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대본을 읽는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유림이라는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됐어요. 눈물이 나고 호흡도 가빠지고 부들부들 떨리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어요.” 영화 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유선은 말했다. 고등학생 딸 은아(남보라)를 성폭행해 자살에 이르게 한 범인들이 정당한 처벌을 피해 가자 스스로 복수에 나서는 엄마 유림은 그가 과거 연기했던 사이코패스 살인마()나 속을 알 수 없어 서늘하고 섬뜩한 여인()과 달리 고통과 분노 앞에 이성을 잃는 평범한 인간이다. 복수의 쾌감에 초점을 맞춘 스릴러이기보다는 극도의 폭력과 2차 가해 앞에서 무너지는 주인공의 극단적 선택을 따라가는 영화 는 데뷔 11년차 배우인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감정 신이 많다 보니 미리 그림을 그리거나 계산해서 시연해 봐도 현장에서 100%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았어요. 최대한 자신을 믿고 감정의 흐름에 집중하는 방법뿐이었는데, 딸이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은 심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어요.”

“비중과 상관없이 작품 안에서 축이 되고 선을 긋고 힘 있게 각인시키는 역할에 매력을 느낀다”는 또렷한 표현처럼, 연기자로서 뿐 아니라 사회인으로서도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을 돌파해 온 그의 말들은 인생 선배의 충고로서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SBS 이나 현재 출연 중인 MBC 에서 함께 등장하는 단역 후배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똑같이 현장 나와서 스탠바이 하고 고생하는데도 왠지 집에 가는 발걸음이 쓸쓸하다는 거, 어떤 감정인지 너무 잘 알고 이해해요. 저 역시 데뷔가 늦은 편이었고, 절실함만을 가지고 헤쳐 나가기엔 힘든 순간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컷만 나와도, 군중 신에 나와도 근성 있게 욕심 있게 연기하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는 것 같아요. 그래야 누군가 기억했다가 다음에 나를 찾아주는 거고, 처음에 주어지는 큰 기회를 감당하지 못하면 그다음은 없는 거거든요. 배우에게 일을 잡아주는 건 매니저가 아니라 자신의 연기인 거죠.” 다음은 근성과 성실함을 무기로 자신의 자리를 넓혀 온 배우 유선이 추천한, 어머니와 자식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1. (Panic Room)
2002년 | 데이빗 핀처
“어떤 작품을 준비하기 시작할 때 ‘이 역할이 외국 배우 중에는 누구에게 잘 어울릴까’ 상상해 봐요. 그런데 의 유림 역에는 곧바로 조디 포스터가 딱 떠올랐어요. 스마트하고 이지적인 배우인 동시에 모성을 드러내 연기할 때는 정말 절박하고 강인한 엄마로서의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닫힌 공간에서 딸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 , 특히 에서의 흡인력 있는 연기가 기억에 남아요.”의 유림이 그랬듯 의 멕(조디 포스터) 역시 남편과 이혼한 뒤 딸 사라(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함께 새집으로 이사한다. 새집에는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는 동시에 생존을 위한 필수품까지 갖춰진 안전지대 ‘패닉 룸’이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거액의 돈을 찾아내려는 강도들의 침입으로 모녀는 위험에 빠진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는 조디 포스터의 눈빛만으로도 밀실 스릴러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작품.

