃음) 요즘 알게 된 동생들이 <그리스>를 보고 싶다고 해서 공연에 데려갔는데 프로그램에 예전 내 사진이 있는 걸 보더니 “형이 정말 저걸 했어? 어떻게 저걸 했어?”라며 안 믿더라.

그러면 그 수많은 공연들로 보낸 20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엄기준
: 24시간 편의점? (웃음) 쉬어 본 적이 없다. 링거도 맞고, 매일 비타민 챙겨먹으면서 공연했다. 작년에도 연극 <미친 키스>와 뮤지컬 <실연남녀>와 <김치치즈스마일>을 같이 하다가 쓰러질 뻔 했다.

“서른다섯 쯤에는 <지킬 앤 하이드>에 출연하고 싶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가는 이유는 뭔가.
엄기준
: 점점 더 많은 걸 배우니까. 사실 자기 연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아무리 대배우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데 작품을 하면서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내 모습을 보면 기쁘고 대견스럽다. 그래서 더 해야 한다. 쉬면 감 떨어진다. 진짜다.

시청자, 관객 입장에서는 어떤 작품을 주로 보는 편인가.
엄기준
: 액션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그려지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연기의 정석이라고 볼 수도 있어서다. 어린애부터 어른까지 다 보는 작품에서 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나 표정 연기 같은 건 거의 정석이다. 그래서 요새는 <몬스터 주식회사>나 <월 E>같은 작품을 열심히 본다. 눈물이 많은 편이라 우울해지는 걸 싫어한다. 예전에 아는 누나 집에서 술 마시다가 같이 간 친구가 우겨서 <아이 엠 샘>을 틀었는데 30분 뒤에 나도 모르게 줄줄 울면서 “안 본다 그랬잖아!”하고 소리 지른 적도 있다. (웃음)

올해 초에 말했던 소망 가운데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보겠다는 것도 있었는데 어떻게 됐나.
엄기준
: 바빠서 결국 못 갔다. 공연을 하러 외국에 간 적은 있지만 보러 간 적은 없는데, 브로드웨이에 갈 수 있다면 <지킬 앤 하이드>를 제일 먼저 볼 거다. 한 서른다섯 쯤에는 직접 출연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좀 이르지만 내년 소망은 뭔가.
엄기준
: 2월에 공연할 연극 <밑바닥에서>를 포함해 6월 정도까지 공연 일정이 대략 다 잡혔다. 그리고 내년에는 영화를 해 보고 싶다. 드라마보다 전체적인 호흡이 길고, 촬영한 다음에 직접 모니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다.

어떤 면으로든 지금과 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고 싶나.
엄기준
: 음, 연기를 더 잘 하는 거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일 말고는 별로 관심 있는 게 없다. 그런데 나이는 좀 더 빨리 먹으면 좋겠다. 진중하고 깊이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서다. 아, 그 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한 번 더 하고 싶다. 더 나이 들어서 하면 늙은 베르테르가 될 테니까, 그럴 수는 없지. (웃음)

스타일리스트 정혜진 / 헤어&메이크업 윤이 / 의상 S.J. Dupont / 구두 소다옴므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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