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바비는 이야기와 멜로디를 콸콸 뿜어내는 창작의 샘터다. 모던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으로 시작된 그의 음악여정은 실로 다채롭다. 지금도 줄리아 하트, 바비빌 그리고 가을방학까지 삼색조의 음악활동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모든 노래를 혼자서 몽땅 부르려는 맹목적 욕심이 없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하지만 노래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적임자의 목소리를 통해 곡을 완성시키는 냉철한 판단은 비범하다. 계피는 그의 머리와 가슴에서 나온 멜로디와 스토리 전달자이고, 이는 혼성듀오 가을방학의 음악이 근사하게 갈무리되는 핵심적 요소다.

정바비의 본명은 정대욱이고 Bobby Chung이란 영어 이름도 있다. 그는 부산특별시 남구 대현동에서 음악과 상관없는 집안의 독자로 1979년 9월 25일 태어났다. 지금은 말 수가 적고 신중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는 주위가 산만하고 활발한 개구쟁이였다. 은근 웃기고 재미있었던 그는 쉽게 친구를 사귀는 친화력이 넘쳐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경북 포항으로 이사를 갔다.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왔다. 사춘기로 접어든 그는 활발했던 성격이 진중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즐겨 들었다. 처음 가요와 팝을 같이 틀어준 김기덕에서 팝을 주로 틀어준 배철수로 옮겨가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해 갈증을 느낀 그는 음악잡지를 탐독했고 PC통신의 음악 감상모임에 가입하는 진화과정을 거쳤다.


“라디오를 들으면 듣기 좋은 히트곡만 나오는데 음반을 사서 들어보니 히트 곡 만큼 다른 곡들은 좋지 않더군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음반에는 히트곡만 만들어 넣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정바비) 중1때 비틀즈 음악을 처음 들었다. “비틀즈는 화음이 많잖아요. 리드 멜로디만 듣다가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전혀 다른 화음 멜로디가 들리더군요. 같은 노래인데 다른 멜로디가 들려서 제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정바비)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이 만든 하이텔 통신의 메탈동 모던록 소모임 활동을 하면서 일렉트릭 기타를 독학으로 치기 시작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명덕외고로 진학했다. “저희 동네에 남녀공학은 거기가 유일해서 선택했습니다.(웃음)”(정바비) 고1때 밴드 언니네 이발관 멤버로 영입되었다. “밴드활동을 하니 담임선생님이 ‘대학에 못가도 된다’는 각서를 어머니에게 쓰라 했죠.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걸 막으면 부작용만 생기는 걸 아시는지라 써주셨어요. 저는 사교육도 받지 않았고 적어도 공부 문제로 걱정을 시켜드리지는 않았습니다.”(정바비) 그가 밴드 언니네 이발관에 들어갔을 때 멤버는 기타와 보컬 이석원, 베이스 류기덕, 드럼 김반장, 건반 류한길의 4인조 라인업이었다. 음악 특성상 건반보다 기타가 더 필요해 류한길이 나가고 정바비가 영입되었던 것. 1996년 고2때 정규 1집을 발표되었으니 그는 창단멤버인 셈이다.


이석원과 정바비는 뛰어난 창작자란 공통점이 있다. 음악적 갈등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솔직히 악기 연주에 자신이 많지는 않았어요. 당시엔 만들어놓은 프레이즈를 치는 정도인데 하나 만들어 놓으면 다른 걸로 가라고 해서 형이랑 많이 부딪쳤습니다. 처음부터 창작은 한 것은 아니고 1집에선 석원형이 가사와 멜로디를 썼고 저는 기타 리프 같은 편곡적인 것을 쓰기 시작했죠.”(정바비). 그는 직접적으로 이석원에게 음악을 전수받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을 배웠다고 한다. “제가 아는 석원형은 20대였고 지금은 40대인지라 조심스럽네요. 당시 석원형은 호불호가 정말 강했습니다. 음악 감상모임에서 3초 정도 음악을 듣고 별로라 생각하면 바로 스킵하는 강력한 취향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향을 받았죠. 이건 곡을 만드는 창작자의 태도인데 팝은 시작부터 청자의 귀를 사로잡아야 하고 처음이나 계속 들어도 좋아야 한다는 거죠. 인트로나 페이드아웃에서 정말 3-5초를 투자할 가치가 있으면 넣고 아니면 곧바로 노래로 들어가는 제 노래들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마스터링 작업 때, 보통 작곡자들은 더 들려지길 원하지만 저는 항상 여기서 끝내자고 합니다. 팝은 핵심 알맹이만 들려주고 3~4분 안에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정바비)



그의 창작 샘이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연세대 입학 후에 발표한 2집 ‘후일담’부터. 수록된 12곡 모두 그의 손길을 거쳤다. 음악전문가들이 가장 즐겨듣는 앨범 1위로 선정되었던 이 앨범은 각각의 드라마를 보는듯한 스토리와 시각적 사운드가 압권이다. ‘1집과 느낌이 다르다’는 이유로 발매 당시엔 외면 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가치가 배가되는 앨범이다. “2집을 내고 상황이 힘들었습니다. 막 결혼한 새신랑인 석원형은 커리어적으로 뭔가 보여줘야 할 시점이었는데 반응이 기대와는 달라 대내외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밴드를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정바비) 이후 언니네 이발관은 한동안 휴지기에 보낸 후, 2003년에야 3집을 발표했다.

