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을 때마다 는 상반기 기대작에 대한 기사를 준비해왔다. 하지만 2012년 올해의 첫 ‘10 포커스’는 지구 종말에 대한 기획이다. 단순히 지난해부터 2012년 종말론이 유행해서가 아니다. 신작에 대한 기사는 상반기 혹은 새해에 무언가 좋은 게 나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현재의 종말론은 그런 가까운 미래에 대한 기대 혹은 희망을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는 기대작 분석이건 트렌드 예측이건 이 현상에 대한 진단 이후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재 종말론이 과거의 그것과 다른 이유에 대해 질문해보았다. 그리고 종말 앞에서 동시대의 사람들이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무엇인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공개하며, 지구 멸망에 대한 가상의 시나리오를 더했다. 부디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백신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2012년 새해 첫날 미국 아칸소에서는 수천마리 검정지빠귀가 의문의 떼죽음을 당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청어 수만 마리의 시체가 해변 위에 떠올랐다. 5125년을 한 주기로 계산하는 마야 달력에서 그 주기가 끝나는 날은 2012년이다. 중국의 주역을 수리적으로 분석한 그래프는 2012년에 0이라는 수치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모든 현상은 영화 에서 보여준 것처럼 2012년 지구 종말에 대한 징조이자 예언인 걸까.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사실 그 결과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예상하기 어려운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대격변이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난 것이고 그래서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일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종말에 대한 예언을 비롯해 종말에 대한 서사는 전부터 있어왔다. 요한계시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묵시문학은 종말론의 색채가 강하며, 메시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는 천년왕국에 대한 서사 역시 한 시대의 끝을 전제한다. 1992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휴거는 이러한 종말 서사를 이용해 대중의 공포를 자극했던 저열한, 하지만 제법 성공한 사기극이었다. 한국의 모 종교단체는 여전히 개벽사상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 같은 명사가 믿음을 보이고, 일본 대지진 같은 커다란 재해뿐 아니라 큰 벌이나 이상한 모양의 구름만 토픽에 등장해도 지구 멸망의 징조가 아니냐고 설레발을 떠는 2012년의 반응에 비하면 노스트라다무스도, 휴거도 농담처럼 느껴질 뿐이다. 대체 지금 이곳의 무엇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종말에 대해 말하게 하는가.최근 개봉한 영화 에서 핵전쟁으로 멸망을 경험한 후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자는 커트 헨드릭스의 계획은 그래서 흥미롭다. 여기서 핵전쟁은 일종의 종말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전제되는 것은 인류가 더는 진보할 수 없다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진단이다. 70억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고 있지만 한쪽에선 과식으로 다이어트가 필요하고 한쪽에선 기아에 허덕이는 지구적 부조리에 대해서는 모두가 전부터 알고 있다. 다른 건, 인류의 지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유명한 저서 을 통해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두 체제가 지구를 지배하며 더는 새로운 시스템이 역사에 등장하지 않으리라 예견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체제가 된 2011년의 한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모습을 볼 때 그의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더는 진보하지 않을지도 모를 역사의 끝이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말론, 대형 이벤트 혹은 지금 가장 힘 있는 픽션
시장 경제 체제 하에서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누군가가 아침 대용으로 바나나를 먹기 위해 코스타리카 북도 지역의 수많은 조류가 사라지고, 그 누군가 역시 우림을 파괴한 대가로 대기오염에 시달려야 한다. 물론 이 역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다른 건, 과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것들을 자정하고 관리할 수 있으리라 했던 믿음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구의 전체 생물권을 재현한 일종의 소(小)지구를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1990년대 초의 ‘바이오스피어 2’ 실험 중 인공지구의 산소는 고갈되었고 24개 척추동물 종 19종이 곧 멸종했으며 자연적 병충해 활동 없이 개미와 바퀴벌레 등이 창궐했다.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인 건 증명된 지 오래지만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단 한 번도 증명되지 못했다. 파생상품 때문에 일어난 미국발 금융위기로 겪은 세계경제의 혼란조차 시장 경제가 일으킨 환경 파괴에 비하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더 큰 문제는 눈앞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즉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도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예 민주주의의 룰조차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는 한국은 별개로 치더라도 2005년 파리 폭동에선 특별한 목적 없는 대규모 군중 폭력이 벌어졌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인가? 선택의 자유가 있는 사회라고 하지만, 강제로 정해진 민주적 합의에 대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맹목적인 행동의 표출뿐인 이 세상은?’ 그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도 소외와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체제에 대한 저항은 유토피아적 전망 없이 의미 없는 폭력의 발산으로밖에 나타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진보, 그리고 역사 발전의 서사가 무너진 시대에 역사 이후의 유토피아에 대한 서사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의 핵전쟁은 심판 이후의 유토피아 재건이라는 점에서 예수 재림 후 열리는 천년왕국의 서사와 거의 동일하다. 물론 최근 유통되는 종말론이 멸망 이후의 재건을 약속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은 현재가 앞으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종말은 비루하게 쳇바퀴 도는 삶을 종결지을 대형 이벤트처럼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요컨대 종말론은 지금 가장 힘 있는 픽션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건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를 종말이 아닌 현재의 무력감이며,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건 노아의 방주가 아닌 종말론보다 매력적이고 창의적인 진보의 이야기다. 