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이 영국에 재위한 기간은 1702~1714년이다. 그녀의 일생은 한마디로 불행의 연속이었다. 언니와 아버지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고, 황실의 상황마저 꼬이고 꼬여 뜻하지 않게 군주가 됐다. 그녀의 남편은 물론 자식들마저 다 죽고 말았는데 여전히 왕이었던 이유로 끝없는 정쟁에 휩싸인다. 갖은 불행을 겪으면서 이제는 삶의 의미까지 희미해졌지만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말버러 공(존 처칠)으로 대변되는 휘그당과 야당인 토리당의 찰리(니콜라스 콜트) 사이에서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지만 그런 권력마저 허망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어찌 보면 앤이 그깟 하잘 것 없는 토끼들에 집착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앤 여왕을 다뤘다고 해서 이 영화를 딱히 시대극으로 분류할 필요는 없다. 영화가 바라보는 곳은 앤 여왕, 사라 그리고 아비게일 사이에 벌어지는 섬세한 관계 설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결국 세 여인의 관계에 기대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신세에 불과하다. 부인의 힘을 이용해 승승장구하는 말보로 경이나 아비게일에게 기대어 권력을 노리는 찰리와 마샴(조 알윈)도 결국 비열한 인간들일 뿐이다. 그에 비해 세 여인은 적어도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존재들이다. 영화를 통해 영국 왕조사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유추해내려는 노력이 부질없는 이유다. ‘더 페이버릿’을 역사에 기반을 둔 허구, 즉 팩션(faction)으로 분류해 마땅하다.
어떤 저항이나 어떤 연대도 개인의 이기심을 꺾지 못한다. 한번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사라, 그 권력을 차지하려 갖은 꾀를 짜내는 아비게일, 그러나 그들 위에는 “어디 감히 여왕의 몸에 손을 대는가, 내 허락 없이는 입을 벙긋하지 말라”고 호통 치는 앤이 있다.
어둡고 복잡한 왕궁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여왕, 지병과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를 꼭 옆에 두어야 하는 처량한 신세, 그러면서도 신하들 앞에선 위엄을 보여야 하는 이중적인 삶, 그렇다고 해서 여왕의 자존심과 권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군을 물리친 왕, 양쪽 이야기를 골고루 들어 정당정치가 뿌리내리게 만든 왕, 스코틀랜드를 병합한 왕, 그녀는 결코 한낱 시녀에 흔들리는 허약한 군주가 아니다. 권력의 속성을 이렇게 잘 표현한 영화를 근자에 만나본 적이 없다.
앞서 거론했듯이 영화의 마지막은 작품의 성패를 가를 정도로 대단히 중요하다. 뛰어난 감독의 기교 덕분에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아니 마지막 장면을 우선 머리에 그려두고 나서 그 앞의 이야기를 차례로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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