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요즘 정재영의 행보가 더 바빠진 것 같다. 찾아보니 매년 1,2편은 개봉을 시켜왔더라. 그런데 ‘열한시’부터 내년까지 그 편수가 더 많아질 것 같다. ‘플랜맨’, ‘방황하는 칼날’, ‘역린’ 그리고 최근 개봉된 ‘열한시’ 등 그 장르도 참 다양하다.
정재영이 바쁘다. 영화 ‘열한시’가 극장에서 내려가자, 곧바로 ‘플랜맨’을 들고 대중을 찾았다. ‘역린’ 촬영도 한창이다. ‘방황하는 칼날’은 이미 다 찍었다. 누구보다도 바쁜 행보다. 그는 “계속 밀리다 보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큰 웃음이다. 하지만 정재영은 매년 1편 이상의 영화를 꾸준히 선보였다. 다만 이번엔 개봉 시기가 겹쳤을 뿐이란다. 그러면서 1년에 두 작품을 해도 많이 쉬는 게 배우란 직업이라고 난데없는 자랑(?)이다. 작품을 하지 않는 건 문제지만, 많이 하는 건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다고 분명한 생각을 전했다.
그럼에도 정재영은 식상하지 않다. 매작품 다른 색깔을 보여왔던 터다. 이번 ‘플랜맨’에서는 1분 1초까지 계획하며 살아가는 한정석이란 인물이 정재영을 통해 태어났다. 최근 작품 중 가장 말끔한 모습이다. 거칠고 지친 얼굴을 달고 살았던 정재영을 생각하면, 한정석의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멜로까지 더해졌다. 정재영과 멜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다. ‘계획’이란 것과는 다소 거리가 먼 정재영과 한정석, 제법 신선한 조합이다.
정재영 : 연기 생활하면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계속 밀리다 보니 이렇게 됐다. 제때 숙제를 안 해서 한꺼번에 제출해야 하는, 이런 경험 있지 않나.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셈이다(웃음).
Q. 송강호, 설경구 등 2013년을 유독 바쁘게 보낸 배우들이다. 작품 흥행도 꽤 많이 됐고, 관심도 많이 받았고. 정재영이란 배우 역시 그에 못지않게 활동하는데 관심은 덜 받는 것 같는 것 같다.
정재영 : 그니까. 그런 분들이 아닌데(웃음). 그리고 관심을 안 받는 게 좋다. 괜히 다작배우라고 소문나면, 식상할 수도 있다. 뭐랄까.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일반 관객들에겐 많이 하는 것처럼 안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별로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다. 반대로 안하는 건 문제다. 만약 1년에 한 작품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이 작품을 안 보면 2년이고, 연속으로 두 작품을 안 보면 3년이다. 그러면 잊혀 지게 된다. 일부러 하는 걸 빼놓고선, (작품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선함이란 게 배우한테는 매우 중요하다. 연기력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작품 선택할 때도 작품이 우선이다.
Q. 그렇게 쉼 없이 하다 보면 지치지 않나. 쉬운 작업이 아닌 만큼 체력도 생각해야 할 테고.
정재영 : 그래도 엄청 쉰다. 만약 1년에 두 작품 한다고 해도 평균 6개월 일하는 거다. 진짜 많이 쉬는 직업이다. 안 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쭉 쉬다가 개봉할 때 즈음 또 일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 면에서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데 바쁠 때만 엄청 바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아무 일도 없다(웃음).
Q. 그래도 코미디는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내가 살인범이다’ 인터뷰 당시 “과묵한 작품을 계속해서 좀이 쑤신다”는 말을 했는데 그게 ‘플랜맨’ 선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나.
정재영 : 그렇긴 하다. 그런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이 맘에 들었고, 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시기적으로 딱 맞았던 것 같다. 다 운인 것 같다. 타이밍이 딱 맞았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그것도 의미 없는 것 아니겠나. 밤새 공부했지만 시험은 못 보는 그런 경우다(웃음).
Q. 사실 ‘플랜맨’을 제외하면, 최근 선택한 작품을 대부분 묵직한 작품이다.
정재영 : 가벼운 작품들이 별로 없고,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리고 가벼운 작품을 위해 마냥 기다릴 수 없는 거 아니냐. 그때그때 선택하는 거다. 이 역시 운이다. 이러다가 가벼운 것만 계속 할 수도 있다.