종말 앞에서도 희망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 한 그루의 사과나무 이야기처럼.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2012년 새해 첫날 미국 아칸소에서는 수천마리 검정지빠귀가 의문의 떼죽음을 당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청어 수만 마리의 시체가 해변 위에 떠올랐다. 5125년을 한 주기로 계산하는 마야 달력에서 그 주기가 끝나는 날은 2012년이다. 중국의 주역을 수리적으로 분석한 그래프는 2012년에 0이라는 수치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모든 현상은 영화 에서 보여준 것처럼 2012년 지구 종말에 대한 징조이자 예언인 걸까.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사실 그 결과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예상하기 어려운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대격변이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난 것이고 그래서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일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종말에 대한 예언을 비롯해 종말에 대한 서사는 전부터 있어왔다. 요한계시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묵시문학은 종말론의 색채가 강하며, 메시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는 천년왕국에 대한 서사 역시 한 시대의 끝을 전제한다. 1992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휴거는 이러한 종말 서사를 이용해 대중의 공포를 자극했던 저열한, 하지만 제법 성공한 사기극이었다. 한국의 모 종교단체는 여전히 개벽사상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 같은 명사가 믿음을 보이고, 일본 대지진 같은 커다란 재해뿐 아니라 큰 벌이나 이상한 모양의 구름만 토픽에 등장해도 지구 멸망의 징조가 아니냐고 설레발을 떠는 2012년의 반응에 비하면 노스트라다무스도, 휴거도 농담처럼 느껴질 뿐이다. 대체 지금 이곳의 무엇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종말에 대해 말하게 하는가.최근 개봉한 영화 에서 핵전쟁으로 멸망을 경험한 후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자는 커트 헨드릭스의 계획은 그래서 흥미롭다. 여기서 핵전쟁은 일종의 종말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전제되는 것은 인류가 더는 진보할 수 없다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진단이다. 70억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고 있지만 한쪽에선 과식으로 다이어트가 필요하고 한쪽에선 기아에 허덕이는 지구적 부조리에 대해서는 모두가 전부터 알고 있다. 다른 건, 인류의 지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유명한 저서 을 통해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두 체제가 지구를 지배하며 더는 새로운 시스템이 역사에 등장하지 않으리라 예견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체제가 된 2011년의 한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모습을 볼 때 그의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더는 진보하지 않을지도 모를 역사의 끝이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말론, 대형 이벤트 혹은 지금 가장 힘 있는 픽션
시장 경제 체제 하에서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누군가가 아침 대용으로 바나나를 먹기 위해 코스타리카 북도 지역의 수많은 조류가 사라지고, 그 누군가 역시 우림을 파괴한 대가로 대기오염에 시달려야 한다. 물론 이 역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다른 건, 과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것들을 자정하고 관리할 수 있으리라 했던 믿음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구의 전체 생물권을 재현한 일종의 소(小)지구를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1990년대 초의 ‘바이오스피어 2’ 실험 중 인공지구의 산소는 고갈되었고 24개 척추동물 종 19종이 곧 멸종했으며 자연적 병충해 활동 없이 개미와 바퀴벌레 등이 창궐했다.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인 건 증명된 지 오래지만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단 한 번도 증명되지 못했다. 파생상품 때문에 일어난 미국발 금융위기로 겪은 세계경제의 혼란조차 시장 경제가 일으킨 환경 파괴에 비하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더 큰 문제는 눈앞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즉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도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예 민주주의의 룰조차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는 한국은 별개로 치더라도 2005년 파리 폭동에선 특별한 목적 없는 대규모 군중 폭력이 벌어졌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인가? 선택의 자유가 있는 사회라고 하지만, 강제로 정해진 민주적 합의에 대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맹목적인 행동의 표출뿐인 이 세상은?’ 그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도 소외와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체제에 대한 저항은 유토피아적 전망 없이 의미 없는 폭력의 발산으로밖에 나타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진보, 그리고 역사 발전의 서사가 무너진 시대에 역사 이후의 유토피아에 대한 서사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의 핵전쟁은 심판 이후의 유토피아 재건이라는 점에서 예수 재림 후 열리는 천년왕국의 서사와 거의 동일하다. 물론 최근 유통되는 종말론이 멸망 이후의 재건을 약속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은 현재가 앞으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종말은 비루하게 쳇바퀴 도는 삶을 종결지을 대형 이벤트처럼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요컨대 종말론은 지금 가장 힘 있는 픽션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건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를 종말이 아닌 현재의 무력감이며,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건 노아의 방주가 아닌 종말론보다 매력적이고 창의적인 진보의 이야기다. 종말 앞에서도 희망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 한 그루의 사과나무 이야기처럼.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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