2000년 밴드 ‘줄리아 하트’를 결성한 정대욱은 2001년 1집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정바비’란 예명을 사용했다. “활동을 별도로 하고 싶어 언니네이발관을 나온 건 아닙니다. 밴드의 활동이 소강상태였고 영국밴드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을 굉장히 좋아해 카피밴드하자고 가볍게 시작한 것이 줄리아 하트입니다.”(정바비) 이후 전혀 다른 질감의 비밀 프로젝트 음악활동을 벌인 그는 2004년 발표한 ‘Miss Chocolate’이 의류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폭넓은 음악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2005년 발표한 줄리아 하트 2집 [영원의 단면]은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 록 앨범’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2005년 컨트리 프로젝트 밴드 바비빌(Bobbyville)을 결성해 2집까지 냈다. ‘바비빌’은 가을 방학과 줄리아 하트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가사는 솔직한 우리의 자화상을 담아내 웃음 짓게 하고 컨트리 음악 특유의 명랑한 사운드는 푸근하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컨츄리 음악을 노래하는 밴드는 ‘바비빌’이 유일할 것이다. 쉼 없는 음악활동으로 지쳤던 정바비가 진로 고민을 했던 2008년 그랜드민트 페스티발에서 정바비와 계피는 처음 만났다. 2009년 가을 ‘가을방학’을 결성해 디지털 싱글 [3월의 마른 모래]로 존재를 알렸다. 2010년 계피가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브로콜리너마저 1집은 2010년 제 7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4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보편적 노래’가 최우수 모던 록 노래 부문을 수상했고 가을방학은 민트 페이퍼 컴필레이션 [Life]에 ‘취미는 사랑’을 발표했다.


2010년 가을에 발표한 정규 1집은 1년 여 동안 작업한 19곡 중 12곡을 담았다. 영화 ‘반칙왕’, ‘즐거운 인생’, ‘전우치’에서 음악감독을 했던 이병훈이 프로듀싱에 참여했다. 노랫말이 발휘하는 마법 같은 기능을 탐구해온 정바비의 상큼한 노래들은 계피의 목소리를 통해 가을방학 특유의 감성 브랜드를 제시했다. ‘취미는 사랑’,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속아도 꿈결’, ‘3X4′, ‘호흡 과다’등이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놀랍게도 1집은 2만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또한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와 ‘속아도 숨결’은 2013년 대중음악SOUND가 기획한 ‘한국 인디명곡 100선’에 당당히 선정되었다.

2012년 6월 앙상블 티미르호의 리더 김재훈과 함께 클래식 편성으로 [실내악 외출] 음반을 발표해 네이버 이주의 발견에 선정되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2013년 봄. 정규 2집 ‘선명’을 발표했다. 첫 곡 ‘좋은 아침이야, 점심을 먹자’부터 타이틀 ‘잘 있지 말아요’를 거쳐 마지막 곡 ‘가을 겨울 봄 여름’까지, 12곡들은 음악적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1집 커버가 모호한 두 멤버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2집은 포옹하는 남녀의 모습을 과감하게 담은 수채화 재킷이 시사적이다. 1집에 비해 킬러곡은 부족하지만 12현 기타, 페달 스틸기타, 만돌린과 전자 노이즈, 내레이션까지 다채로운 실험으로 음악적 진보를 이뤄냈다.


계피는 ‘헛것’에서 공동 작사에 참여했다. “음반을 여러 장 냈는데 녹음실에 많이 참여하고 의견을 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새로운 경험이었죠.”(계피) 삶이 혼란스런 디지털 세상에서 ‘선명’함을 찾는 것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음악 외에 과외나 알바 같은 다른 걸 해 본 적이 없어요. 대학 졸업 후 전업뮤지션이 됐는데, ‘먹고 살게 된’ 수준이 된 건 가을방학부터예요.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잘 된 팀과 운을 타지 못해 안 된 팀의 경계에 있다고 봐요. 모든 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뭔가 다른 요소가 있겠죠.”(정바비)


정규 2집을 통해 가을방학은 단발에 그치는 프로젝트가 아님을 분명하게 천명했다. 계속해서 두 사람의 근사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반가운 이야기다. “음반을 꾸준히 발표할 수 있는 팀이 되고 싶고 음반마다 기억에 남는 좋은 노래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정바비) 가을방학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2월 20일부터 이틀 간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 공연장에서 ‘다들 잘 지냈나요’라는 같은 타이틀로 연말공연을 연다. 치열하게 한 해를 달려온 우리들의 지친 심신에 힐링을 안겨주는 멋진 공연이 될 것 같다.

가을방학 프로필
정바비 연세대 인문학부 졸업. 계피 연세대 인문학부, 카이스트 문화기술 대학원 졸업
1995년 정바비 4인조 모던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 창립 멤버
2000년 정바비 3인조 밴드 줄리아 하트(Julia Hart) 결성
2005년 정바비 컨트리 프로젝트 밴드 바비빌(Bobbyville) 결성, 줄리아 하트 2집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 록 앨범’ 부문 후보, 계피 4인조 모던록 밴드 브로콜리너마저 창립 멤버
2009년 혼성듀엣 가을방학 결성
2010년 계피 브로콜리너마저 1집 제7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 노래, 최우수 모던록 음반, 노래 4개 부문 노미네이트. 최우수 모던록 노래 수상, 계피 프로젝트 밴드 우쿨렐레 피크닉 1집 참여
2012년 가을방학, 김재훈 [실내악 외출] 음반 네이버 이주의 발견 선정
2013년 대중음악SOUND 기획 한국 인디명곡 100선 가을방학 1집 ‘속아도 숨결’,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2곡 선정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스팽글뮤직, 이정실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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