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이미연: (시를 보여주며) 유치하죠? 그죠?
박광정: 시를 많이 읽으셨군요.
이미연: 예, 베스트셀러는 거의 읽는 편이에요.
박광정: 여기저기 베낀 흔적이 많군요. 요즘 시대가 개가 소를 베끼고 소가 개를 베끼는 시대라지만, 시인은 그래선 안 됩니다.” - 1997년 영화 ‘넘버3’ 중

장면 2.

선배: 야, 오랜만에 소녀시대의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가 식당에서 나오네? ‘토토가’ 덕분인가?
후배: 선배… 저 노래 ‘다만세’ 아니고요. 신인 걸그룹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이란 노래인데요. ‘다만세’랑 비슷해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다시 만난 구슬’이라고 불러요. - 며칠 전 저녁 식사 중

가요계에 ‘카피 앤 페이스트(copy & paste)’의 시대가 오고 있다. 카피(copy)해서 붙인다(paste)는 말이다. 이미지 카피부터, 패션, 안무 그리고 이제는 노래까지 카피해서 붙인다. 표절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카피해서 붙인 것에 대해 “베꼈다”고 비난을 가하면 “오마주”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이다. 오마주(Hommage)는 사전적 의미로 존경, 경의를 뜻한다.

유튜브에 돌고 있는 ‘다시 만나 세계’와 ‘유리구슬’의 비교 영상
유튜브에 돌고 있는 ‘다시 만나 세계’와 ‘유리구슬’의 비교 영상
유튜브에 돌고 있는 ‘다시 만나 세계’와 ‘유리구슬’의 비교 영상

최근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신인 걸그룹 여자친구다. 여자친구는 대놓고 소녀시대의 초기 콘셉트를 따라 했다. 이미지는 차용하는 것은 가요예에 빈번한 일이다. 문제는 노래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떠오른다. 전문가들은 표절이라는 말 대신 ‘고증’이라고 표현을 쓴다.

‘유리구슬’에 대해 음악평론가 김성환 씨는 “‘다만세’의 리믹스를 듣는 것 같다. 곡이 좋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고증 때문이다. 베껴도 이렇게 대놓고 베낄 수 있나?”라며 “아무리 섹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청순 걸그룹 시대로 전환되고 있지만 이렇게 창의성 없는 사운드로 나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유리구슬’은 ‘다만세’와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유리구슬’ 도입부에 나오는 학교종소리는 일본 최고의 인기 걸그룹 AKB48의 ‘벚꽃의 꽃잎들(?の花びらたち)’에도 똑같이 나온다. 이에 대해 김성환 씨는 “고증에 충실해도 너무 충실했다”고 말했다. 이제 표절의 시대가 가고 고증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나인뮤지스 티저사진(오른쪽)과 더블유코리아 화보
나인뮤지스 티저사진(오른쪽)과 더블유코리아 화보
나인뮤지스 티저사진(오른쪽)과 더블유코리아 화보

컴백을 앞둔 걸그룹 나인뮤지스는 미리 공개한 새 앨범 ‘드라마’의 멤버들 사진이 패션잡지 ‘더블유 코리아’의 3년 전 표지화보를 베낀 것 때문에 홍역을 치렀다.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소속사 스타제국 측은 15일 “티저 사진은 오마주이며 저작권 확인을 마친 후 진행한 것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사가 나간 후 ‘더블유 코리아’ 측에서 아무런 협의 사항이 없었다고 반박하자 스타제국은 16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15일 스타제국은 ‘포토그래퍼와 사전에 협의’ ‘촬영 전 저작권 확인 마쳤다’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더블유 코리아에서 바로잡은 것처럼 촬영 전 별도의 저작권 확인을 마치지 못했으며 ‘포토그래퍼와 사전에 협의’되었다는 내용 역시 보도 직후 스타제국 측의 오류가 있었던 점을 확인하고 기사가 수정될 수 있도록 요청했다”며 “논란이 된 나인뮤지스의 재킷 이미지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홍장현 작가가 촬영한 더블유 코리아 2012년 3월호 화보 및 표지를 참고한 것이 사실이다. 더블유 코리아와 포토그래퍼 홍장현 측에 사전 협의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혼란을 드린 점 깊이 사과드린다”고 입장을 전했다.

위의 해프닝처럼 표절을 오마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작년만 해도 티아라 효민, 포미닛 현아의 앨범에서 다른 곡의 가사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가 표절 의혹이 일자 오마주라고 변명을 늘어놓은 사례들이 있다. 소녀시대조차 작년 연말 KBS ‘가요대축제’에서 돌체앤가바나 의상을 베꼈고, 이에 대해 스타일리스트가 “오마주”라고 대답하고 넘어갔다. 이 ‘카피 앤 페이스트’는 걸그룹의 콘셉트 동어반복만큼이나 지긋지긋하게 계속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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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 앤 페이스트’가 왜 유독 걸그룹에게서 반복되는 것일까? 김성환 씨는 “S.E.S., 핑클 때부터 이미 검증된 콘셉트의 재활용을 통해 안전한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S.E.S., 소녀시대 조차도 일본에 이미 존재하던 걸그룹들의 이미지, 스타일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세’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평단에서는 “J-팝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일본의 경우 걸그룹의 역사가 긴 만큼 장르나 스타일이 국내보다 훨씬 다양하다. 하지만 J-팝을 벤치마킹해 K-팝을 탄생시켜 역수출까지 시킨 한국은 왜 이토록 동어반복일까? 김성환 씨는 “일본은 걸그룹이 악기를 들고 헤비메탈을 하는 등 마니아들의 취향에 맞게 다양한 콘셉트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걸그룹들은 특정 마니아보다는 다양한 수용 층을 만족시켜서 빨리 띄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시도할 수 있는 콘셉트에 한계가 있다. 크레용팝 정도가 마지노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대중이 가요계의 ‘카피 앤 페이스트’에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만 있을 뿐 가수, 그리고 가수 뒤의 작곡가들은 별 무리 없이 계속 활동을 해나간다. 우리조차도 ‘ctrl+c와 ctrl+v’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S.E.S.가 데뷔한 1997년에 나온 영화 ‘넘버 3’에는 ‘개가 소를 베끼고 소가 개를 베끼는 시대’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리고 2015년, 우리는 ‘개가 소를 오마주하고 소가 개를 오마주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런데 개와 소가 서로를 존경하게 될 줄이야.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스타제국엔터테인먼트, 더블유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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