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감독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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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정시우 기자]감독이 자신의 전작과 싸워야 하는 존재라면, 류승완은 너무나 일찍 고단수의 상대를 만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라는 팔팔 끓어오르는 신선한 데뷔작을. 그러니까 그는 초반부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세계와 싸워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실제로 세상은, 영화계에 놀라운 충격파를 안기며 등장한 감독의 차기작들에 냉엄한 ‘칼날’을 휘둘렀다. 어쩌면 류승완의 15년 영화인생은 그를 옭아매고 있는 편견 혹은 부담감과 싸워온 시간일지도. 그런 의미에서 ‘베테랑’은 반가운 영화다. ‘베테랑’에는 류승완이 ‘순수영화키드’였던 시절 탐닉했던 요소요소들이 즐비하다. 류승완은 자신이 진짜 좋아는 것들을 ‘어깨에 힘주지 않고’ 신명나게 ‘베테랑’안에 담아냈다. 진짜 베테랑의 영화라 할 수 밖에.

Q. (인터뷰 전날, 류승완 감독은 JTBC ‘뉴스룸’에 출연했다)손석희 앵커와 친분이 있으신가요? 방송을 보니 가까워 보이던데.
류승완: 이전에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두 번 나간 적이 있어요. 그 인연이지 친분이 두터운 건 아니에요. 연락처도 모르는걸요. ‘뉴스룸’ 출연은 상상도 못했어요. 뉴스에 출연하게 될 줄이야.(웃음) 그리고 ‘뉴스룸’은 영화인들을 다 얼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10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긴지 몰랐어요.

Q. 배우들도 ‘뉴스룸’에 출연하면 유독 긴장하더라고요.
류승완: 뉴스는 사실로 기록되는 거잖아요? 가급적이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야 하니까, 그에 대한 부담이 있는 것 같아요. 생방송 뉴스 현장을 처음 가 봤는데 긴장감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뉴스에서 NG는 곧 사고니까. 카메라 블로킹이 굉장히 신기했어요. 기자와 카메라가 싹 빠져나가면 다음 카메라가 탁 받고! 자료 화면이 나가는 동안 손석희 아나운서가 재빠르게 멘트를 준비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Q. 뉴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영화 찍을 때도 시간에 쫓겨야 하는 상황이 있죠?
류승완: 영화는 다시 찍을 수 있기에 생방송과는 다르죠. 하지만 말씀처럼 시간에 쫓기는, 한 번 밖에 못 찍는 순간들이 있기는 해요. 가령 아주 위험한 대형 스턴트 장면을 찍을 때. 혹은 안개 낀 풍경을 찍어야 할 때. 안개가 다음 날 또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거니까요. 자연을 찍는 건 언제나 아슬아슬해요. 자연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웃음) 흔히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하면서 여러 요소들을 이야기 하는데, 저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찍는 순간의 시간이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고요. 이를테면 지금 ‘베테랑’에 대한 관객들의 환호가 있는데, 저는 이것이 2015년 현재이기 때문에 오는 반응인 것 같거든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여러 측면에서 영화에 작용되고 있는 거죠.
류승완감독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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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015년이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온다고 하셨는데, 반대로 2015년이기 때문에 감독님이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류승완: 그렇죠. 그건 역으로도 성립이 가능하죠.

Q. 결국 ‘당대의 대중과 소통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할 것 같습니다. 10년 후의 ‘베테랑’이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 궁금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류승완: 저도 궁금하네요. 보편성의 문제 같아요. 굉장히 진지한 영화인데 시간이 지나서 코미디가 돼 버리는 영화들이 있고, 되게 웃기는 영화인데 진지한 영화가 돼 버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반면 그것을 넘어서는 영화들이 있어요. 사건에 함몰되지 않고 인물에 조금 더 깊게 들어가 주면 시간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영화라는 것이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베테랑’이 지닌 권선징악이라는 테마는 인류가 드라마를 구사할 때 생겨난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테마가 아직 유효한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는 왜곡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갈망하게 되는 거죠. 이 영화가 10년 후에도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드는 사람으로서 시간의 흐름을 뚫고 살아남는 영화였으면 하는 바램은 있죠.

