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시봉’ 김현석 감독
‘쎄시봉’ 김현석 감독
‘쎄시봉’ 김현석 감독

‘떠나봐야 소중한 걸 안다’고 했던가. ‘시라노; 연애조작단’ 이후 멜로영화 중단을 선언했던 김현석 감독은 SF스릴러 ‘열한시’를 찍으며 다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그런 그가 다시 돌아 온 멜로영화가 바로 ‘쎄시봉’이다. 1960년대 후반 무교동을 주름잡았던 쎄시봉에서 펼쳐진 순애보들. ‘믿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 것’(‘시라노’ 대사)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김현석 감독은 ‘쎄시봉’을 찍으며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상대에게 모두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임을 느꼈다고 했다. 그야말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수인 셈이다. 영화 인터뷰를 빙자해 그에게 사랑에 대한 많은 것들을 물었다.

Q. 실존인물의 영화화는 처음이 아니다. 야구선수 선동열을 소재로 한 영화 ‘스카우트’(2007) 때 초상권 허락을 받기 위해 노력한 경험이 있었을 텐데.
김현석:
그때는 선동열 감독님께 허락을 받으려고 오키나와 전지훈련장까지 찾아갔었다.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예를 갖추려고 한 거다. 설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고 4박 5일 일정을 잡고 갔다. 그런데 만난 지 30분도 채 안 돼 허락을 해 주셨다. 워낙 대가이시라 생각이 굉장히 깨어 계셨던 것 같다.

Q. 이번에 쎄시봉 선생님들을 찾아갔을 때는 어땠나.
김현석:
‘스카우트’의 경우 내가 제작한 작품이었고, 이번 작품은 제작자가 따로 있어서 제작자가 미리 사전작업을 해놓았다. 처음 뵌 건 ‘쎄시봉’ 콘서트 때. 그때 배우들과 함께 가서 인사드리고 이후에 각각 한 분씩 찾아뵀다. 이장희 선생님은 미국에서, 송창식 선생님은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만났다. 조영남 선생님만 최근 콘서트를 통해 찾아뵀다.

Q. 영화화 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의외의 반응을 보인 분은 누구인가.
김현석:
선동열 감독님처럼 다들 당대 최고의 분들이기 때문인지 영화에 대한 이해가 높으셨다. 송창식 선생님의 경우 처음엔 시나리오를 보고 “나는 원래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시는데” 그러시긴 했다.(웃음) 그러다가 나중에는 “뭐, 영화라는 게 어차피 다 픽션이니까” 하면서 허락하셨다. 나중에 PD를 통해 전해 들었는데, 허락 받을 때 대본이랑 결과물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 살짝 우려하셨다고 하더라. 우리는 그런 눈가림은 안 했다. 시나리오대로 영화가 나왔다.

Q. 4년 전 방영된 MBC ‘놀러와-쎄시봉’ 특집에서 영화 아이템을 얻었다고.
김현석:
원래 세시봉 노래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볼 당시가 ‘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 끝내고, 멜로영화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을 때였다. 멜로 시나리오는 더더욱 쓰기 싫었다. 그런 감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아는 작가에게 “내가 ‘열한시’를 찍는 동안 시나리오 초고를 써 놓으라”고 했는데, 돌아와 보니 한 줄도 안 써져있었다.(웃음) ‘열한시’ 찍기 전이었다면 ‘쎄시봉’을 포기했을 거다. 그런데 ‘열한시’를 찍으며 멜로를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쎄시봉’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김현석
김현석
Q. ‘시라노’ 끝나고 더 이상 로맨틱 코미디는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선언처럼 하고 다녔다.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크게 실연이라도 당했던 건가.(웃음)
김현석:
나이가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시라노’는 20대 초반에 쓴 시나리오다. 그 나이에 쓰니까 가능한 사니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촬영도 행복하게 했고 흥행도 좋았지만, 사실 그다지 만들고 싶었던 영화는 아니었다. 뭔가 모두 거짓말 같았으니까. 결과는 뭐. 다른 길을 가봤더니 원래 좋아했던 걸 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Q. 김현석과 멜로는 흡사 장기연애 하는 커플 같다. 왜, 오랜 시간 만난 커플의 경우 상대가 시들해져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봤다가, ‘별 거 없구나’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 않나.
김현석:
하하하. ‘열한시’ 덕분에 ‘쎄시봉’을 할 수 있었던 건 맞다. 무엇보다 멜로가 됐든 뭐가 됐든 일단은 내가 쓴 시나리오로 작품을 하자는 생각을 그때 확실하게 했다.