2. (Goodbye Mom)
2009년 | 정기훈
“서로 대립하던 모녀가 엄마의 병을 통해 관계를 회복해가는 설정은 어떻게 보면 식상할 수도 있지만, 살아 숨 쉬는 캐릭터와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좋았어요. 영화에서 엄마가 딸의 직업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처럼 저희 어머니도 처음에는 제가 연기하는 걸 반대하셨거든요. 주위에서 말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려다 보면 가족에게도 보란 듯이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게 또 하나의 무게로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에 공감한 면이 있어요. 그 밖에도 모녀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접점이 참 많은 작품이라, 엄마와 딸이 겨울에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 ‘부산의 톨스토이’로 불릴 만큼 촉망받는 문학소녀였던 애자(최강희), 그러나 스물아홉 팍팍한 서울살이에 남은 것은 빚과 바람둥이 남자친구, 도무지 풀리지 않는 커리어뿐이다. 칼칼한 성품의 엄마 영희(김영애)는 괄괄한 성미의 반 백수 딸이 못마땅해 사사건건 부딪히곤 하는데, 이 애증 가득한 모녀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전환점을 맞는다. 억센 부산 사투리와 살가운 구석이라곤 없는 대화가 끈끈한 모녀간의 정에 리얼리티를 더하고, 웃음과 눈물의 배합 또한 훌륭한 작품.
3. (Mamma Mia!)
2008년 | 필리다 로이드
“메릴 스트립을 워낙 좋아해요. 그 나이에 이런 역할을 맡아 누리는 게 너무 부럽기도 하고,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캐릭터를 자유롭게 소화해 내는 모습이 정말 멋지거든요. 음악이나 영화 속 풍광도 아름답지만, 딸이 엄마의 옛사랑을 찾아 불러들여서 엄마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게 해 주는 설정이 특히 가슴 찡하게 아름다운 것 같아요.”

이미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메가 히트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시도는 종종 안타까운 결과를 낳곤 했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 콜린 퍼스, 피어스 브로스넌 등의 호화 캐스팅과 상상 속에 존재하던 그리스의 섬을 실제로 구현한 로케이션 등으로 영화 는 성공적인 뮤지컬 영화의 전당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4. (The Classic)
2003년 | 곽재용
“로맨스 영화를 자주 즐겨보지는 않지만, 이런 작품을 보면 잊고 있던 감성이 충전되는 느낌이 들어요. 딸이 다락방에 있는 비밀 상자를 보고 엄마의 사랑 추억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지금 자신의 사랑과 교차점을 발견하게 되잖아요. 우리는 평소 엄마가 내 나이 때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랑을 했을까 같은 것들을 궁금해 하지 않는데 이 영화에서는 엄마의 과거와 딸의 현재가 겹쳐지면서 엄마도 몇 십 년 전 나와 같은 사랑을 했다는 걸 알고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연극반 선배 상민(조인성)을 좋아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지혜(손예진), 시골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엇갈리게 되는 주희(손예진)와 준하(조승우)의 관계는 25년여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모녀에게 서로 닮은 사랑의 추억을 남긴다. 우연이 겹쳐진 운명적 사랑을 믿지 않는 이라 해도 조승우, 손예진의 풋풋했던 모습과 아련한 영상미에는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5. (Changeling)
2009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영화는 엄마와 딸이 아니라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지만, 안젤리나 졸리가 가진 존재감 자체를 굉장히 좋아해요. 섹시한 이미지가 주로 부각된 것과 달리, 이 사람만의 강렬한 에너지와 포스는 정말 흔치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에서는 섹시한 모습을 배제하고 아이를 잃은 엄마로서의 처절한 심정을 너무나 훌륭하게 연기했어요. 물론 첫 등장에서부터 특유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내면에 확 몰입해서 영화를 보게 됐어요.”

‘브란젤리나 커플’의 여신, 블록버스터 여전사 등 안젤리나 졸리의 대표적 이미지들은 주로 그의 스타성과 흥행 성적표에 기인하지만 은 이 배우가 가진 카드의 다양함을 증명한 작품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부당한 시스템에 의해 진짜 아들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맞서는 싱글맘 역할을 보란 듯이 소화해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독으로서 또 하나의 걸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얼마 전 을 봤는데 M 역의 주디 덴치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나이 들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데 그 세월의 흔적이 오히려 더 무기가 된다고 느껴질 만큼 강한 포스와 깊이가 느껴졌거든요. 우리나라에도 윤여정, 김해숙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시지만 외국에서는 그 나이대의 여배우들에게 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니까, 우리 또래의 여배우들도 계속 존재감을 잃지 않고 활동한다면 보다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연기를 직업으로 삼아 왔고 꾸준히 살아남은 유선은 ‘꿈’을 말하면서도 의지를 다시 다진다. 그가 쌓아 온 신뢰의 비결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글. 최지은 fiv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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