Q. 시간과 관련된 또 하나의 질문입니다. 배우 입장에서 영화라는 것은 ‘그 시간, 그 영화 테이프 안에 자신이 영원이 박제’되는 거잖아요? 배우들에게 ‘영화적 시간’이라는 것도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류승완: 그렇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순간들의 기록을 꺼내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긴 해요. 저만 해도 ‘복수는 나의 것’(2002) ‘오아시스’(2002)에 출연했던 장면을 보면 기분이 묘해요. ‘아, 나도 저렇게 뽀얄 때가 있었는데, 이젠 이렇게 맛이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웃음)

Q. 아니, 왜요? 나이가 들수록 중후한 멋을 풍기고 계신데요.(웃음)
류승완: 으하하하. 희한한 게 제가 30대까지는 ‘액션키드’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너무 좋아요. 어떤 기자분과 “액션키드라는 말, 듣기 싫으시죠?” “나, 너무 좋아요. 꼭 써주세요!” “그게 나이 드시는 거예요” 이랬어요. 최근 인터뷰 사진 댓글을 봤는데 누가 또 그래요. ‘류승완도 세월이 할퀴고 갔구나.’(일동 웃음) 그래서 집사람에게 “나, 자기 전에 팩해줘” 이랬어요. 요새 나이가 든다는 걸 자주 느껴요. 그게 영화에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Q. 어떤 방향으로 드러나는 것 같나요?(다음 답변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류승완: 과거 영화를 만드는 저의 기본적인 태도는 제가 중심이었어요. 그 다음은 내 동세대 친구들. 그리고 윗세대에 대한 어떤 것도 있었어요. 그건 분노일 수도 있고 하소연 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 뒷세대들을 자꾸 생각하게 돼요. 우리는 이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하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잖아요? 이건 우리 세대의 문제거든요. 물려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부당거래’ ‘베를린’을 만들면서 우리가 언제까지 이 꼬락서니를 보고 살아야 하나 싶었어요. ‘우리가 언제까지 패배해야 하는데?’ ‘우리도 한 번 승리하면 안 돼?’ 싶었던 거죠. 뭔가 뒷세대 친구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 주고 싶더라고요. “형이 봤는데 말이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하는 걸 말이에요. 그래서 ‘베테랑’의 마지막 액션 시퀀스도 사적인 영역에서 복수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사법정의가 제대로 이뤄지는 게 중요했어요.
류승완감독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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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 하셨는데, 감독님 초기작들 인물들은 ‘주먹이 운다’도 그렇고, 대부분이 어쩔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약자들이었어요. 그들끼리 아옹다옹하며 싸웠죠.
류승완: 맞아요, 맞아요! 아예 갑(甲)의 존재가 안 나왔죠.

Q. 그런데 ‘부당거래’부터 자본과 권력을 쥔 기득권들이 등장하고 있고, 또 그들과 싸우고 계십니다.
류승완: 그건 제 의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살면서 변한 제 환경의 영향 같아요. 가령 이전엔 경찰영화를 준비해도 형사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는 경찰서장도 만났어요. 제 삶의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넓어지면서 생긴 변화가 있는 거죠. 저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변한다고 믿는 사람인데, ‘변할 거라면 잘 변하자’는 쪽이에요. 성장해야죠. 퇴보하지 말고.