Q. 아무튼 멜로에 장기를 발휘하던 감독이 갑자기 SF로 뛰어서 놀라긴 했다.
김현석:
‘어차피 남의 시나리오로 할 거, 내가 못 쓰는 장르로 해 보자’라는 마음이 있었다.

Q. 나이가 들면서 멜로를 꺼리게 된 것 같다고 했는데, 왜일까.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속성을 너무 꿰뚫게 돼서 그럴까.
김현석:
그런 것 같다. 현실은 사실 홍상수 영화이지 않다. 그런데 상업 로맨틱 코미디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판타지를 하는 느낌이랄까. 임창정 고소영 주연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도 20대 때 쓴 시나리오다. 당시 순진해기에 가능했지 지금 보면 말도 안 된다.(웃음)

Q. 그렇다면, 30대 때의 김현석은 어땠나.
김현석:
‘광식이 동생 광태’를 30대 때 썼다. 순정파가 아닌 광태(봉태규)라는 캐릭터가 30대에야 등장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20대 때 광식이(김주혁)처럼 살았고, 30대 때는 광태처럼, 그리고 지금은 홍상수 영화 주인공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일동 웃음)

Q. 1995년 ‘사랑하기 좋은 날’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뿌리가 멜로이긴 하다.
김현석:
‘사랑하기 좋은 날’은 대학교 때 쓴 시나리오인데, 당시 내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움직이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쓴 거다. 그런데 배창호 감독님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을 보고 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키웠으니, 어렸을 때부터 내가 말랑말랑한 감성에 꽂혀있는 것도 맞을 거다. 그 영화야말로 제대로 된 순애보니까.

송창식(조복래), 윤형주(강하늘), 오근태(정우)
송창식(조복래), 윤형주(강하늘), 오근태(정우)
송창식(조복래), 윤형주(강하늘), 오근태(정우)

Q. 사랑 앞에서 이성적인 편인가, 감성적인 편인가.
김현석:
나는 좌 뇌를 안 쓴다. 감성적이다. 직관적이고 충동적이고 이것저것 따져보는 걸 안 좋아한다. 운명이겠거니 하는 게 있다.

Q 멜로가 체질적으로 맞는 것 같다. 그나저나 오근태라는 이름이 ‘시라노’와 ‘열한시’를 함께 한 연출부 이름이라고 들었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대리만족한 기분은 어땠나?(웃음)
김현석: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건조해진다. 설레는 감정도 자주 안 오고. 그러던 차에 사랑의 열병을 앓는 그 친구를 보면서 ‘맞아, 나도 옛날에 저랬었는데’ 했다. 촬영이 힘들 때마다 끙끙대는 그 친구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웃음)

Q. 카운슬링은 해 줬나.
김현석:
해 줘봤지. 눈이 멀고 귀가 멀면 타인의 소리가 안 들리는 법이다.

Q. 김현석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에겐 특유의 지질함이 있다. 그래서 얼마 전 배우 정우에게 물어봤다. “김현석 감독님은 사랑을 아는 감독인가요, 사랑에 실패한 남자의 마음을 잘 아는 남자인가?”라고. 후자 같다고 하더라.
김현석:
연애는 많이 해왔다. 창작에 도움이 되는 건 사랑에 실패했을 때다. 그때 더 많은 창작 에너지가 생긴다. 그리고 사실 결혼에 골인한 사람들 중에 와이프가 뮤즈라고 하는 사람이 있나? 없는 것 같은데.

Q. 미혼이라 그건 잘 모르겠고, 감수성 예민한 감독과 뮤지션들이 결혼 후 작품이 달라지는 건 많이 목격했다.(웃음)
김현석:
맞다. 내가 아는 어떤 기술 스태프도 결혼 한 다음에 음악이 후져졌다.(일동 웃음)

Q. 그런데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대중을 상대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적어도 남들이 아는 감정을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결혼도 그 중 하나일 텐데, 해 보지도 않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김현석:
나는 (결혼) 때를 놓친 경우다. 할 뻔 했는데…(웃음)

Q. 어쨌든 오근태도 사랑 앞에서 지질한 면이 있는 인물이다.
김현석: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지. 그런데 사랑 앞에서만 그런다. 애도 어쩌면 마초 일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건 결국 상대적인 거니까. A 앞에선 ‘갑’이어도, B에겐 ‘을’일 수 있는 게 사랑이다.
김현석
김현석
Q. 정작 오래 기억에 남는 건 내가 ‘을’일 때가 아닐까 싶은데, 당신은 ‘을’일 때가 많았나 ‘갑’일 때가 많았나.
김현석:
나도 누군가에겐 악당이었을 때가 있었을 거다. 을이었을 때도 있었을 테고. 그런데 서로 사랑하다가 헤어지고 나면 ‘갑, 을’ 문제보다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미련이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Q. 나이가 들수록 ‘을’이 되기 어렵지 않나?
김현석:
몸을 사려서 그런 것 같다. 옛날에는 내가 ‘을’인지 뭔지 모르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지 않나.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몸을 사리게 되면서 들이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사랑에 힘을 쏟는 게 귀찮아 지기도 하고.

Q. 과거 한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쓸 때 구조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하면 ‘쎄시봉’의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다. 시간을 뒤섞어 볼 생각은 없었나.
김현석:
교차편집은 2인 1역을 하겠다고 마음먹을 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써니’나 ‘건축학개론’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리고 20대에서 40대로 넘어갈 때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영화를 보면 화면비도 바뀐다. 센 역할을 많이 했던 (김)윤석 선배님 캐스팅이 의외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 ‘20대 때 순진했던 애가 무슨 일로 인해 그토록 눈빛이 변했을까’ 그걸 의도했다.