Q. 이번에 맡은 한정석이란 인물은 1분 1초까지 계획하면서 사는데 배우 정재영은 평소 쉴 땐 어떻게 지내나. 계획을 좀 세우는 편인가.
정재영 : 좀이 쑤실 때까지 무계획이다(웃음). 일주일이 갔는지, 한 달이 갔는지, 요일도 모른다. 가족 여행 한번 가고, 쉬다 보면 금방 간다. 놀다 보면, 하루하루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우리 아이의 말이 이해된다. 예전에는 토요일도 학교를 가지 않았나. 지금은 토~일을 쉬는데도 불만이다. 일요일 저녁만 되면 한숨이다. 아무리 쉬어도 성이 안차는 것 같다. 인간은 살면서 계속 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Q. 그간 출연작을 쭉 보니 이번 캐릭터가 가장 말끔한 인물인 것 같다. 항상 얼굴에 거칠고, 지친 표정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정재영 : 찍을 땐 인식을 못했는데 나중에 보고 나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것만 하고 싶다.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도심 속에서 재밌게 하고 싶다. 싸움도 안하고(웃음). 어떻게 보면 특수효과도 없고. 아! 마지막에 강우기로 비 한 번 했네(웃음). 여름에 찍어서 약간 더웠는데 편의점에서 에어컨 빵빵 나오고, 그래서 가장 육체적으로 덜 피곤했던 작품이다.
Q. 그래도 캐릭터의 성격은 까다롭지 않나. 한정석처럼 1분 1초 단위로 계획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 있을까 싶다. 때문에 이 캐릭터를 위해 설정해야 될 게 많았을 것 같다.
정재영 : 촬영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있었다. 어떤 장면에서는 분명 했는데, 또 다른 장면에선 안 하게 되고. 그렇다고 다 하려다 보니 장면이 너무 길어지는 거다. 느릿느릿하면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포인트별로 살릴 건 살리고, 뺄 건 빼는 등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Q. 솔직히 말해 초반에 살짝 걱정하긴 했다. 한정석만의 행동과 특징이 초반에 쭉 펼쳐지는데 그걸 어떻게 계속 보여줄까 싶은 거다. 극 중 캐릭터가 변화를 겪긴 하지만, 그렇다고 순식간에 바뀌진 않으니까.
정재영 : 이런 거 저런 거 해보다가 저절로 그래야만 할 것 같은 행동들이 생겼다. 걸음걸이도 늦게 걷는 보다 빨리 걸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자세히 보면 허점이 있다. 초반에는 하다가 나중엔 안하기도 하고. 일일이 다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반에 잔뜩 보여주고, 뒷부분으로 가면서는 절제했다. 또 행동 하나를 보여줌으로서 상징적으로 넘어간 부분도 있다. 걱정하긴 했는데 드라마에 몰입되면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Q. 철저한 계획대로 살아가는 한정석의 삶 중에 진짜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게 있나.
정재영 : 술자리(웃음). 소독하려고 술 먹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 그건 사람이 할 게 아니다. 그렇게는 피곤해서 못 산다. 옛날엔 흙도 먹고 살았는데(웃음).
Q. 평소 정재영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 세운 계획을 잘 지키는 편인가.
정재영 : 계획은 아니고, 바람은 있다. 계획은 되지 않으니까, 안 세운지 진짜 오래됐다. 지금 당장은 ‘플랜맨’이 잘 돼야 그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또 계획도 융통성이 있을 것 같다. 안 됐을 경우 더 열심히 하고, 잘 됐을 때도 열심히 하는 거다(웃음). 바람과 계획은 지치지 말자다. 옛날에는 영어 공부나 취지를 갖는 게 계획이었는데 이젠 포기했다. 영어를 하려면 이민 가야 할 것 같다. 근데 거기서도 한국 사람하고 이야기 할 거다(웃음).
Q. 자신과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하면서 참 흥미로웠겠다.
정재영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 주변에 물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꽤 많다. 이상하다기 보다 그게 자기 울타리인 것 같다. 자기 물건 만지는 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고, 지하철이나 버스 탈 때 맨손으로 손잡이 안 잡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 모두 어떤 강박에서 오는 거다. 영화처럼 극단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Q. 그래서 무엇보다 조절이 필요했을 것 같다.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면서도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지면 안 되는 거니까.
정재영 : 가장 중요했다. 시나리오 읽었을 때 비호감이었다. 싫어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이 사람의 행동 자체가 비호감인 거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터부시되는 캐릭터다.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비호감에서 어떻게 호감으로 바꾸느냐가 관건이었다. 이게 통하지 않으면 보기 싫은 영화가 될 상황이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했는데 순수함, 순진함 등이 많이 묻어나서 연민이 느껴진다면 호감으로 변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들이 재밌어야 한다. 진지하게 풀기보다 좀 더 재밌게, 좀 더 가볍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Q. 혹시 연기를 하고 나서 생활 습관이 바뀐 것도 있나. 어찌됐던 몇 달간은 한정석으로 살았을 테니까 그 습관들이 남아 있을 것 같다.
정재영 : 할 때는 정말 신경 많이 썼다. 의상에 조금이라도 티가 묻으면 안돼서 뭐 먹을 때도 앞치마 하고, 매일 수염 깎고, 손발톱 수시로 확인했다. 또 옷에 구김이 가면 안 되니까 항상 반듯이 앉아야만 했다. 그 자체가 힘들고 괴로웠다. 그래서 끝나니까 평소 습관이 바뀌는 게 아니라 비로소 해방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나는 저렇게는 못 살 것 같다(웃음).