Q. ‘의미를 가지고 만드는 것’ 못지않게 ‘뭔가를 의식하지 않고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베테랑’은 후자였어요. 잘난 척 하지 않고 좋아하는 걸 밀어붙이는 느낌이랄까.
류승완: 그건 저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태도의 변화 중 하나에요. 좋은 감독은 어떤 입장이어야 하는가! 저는 그걸 좋은 선생님에 비유해요. 우리가 기억하는 좋은 스승은 어려운 문제는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는 선생님이잖아요. 전해야 하는 이야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많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야기일수록, 명확하고 명쾌하게 풀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것이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태도가 아닐까 싶고요. ‘베테랑’을 본 분들의 반응을 보면 지금의 제가 아주 잘못된 태도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Q. ‘베테랑’은 메시지도 그렇고 황정민 씨가 나와서 그런지 ‘부당거래’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요. 어떤 인터뷰에서 “‘부당거래’는 가장의 영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최철기(황정민)가 가족과 먹고사는 것에 대한 고단함으로 인해 부당한 거래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베테랑’의 서도철(황정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치게 살지 말자’는 쪽이에요. 비슷한 상황을 정반대로 풀어낸 게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류승완: 맞아요. 포커스를 어디에 맞추느냐의 문제죠. 유혹에 굴복한 인간의 이야기가 ‘부당거래’라면, 저항했을 때 그려지는 그림이 ‘베테랑’이죠. ‘베테랑’도 가장들의 이야기에요. 최철기와 서도철은 계급적 위치가 같고, 똑같이 가족들이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요. 그리고 둘 다 SUV를 타고 다니죠.(웃음)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최철기-서도철과 같은 유혹의 손길이 들어왔을 때 나는 쉽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하고. 잘 모르겠어요. 저는 부정부패와 결탁할 사람 같기도 해서~(일동 웃음)

Q. 사안은 다르겠지만, 이 시대 가장이라면 누구나 최철기-서도철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서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류승완: 그럼요. 종이 한 장 차이거든요! 황정민 선배가 저에게 “자기야, 이거 써” 하면서 여행에서 사온 선물을 주면 부담 없이 받아요. 그런데 생활이 어려운 걸 뻔히 아는 단역배우가 명절에 시골에서 농사한 고구마 한 상자를 보내면 못 받겠어요.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어요. 뭔가를 보낼 수 있는 환경의 배우가 아닌데 제 딸에게 선물꾸러미를 보내왔어요. 도저히 못 받겠는 거예요. 그건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나 스스로의 가치를 완전히 파렴치한처럼 만드는 거니까. 그래서 편지를 써서 돌려보냈는데, 이게 사실 캐스팅과도 무관할 수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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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니까…
류승완: 10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어떤 매니저분이 술을 마시자고 자꾸 연락을 해 오는 거예요. 더 이상 거절하기가 그래서 술자리에 갔는데, 너무 거한 곳이었어요. 양주가 나오는. 속으로 ‘아, 나오지 말걸!’ 바로 후회했죠.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람과 술을 마신 건 사실이 돼 버린 거잖아요. 여지없이 다음 주에 연락이 와서 배우 프로필을 보내왔어요.(일동 탄식)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면피할 수 있을 만한 배역을 쥐어짜서 캐스팅 했어요. 그런데 더 최악은 뭐였나, 제가 요구하는 것들을 그 배우가 너무 잘 했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그 배우를 미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 잘못이 아닌데 미워죽겠는 거예요. 그때 너무 괴로웠어요. 그래서 제가 영화인들 모이는 술자리를 잘 안 다녀요. 친한 감독들 모이는 몇몇 자리 아니면.