Q. 관객 입장에서는 흐름이 끊길 수 있는 부분인데, 그게 의도였다고 하니 뭐라 공격을 못하겠다.(웃음)
김현석:
안 그래도 흐름이 끊긴다는 이야기들이 있고, 20대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나는 조금 의외다. ‘쎄시봉’은 40대 오근태(김윤석)의 뒷모습에서 출발한 영화다. ‘20년간 참아온 눈물을 쏟아내는 남자에게 어떤 진실이 숨겨져 걸까’ ‘그는 왜 트리오를 탈퇴했을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풀어낼지 확신이 든 후에야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40대 분량은 비록 3분의 1밖에 안 되지만, 나는 40대에 꽂혀있었던 거다. 사실 관객들이 20대 부분을 이토록 좋아해 주실지 몰랐는데 그건 배우들의 공이지 않나 싶다.

Q. 영화에서 쎄시봉의 노래 ‘웨딩 케이크’를 민자영(한효주)이 작사한 걸로 설정했다. 가사를 보면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라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부분에서 영화가 ‘민자영에게 주는 면죄부’라는 생각을 했다. 같은 여자 눈엔 아무리 생각해도 민자영은 나쁜 애거든.(웃음) 두 남자 사이를 오고 간.
김현석:
하하하. 그렇게까지는 생각 못했다. 경쾌한 원곡과 달리 윤형주 선생님이 가사를 쓴 번안곡은 굉장히 슬프다. 경쾌한 곡이 어쩌다가 슬픈 노래로 바뀌었나 궁금했고, 그렇다면 그 ‘가사를 따라 가보자’ 하면서 민자영이 곡을 쓴 걸로 바꾸었다. 그리고 ‘웨딩 케이크’는 윤형주 선생님이 가사를 썼다는 걸 모르고 들으면 영락없이 여자가 쓴 가사 같다. 사랑하는 남자가 결혼을 하는데 여자가 웨딩케이크를 줄 것 같지는 않거든. 그렇지 않나?

Q. 글쎄, 요즘 여자들을 너무… 하하하.
김현석:
영화 배경은 70년대니까. 하하. 그리고 사실 어떤 시나리오 버전에서는 민자영이 조금 더 나쁘게 그려졌다. 오근태 앞에서 “나 나쁜 년이야” 하면서 우는 버전이 있는데, 여자 스태프들이 그건 여자를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하더라.(웃음) 그래서 그건 뺐다.

‘쎄시봉’ 김현석 “사랑? 현실은 홍상수 영화잖아요”(인터뷰)
" />광식이(김주혁), 호창(임창정), 병훈(엄태웅)과 상용(최다니엘), 정우(오근태)<시계방향>

Q. 오근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민자영을 20년 동안 품고 산다. 당신이라면?
김현석:
그게 남자의 판타지 아닐까.(웃음)

Q. 연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김현석:
그때그때 사랑에 대한 생각이 변한다. ‘시라노’ 때는 “믿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 거다”라는 대사가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하면서 바뀌었다. 사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각색하면서 그 노래가 점점 중요해졌다. 단순한 가사인데, 사랑에 대한 정수가 담긴 것 같다. 이것저것 따지고 않고 줄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면서 생각한 게, 30대 때 5년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 잘해주지 못한 게 많이 후회됐다. 남자들은 과거 사랑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하니까.

Q. 그 말 동의하나. ‘남자 마음엔 방이 여러 개 있고, 여자 마음엔 방이 하나’라는 말.김
현석:
비슷한 것 같다. 여자들은 방이 하나라서 과거 남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Q.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지만, 현실에 충실한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당신 영화 속 캐릭터 중에 스스로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김현석:
오근태는 너무 ‘판타지의 끝’ 끝이라 나와는 안 맞고…(웃음) 아까 말했듯 20대 때는 광식이, 지금은 ‘시라노’ 병훈(엄태웅)과 가장 비슷한 것 같다. 약간 시니컬하고 현실적인.

Q. 병훈은 사랑에 실패한 자이지 않나.
김현석:
뭐, 나도…(웃음)

Q. 처음 ‘스카우트’ 이야기로 문을 열었는데, 마지막 질문도 ‘스카우트’로 하겠다. 개인적으로 스카우트를 좋아한다(웃음) 임창정이 최고의 연기를 보인 영화도 ‘스카우트’라고 생각하고.
김현석:
창정이 연기 좋았지. 그런데 가장 망한 것도 ‘스카우트’다. 그전까지는 창정이가 흥행 불패였는데.(웃음)

Q. 말한 대로 상업적으로는 망한 영화일 수 있다. 하지만 평가가 좋았고 지금도 많이 사람들에게 화자되고 있는데, 그런 작품은 감독에게 어떻게 남나.
김현석:
실패한 사랑이 더 기억에 남듯 내겐 ‘시라노’보다 ‘스카우트’가 더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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