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습니다.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고, 빠져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KBS ‘거지의 품격’의 꽃거지 허경환에게 빠진 건 온전히 제 잘못이에요. 한 푼만 달라는데도 굳이 두 푼, 세 푼을 쥐어준 것도 저고요, 애써 그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 척 튕겨봤지만 결국 500원을 쥐어주며 이야기를 구걸한 것도 저고요.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해도 묘하게 빠져드는 거 있죠?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배 꺼지니까”라고 하면 진짜 몸을 움직일 수가 없고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이라고 말하면 저도 모르게 지갑에 손이 가요. 이 거지같은 사랑, 계속해야 되는 걸까요? (서교동에서 김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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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환이 잘생겨서 좋아하는 거 같죠? 만약 그런 거라면 ‘거지의 품격’에서 허경환의 친구들로 나오는 ‘잘생겼는데 심지어 키까지 큰’ 류근지와 서태훈을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허경환이 키가 작아서 더 눈길이 가는 거 같다고요? 그럼 환자분은 과거 김병만, 이수근, 황현희를 허경환 만큼 좋아하셨나요?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 지점이 바로 그겁니다. 허경환이 키가 작거나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당당한 남자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꽃거지로 나와도 환자 분들이 좋아하시는 거예요. 허경환이 언제 숨기거나 쑥스러워하는 거 보셨어요? 키가 작으면 작다, 돈이 없으면 없다, “요 정도 생겼으면” 잘생긴 게 맞다고 하잖아요. 본인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 ‘거지의 품격’에서도 예쁜 여자에게 고개 한 번 숙이는 법이 없어요. 오히려 여자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뻔뻔한 마력이 있죠. “고마워요? 고마우면 빵 조금만 주세요”라거나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이라는 말로 여자의 빵과 돈을 훔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자의 마음을 훔치는 거예요.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남자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내숭을 떠는 것 같다 싶으면 “귀여운 척 하지마. 네 눈동자에 노숙할 수도 있으니까” 혹은 “앙탈 부리지마. 네 사랑에 무전취식할 수도 있으니까”라는 “거지같은 멘트”로 여자를 블랙홀로 빠뜨립니다. 그리고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온 힘을 다해 추는 웨이브, 여자의 마음도 함께 요동칠 수밖에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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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요? 사소한 것에 위축되고 매사에 소심한 남자보다는 차라리 뻔뻔할지라도 자신감 있는 남자가 낫거든요. 자신의 단점을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것, 결코 쉽지 않아요. 심지어 그 위에 진짜 매력을 살포시 끼얹는 것, 웬만한 자신감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요, ‘네가지’의 허경환은 두 가지를 모두 해냅니다. 시작은 “트로트는 뽕짝! 비트는 쿵짝! 내 키는 납작!”이라며 자신을 깎아내리지만 마지막엔 위풍당당하게 “단화는 단시간에 신을 수 있는 신발”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는 말도 괜한 겸손입니다. 그 뒤에 오는 멘트 들어보세요. “이 정도 생겼으면 키는 작아도 여자들은 반할만 하잖아.” 설사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허경환의 힘 잔뜩 들어간 목소리를 듣고 나면 진짜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카메라 감독님들, 허경환의 상체만 찍어주세요. 풀샷으로 찍으면 아니 아니 아니되오!
앓포인트: 허경환의 [너무 웃지마! 배 꺼지니까]“나도 웃기는 개그맨 되려고 하고 있는데~”
미숙이와의 아련한 추억으로 시작했으나 박영진의 호된 구박으로 끝났던 유행어. 큰 맘 먹고 “에서 나만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라고 외쳐도 박영진이 곧바로 “에서 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라고 받아치던 서러운 시절, 그는 “결혼식 주례보다 더 지루한 놈”이라는 푸대접을 받았다. 그 때는 아무도 몰랐다. 이것이 허경환이 ‘봉숭아학당’을 살리는 개그맨이 되기 위한 발판이었다는 것을.
“박영진, 자이 자이 자슥아”
박영진의 구박에 주눅드는 허경환은 갔다. 박영진의 옆자리에서 쭈뼛쭈뼛 기어나오던 허경환도 갔다. 이젠 박영진이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고작 두 걸음 정도 물러설 뿐이다. 오히려 박영진을 뒷걸음질치게 만드는 멘트를 거침없이 날린다. “이자슥이 배때지 한 대 처맞고 토 한 번 해봐야 아~~ 내가 오늘 점심에 먹은 김밥에는 햄이 없었구나 할끼야.” 어제 받은 구박을 오늘 두 배로 앙갚음해주는 것, 통쾌한 복수란 바로 이 맛 아입니까!
“서울말은 끝말만 올리면 되는 거 모르니↗?”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다. 촌스럽게 먼저 와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상국이, 솜사탕부터 ‘뚫어뻥’까지 온갖 물건이 든 가방을 메고 상경한 정남이가 ‘와플’이 맞니 ‘와블’이 맞니, ‘피부 트러블’이 맞니 ‘비부 드러블’이 맞니 한심한 서울말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허경환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등장한다. 턱선에 닿을 정도로 한껏 세운 옷깃과 한 손을 높이 든 채 “상국이 정남이, 오래 기다렸니↗?”라고 건네는 하이톤 인사말은 이제 서울사람이 다 됐다는 증거다. 물론, 그런다고 키가 더 커 보이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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