Q. 감독이란 자리, 여러 유혹이 없지는 않으리라 예상해 봅니다.
류승완: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저는 ‘난 떳떳해요!’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제가 서도철이라는 인물을 유독 애정 하는 것도 제가 못 가지고 있는 면을 지닌 사람이어서 일 수 있고요. 제가 도달하고 싶은 인물인 거죠. 그런데 제가 오늘 별의별 얘기를 다 하네요.(웃음)

Q. 개인적으로 ‘베를린’에서의 액션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인물들이 느끼는 고독이, 심리묘사가 아닌 액션 수위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됐다고 보거든요. 그건 ‘베테랑’에도 이어지죠. 가령 엄태구 씨(이종격투 수행원 역)의 경우 몇 마디 말없이 싸우기만 하는데, 그의 감정이 다 드러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류승완의 액션이 전과는 다른 곳으로 확장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류승완: 제가 갈수록 액션의 행위보다 행위 안에 있는 인물들에 집중해서 그런가 봐요. 행위는 정두홍 무술감독이 너무 잘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인물에 집중해도 배우들이 표현을 못해주면 안 되는데, 다들 잘 해 줘요. 지금 말씀 하신 부분은 되게 신선한 게, 엄태구라는 배우는 독립영화 좋아하는 분들이나 영화를 진짜 즐기는 분들이 아니면 잘 못 보거든요. 결국 그건 엄태구라는 친구가 갖는 마스크의 호소력인 거예요. 가끔 너무 우직한 애들이 있어요. 잘 싸우라고 하니까 진짜 잘 싸우기‘만’ 하는, 눈치 없는 애들.(웃음) 그런데 엄태구는 말 한마디 없이 정말 여러 심리를 보여줘요. 그건 엄태구의 재능인 거죠. 그리고 ‘베테랑’에서는 무성영화에서 받은 저의 영향을 표현하기도 했어요.

Q. (많은 인터뷰에서 언급해 온 코미디언) 버스터 키튼 말씀이신가요.
류승완: 네. 그리고 성룡의 영화들.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형사 영화거든요. 그러니까 영화 초반에 나오는 두 번의 액션 시퀀스는 명확하게 버스터 키튼과 성룡과 ‘톰과 제리’의 영향이에요. ‘변방의 북소리’(8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 영향도 있고요. 모두 제가 어릴 때부터 너무 좋아했던 것들이에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자의식이 생기기 전부터 열광했던 것들인데, 어느 순간 보니까 정작 내가 만든 영화에는 그런 요소들을 볼 수 없더라고요. 이상했어요.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마음껏 펼친 거예요.
류승완감독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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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굉장히 순수한 영화 키드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큰돈이 오가는 영화산업 한가운데 들어와 계시니, 기분이 살짝 묘할 것도 같아요.
류승완: 끔찍하죠. 제가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의 한국영화와 90년대 각광받기 시작했을 때의 한국영화와 지금의 한국영화는 다른 것 같아요. 이전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덩치가 돼 버렸어요. 지금의 영화시장은 규모에 비해 약간 불안정한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 게 사실이죠.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상태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런 대혼란 속에서 넋 놓으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뷰를 하면 거의 대부분의 기자들 마지막 질문이 “이번 흥행이 얼마나 될 것 같나요?”예요. 점점 그런 형태의 질문에 저항감이 생겨요. 물론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극장에서 시사회 할 때조차 빈자리가 보이면 마음에 걸릴 정도로요. 그런데 그 빈자리에 한 사람이라도 더 와서 이 영화를 봐 줬으면 하는 것과 그걸 숫자로 치환해 버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요. 저는 제가 열광하는 영화에 대해서 몇 백만의 하나가 아니라, 그 영화와 내가 유일한 관계이고 싶고 ‘온리 원’(only one)이 되고 싶어요. 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숫자로 치환해 버리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 돼요.