Q. 이번 작품에 가장 먼저 캐스팅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상배 여배우를 기다렸을 텐데, 한지민이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그리고 첫 호흡인데 어떤 배우였나.
정재영 : 감독님이 한지민 팬이다(웃음). 처음 만난 게 곱창집이다. 그것도 지민이가 장소 선택을 했다. 영화 속에 (곱창집 장면이) 나오니까 선택했나 싶었는데 단골집이라는 거다. 잘 몰랐을 때는 청순하고, 단아한 느낌이 있었는데 만나서 술 한 잔 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영화 속 소정의 모습이었다. 옛날에는 내성적이었는데 그러면 힘들어질 것 같아 바꿨다고 하더라. 성격이 참 좋다. 그런 부분은 내 성격과 비슷한 것 같다.
Q. 캐스팅만 봤을 때, 정재영과 한지민이 과연 어울릴까 싶었다. 주위에서도 이런 생각 많이 했을 것 같다. 뭔가 그림이 잘 안 그려졌는데, 영화를 보고 났더니 묘한 어울림이 있었다. 한지민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충분히 잘 보여준 것 같고.
정재영 : 내가 그렇다. 캐스팅 소식이 전해지면 대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안 맞을 것 같다는 둥, 요샛말로 ‘케미’가 맞을까 이런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까지 최상의 캐스팅이란 소리를 들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아는 여자’ 때도, ‘이끼’ 때도, ‘피도 눈물도 없이’ 할 때도 다 마찬가지였다(웃음).
Q. 하긴 ‘이끼’ 때도 유독 정재영만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좋은 평가를 끌어냈다.
정재영 : 기대를 안했을 수도 있고(웃음). 어떻게 보면 처음에는 최상의 캐스팅이란 소리를 못 들어서 속상할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장점으로 작용하는 건 어느 정도 이상이면 칭찬 받는다. 반대로 ‘와! 잘 맞겠는데’라고 기대를 많이 하면 그만큼을 해줘야 하니까.
Q. 이번에도 결과적으로 잘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을 것 같나.
정재영 : 그걸 어떻게 대답하나. 그건 심판을 보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손을 들어주거나 혹은 내릴텐데, 그 때 판단하는 거다. 잘 어울리게끔 노력하는 건 당연하다. 결과는 맡기는 수밖에 없다.
Q. 앞서 말했지만 묘한 어울림이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앙상블이라고 할까.
정재영 :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같은 그런 관계다. ‘아는 여자’도 그렇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여배우가 날 이끌어 준다. 뭔가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람을 깨우치는 거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순수한 캐릭터로 봐주는 것 같다. 보통 이하이기 때문에 좀 더 리얼리티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캐릭터나 과거 보다 둘 사이에 시너지가 중요했고, 그게 안 나면 실패한 게 되는 거다.
Q.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멜로 라인을 갖추고 있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다. ‘아는 여자’, ‘나의 결혼원정기’ 등 한참 올라가야 한다. 은근 멜로 기피 배우다.
정재영 : ‘아는 여자’에서도 이뤄진 건 없다. ‘나의 결혼원정기’는 희망만 보여주고, ‘김씨 표류기’는 뭔가 있을까 했는데 만나자 마자 손잡고 끝났다. 이번엔 뽀뽀까지 했다. 아마 다음 영화에선 진도가 더 나가지 않을까. 첫 장면부터 벗고 나온다거나(웃음).
Q. 성격상 진한 건 안 좋아할 것 같다.
정재영 : 맞다. 선택할 때 과한 건 자신이 없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취향이 들어가있다. 보는 것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더 나이 들어 좋아할 수도 있다.
Q. 그렇다고 키스신을 찍기 전에 문어다리를 먹었다고 들었다. 멜로를 너무 안해서 감 떨어진 것 아니냐(웃음).
정재영 : 그런 성격이다. 그런 걸 안 해봤으니까 아무 생각 없는 거다. 배려도 없고. (웃음). ‘우리 선희’ 할 땐 홍상수 감독님께 양치도 안했냐고 혼났다. 바로 칫솔 사와서 길거리에서 양치했다. 그리고 이건 키스신이 아니다. 살짝 1~2초다. (Q.그래도 문어다리는.) 하하.
Q. 극 중 한정석은 어린 시절 겪은 큰 충격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재영에게도 삶을 변화시킬 만한 큰 사건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정재영 : 누구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형제가 몇 명이냐에 따라서도 성격을 구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 첫째는 식탐이 없는 반면, 둘째는 견제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러 환경에서 오는 강박인 거다. 나 역시 분명 있을 거다.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면서 환경이 계속 바뀐다. 그에 따라서 미치는 영향도 다르게 된다. 예를 들면, 예전에 소속사 없이 혼자 일 할 때는 지금보다 더 부지런했다. 요즘엔 매니저도 있고, 다 나를 중심으로 맞춰준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지 않을 땐 더 게을러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일부러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주위를 구경하곤 한다.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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