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영화<아이, 애나> 스틸.

샬롯 램플링이 고독녀(영화 <아이, 애나>)와 상류층의 도도한 마님(영화 <아이 오브 더 스톰>)을 오간다. 그녀는 여전히 왜곡된 욕망으로 몸부림친다.

지난 주, 꽃미남 간첩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극장을 완전 장악했다. 관객들이 이구동성으로 “꽃보다 간첩!”을 외치는 순간, 난 삐딱하게 아주 작은 영화와 함께 했다. 마치 세상의 흐름이나 트렌드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애나 아줌마에게 빠져들었다. 나의 선택은, 낯설고 이상한 이름을 지닌 버나비 사우스콤 감독의 <아이, 애나>였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 어떤 기대감을 갖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샬롯 램플링의 조금 특별한 연기가 보고 싶었다. 여기서 사랑 결핍에 시달리는 애나 캐릭터는 결국 폭력적인 마초남까지 죽이는 상황에 처한다. 그녀는 우연히 닥친 사고들을 감당하지 못하자, 급기야 현실감까지 잃어버린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굉장히 단조로운 이야기지만, 영화가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순전히 샬롯의 무게 때문이었다. 제목을 <아이, 샬롯>으로 고쳐주고 싶었다. 물론 다른 여배우가 이런 식의 연기를 하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위) <막스 내사랑><레밍>(아래 왼쪽부터) 스틸." />영화 <아이 애나>(위) <막스 내사랑><레밍>(아래 왼쪽부터) 스틸.

‘레전드’라는 애칭을 지닌 대배우 샬롯은 1946년 영국 스튜머에서 태어났다. 루치노 비스콘티의 <저주받은 자들>(1969), 릴리아나 카바니의 <나이트 포터>(1974), 레이몬드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화한 <안녕, 내 사랑>(1975) 등에 출연하면서 작가주의 영화감독들에게 유난히 러브콜을 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모 포털 사이트에서 ‘샬롯 램플링’을 검색하면, ‘개성파 배우로 문제작들에 많이 출연했다’라고 설명이 나온다. 하지만 이 문장 뒤에, ‘사실 그녀의 존재감 때문에 이 영화가 문제작이 되었다’라고 한 줄 추가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등장은 늘 강렬했다. 개인적으로는 우디 앨런의 <스타더스트 메모리즈>(1980)와 오시마 나기사의 엉뚱한 침팬지 영화 <막스 내 사랑>(1986)에 출연한 그녀를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저 외모만 놓고 보면, 그녀는 전설이 되기엔 다소 역부족일 수도 있다. 창백한 피부와 쌍꺼풀이 없는 눈(심지어 눈꼬리도 약간 쳐졌다)이 그녀의 외모적 특징이다. 이미 고전이 된 이 영화들에서, 그녀는 스톤 페이스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놀라운 무표정을 선보였다. 무표정이 이토록 빛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은 탓에, 급기야 그녀는 웃고 있을 때조차 무표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불나방을 모으는 마성의 힘일까? 일단 그녀에게 시선이 가면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2000년대 영화들에서 샬롯은 차디찬 얼음이었다. 흡혈귀적인 냉정함과 섬뜩함이 트레이드마크였다. 특히 샬롯 갱스부르와 호흡을 맞춘 <레밍>(2005)에서 갱스부르의 남편을 유혹하며 안락한 중산층 집안에 공포의 기운을 몰고 온다. <원초적 본능2>(2006)에선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샤론 스톤처럼 기괴한 섹슈얼리티를 지닌 여성처럼 보였다. 도도하게 치켜 뜬 눈 덕분에 그녀는 다소 무서운 존재로 군림한다. 남자들에게 거세 공포를 유발하는 블랙 위도우처럼 스크린을 움켜쥐었다. 이런 카리스마는 <멜랑콜리아>(2011)에서도 이어진다. 결혼식을 앞두고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어머니 게비로 등장한다. 딸의 결혼을 축하하기는커녕, 오히려 파티의 흥을 깨는 존재다. “난 결혼식이 싫다. 가능하다면 인생을 즐겨라!”라고 외치는 차가운 어머니다. 심지어 “겁나요, 엄마!”라고 고백하는 딸에게 “꿈 깨라, 저스틴!”, “우리 모두 무섭다”고 다그치며 사기를 꺾을 뿐이다. 딸의 사랑을 축복해 주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족 사이에서 남근적 어머니로 존재하며, 딸들의 사랑을 저주하는 마녀처럼 불행을 기다린다. 이런 영화들만 본 관객이라면 샬롯의 송곳처럼 날카로운 연기에 푹 찔렸을 수도 있다.

(왼쪽)<남쪽을 향하여>(오른쪽 위)<멜랑콜리아>(오른쪽 아래) 스틸." />영화 <아이 오브 더 스톰>(왼쪽)<남쪽을 향하여>(오른쪽 위)<멜랑콜리아>(오른쪽 아래) 스틸.

그렇다고 뾰족함이 전부는 아니다. 어느덧 60대 후반이 된 그녀는 최근 개봉한 <아이, 애나>와 <아이 오브 더 스톰>에서 노년의 슬픔을 담아내고 있다. <아이 오브 더 스톰>에선 상류층 가문의 엘리자베스로 등장한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늘 침대에 누워서 지내지만, 가끔씩 젊은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듯이 의식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 두 발로 일어서다가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 빛나는 존재다. 젊은 시절의 그녀는 폭풍이 지나간 후 망가진 섬을 거닐면서 삶의 기쁨을 만끽한다. 샬롯이 해변을 거니는 모습은 <남쪽을 향하여>(2005)와 슬쩍 오버랩이 된다. <남쪽을 향하여>에서 샬롯은 욕정의 화신 엘렌으로 등장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아이티가 무대다. 중년의 백인 여성들이 아이티의 소년들을 옆에 끼고 휴식을 즐긴다. 엘렌이 머무는 해변의 호텔은 성적 탈출구로 기능한다. 그녀는 당당하게 돈으로 소년을 구속한다. 소년의 알몸을 사진에 담으며 쾌락을 즐기지만, 끝내 소년을 잃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샬롯은 늘 자신의 욕망을 찾아 해변을 거니는 여배우로 각인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련하고 애틋한 발걸음처럼 깊은 주름살조차 아름답다. 세월을 머금은 주름은 배우의 심오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늙을지 몰라도, 여배우는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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