Q.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로 정말 혜성처럼 등장하셨어요. 감독이 전작과 싸우는 존재라면, 데뷔작이 워낙 독창적이었기 때문에 차기작을 만들 때 ‘신선함’에 대한 압박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류승완: 그 압박에 오랜 시간 시달렸죠. 어떻게 보면 저는 지금까지 저를 둘러싼 편견과 싸워왔던 것 같아요. 류승범이라는 배우가 저와 형제라는 이유로 오는 어떤 편견, 대학을 못 나온 몇 안 되는 감독이라는 것에서 오는 편견, 생활고를 겪었다는 것에서 오는 편견. 인터넷 ‘다찌마와 리’(2000)가 나왔을 때는 사람들이 또 굉장히 독특하게 봤어요. 쌈마이 같다고. 그러면서 당시의 많은 언론들이 저를 리드하려고 했어요. ‘너는 이런 걸, 해야 해!’라고.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너, 이런 애 아니잖아!’ 했어요. 그거에 대한 저항감으로 ‘당신들이 뭔데 나를 규정을 해?’라는 반발도 생겼던 것 같아요.

Q. 이제는 어떤가요? 자유로워지셨나요?
류승완: 이제는 타인의 시선이 저에게 큰 영향을 못 끼쳐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길 바라면서 질문을 하는 기자들이 있는데, 이전에는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주려고 했어요. 거기에는 제가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도 있었겠죠. 그런데 요새는 아닌 건 아니라고 해요. 상대의 반응에 순간적인 감각의 작용은 일어나지만, 그것이 제 삶의 기조를 바꿀 만한 어떤 영향은 못 미치는 거죠.

Q. ‘뉴스룸’에서 ‘베를린’ 배우들을 이야기 하면서 류승범 씨만 거론 안 하시더라고요. 동생이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건가요? 아니면 동생 칭찬에 인색한 편인 건가요?
류승완: ‘베테랑’ 배우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제 영화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준 배우는 류승범이에요. 다음 영화를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도 류승범이고요. 진심이에요. 그런데 관객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야, 너네 둘이 또 해 먹냐?” 이런 게 있다면 잠시 쉬어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를 바라보는 편견을 씻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서로 하고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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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류승범 씨가 지금 해외에 나가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형으로서 두 가지 마음이 들 것 같아요. 걱정도 되고, 부럽기도 하고.
류승완: 작년까지는 물가에 내 놓은 자식 보는 듯한 불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부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에요. 응원한다고 해야 하나? 지금 승범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냐면 오지에 들어가서 한 달간 망고만 따먹고 그러거든요. 끊임없이 명상하면서 스스로 중독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어요. 술도 안마시고, 음식도 소식을 하죠. 지금 류승범은 온전히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는 친구에요. 대화를 해보면 약간 다른 차원의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해요. 한 인간이 멋지게 변화하고 있는 순간을 목격하면서 뭔가가 찡해요. 저는 한 인격체로서 류승범이라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요.

Q. 아…뭔가 굉장히 찡하네요.
류승완: 승범이는 지금 자신이 연기를 아예 안 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더 이상 의미없는 영화들에 자신을 소모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는 잘 알아요. 대중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그게 그의 행복은 아니거든요. 저는 승범이를 보면서 ‘우리가 정말 불행하게 살고 있구나’ 생각해요. ‘우리가 언제까지 집단의 행복, 국가의 행복, 민족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행복이 희생해야 하지?’ 싶어요. 우리 편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소모전을 치르고 있나요? 지금 여름에 개봉하는 영화들만 봐도 그래요. 흥행에서 진다고 해서 영화를 그만 둘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경쟁구도를 붙이고, 함정 질문을 해요. 우리 사회가 개인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그게 ‘베테랑’의 엔딩과도 연관이 있어요. 탈무드에 나오듯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세상을 살리는’ 거니까.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네요.

Q. 대화 나누다 보니, 감독님도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올라서신 것 같아요.(웃음)
류승완: 아유~인터뷰 할 때만! 으하하하.

Q. 마지막 질문입니다. 2008년도에 ‘류승완의 본색’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류승완의 본색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류승완: 흠…그건 모르겠어요. 스스로를 규정하는 건 엄청난 일이에요. 그건 자기를 본다는 거잖아요? 저는 아직 저 자신을 못 봐요. 여전히 제 편견으로 세상을 봐요. 그러고 보니, 저는 저 자신을 보기 위해 사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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