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 범람의 시대, 콘텐츠 홍수의 시대다. 시청률과 영향력 측면에서 공중파 3사가 여전히 방송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영원한 왕좌는 없는 법이다. 이미 tvN 와 는 공중파 이상의 파급력을 선보인 바 있으며, Mnet 시리즈는 동시간 시청률을 통해 이미 공중파를 능가하는 저력을 입증했다. 시청률을 떠나서 공중파의 한계를 돌파해 자유롭고 참신한 창의력을 발휘한 프로그램들도 속출했다. 그러나 방송사별로 연말 결산을 치르는 공중파와 달리, 케이블 채널들에게는 연말 행사가 없다. 일 년 내내 24시간 시청자들과 함께했던 케이블 방송들을 위해 가 ‘Cable Jesus Awards’를 준비했다. 간단한 선정 이유뿐이지만, 트로피 못지않은 응원이 되기를, 그리하여 내년에도 TV 마니아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를.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순정만화의 트루기를 이해하는 드라마는 처음이었다. tvN 는 계급 문제와 성장 서사라는 소재가 눈앞에 있음에도 이것에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명랑한 순정만화의 분위기를 밀어붙인 최초의 작품이었다. 인물들은 언제나 사랑을 위해 움직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특유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 거의 매 회 등장한 패러디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적당한 속도감으로 이질감 없이 녹아들었으며, 이야기의 진행과 어울려 선택되었던 배경 음악들은 발군이었다. 메시지에는 위선이 없고, 갈등에는 위악이 없었다. 욕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 한 연출 덕분에 우리는 순정드라마라는 장르의 탄생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스토리는 빈틈없는 설계도처럼 구성했으나 범행과 범인에 대한 판단은 철저히 열어놓았다.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한 현대인들, 돈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는 현대사회를 향해 날카롭고도 안쓰러운 시선을 담아낸 OCN 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범인을 밝혀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되 그것이 결코 범행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진 않도록 설정했다.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흑백논리를 경계한 채 사람과 시대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는 대본이었다. 묵직한 메시지가 힘을 잃지 않고 우리 곁에 당도할 수 있었던 건 끝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은 펜대 덕분이다.

MBC 의 장준혁과 KBS 의 이강훈처럼, 의학드라마나 수사물에 등장하는 천재들은 늘 차갑고 까칠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외골수 타입이었다. 그러나 OCN 의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법의관 사무소 촉탁의 한진우는 꽉 막힌 모범생이 아니었다. 은근히 능글맞고 적당히 허세까지 있는 한진우는 동료들의 구박에 “에헤이, 거 참”이라는 추임새를 넣다가도 부검 과정을 지켜볼 때는 매의 눈빛으로 변했다. 자칫 잘못하면 허공에 붕 떠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류덕환은 자연스럽게 여러 개의 얼굴을 꺼내들면서 법의관 사무실의 차가운 공기마저 유쾌하게 바꿔놓았다. 한진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괴짜이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로 만들어놓은 건, 자신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류덕환의 균형 감각이었다.


두 미남 사이에서 갈등하는 평범한 여자. 의 양은비는 의 정한경과 닮아있다. 그러나 갈팡질팡하는 정한경이 미남들을 위한 배경이었다면, 양은비는 그 우유부단함 자체를 하나의 욕망으로 표현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그래, 내가 좀 헤프지”라고 말 하는 장면은 수동적인 여주인공 클리셰와 그런 여주인공들에게 주체적일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 모두의 뒤통수를 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청아는 노련하고 능숙하게 양은비라는 새로운 타입의 여주인공을 다듬어 나갔다. ‘소심하고 변비가 심한 취업 준비생’이라는 연애 바깥의 특징들은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장면에서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배우의 힘으로 생생하게 살아났으며, 그 덕분에 사랑 또한 일상 속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다. 비현실적인 캐릭터들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준 것 역시 칭찬할 부분이다.


5회는 백화점에서 등산복을 사는 백도식으로 시작해 범인을 잡느라 등산복이 찢어진 백도식으로 끝났다. 특수사건전담반의 수사를 지휘하는 건 여지훈 팀장일지 몰라도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건 백도식 형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도식이 경험들로 다져진 직감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간 수많은 작품에서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낸 김상호 역시 가볍게 툭 던지는 대사 한 마디만으로도 주변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 범인을 잡는 직감과 배꼽을 잡는 개그감. 김상호는 타고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물적 감각으로 의 운전대를 꽉 잡고 있다.

“조연의 인생은 없다”는 조혜련의 말은, 슬프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배우 임서연이 연기한 tvN 의 변지원만큼은 이러한 공식에서 벗어나는 조연이었다. 변지원은 이영애에게 애인이 생기면 함께 축하해주고 실연당하면 같이 욕하고 복수해주는, 전형적인 주인공 친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변지원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었다. 직장상사 윤서현과 러브라인을 만들어냈고, 지저분한 반 지하 방에서 소주를 마시며 가진 것 없는 30대 여성의 서글픈 인생을 보여줬다. 더 이상 김현숙과 이영애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것처럼, 어느 순간 변지원과 임서연의 경계도 흐릿해졌다. 하다못해 “으이구 이년아”라는 위로 한 마디조차도 임서연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듣기 거북한 욕으로 들렸을지 모른다. 그렇게 임서연은 변지원의 인생을 차곡차곡 완성해나갔다.


“쥰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목사의 양자라니, 비교 할 대상이 없다. 게다가 천진난만한 주제에 의리파이자 순정파인 김바울은 도무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 리얼리티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박민우는 계산하지 않은 에너지와 빌려오지 않은 패기로 김바울의 싱싱함을 선뜻 그려냈다. 신인 특유의 오버액션이 오히려 미덕으로 활용된 드라마를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흔적이 엿보이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 것은 행운을 경력으로 정리하기 위한 배우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투박하지만, 그래서 박민우에게 기대를 보낸다. 적어도 박민우의 등장은 ‘쥰내’ 신선하고 흥미로웠으니까.


결국 CH CGV 은 방자의 성공도, 몽룡의 실패도 아닌 변학도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였다. 덕분에 신분에 관한 게임으로 구성되었던 인물들의 관계는 순애보를 중심으로 한 애정관계로 재해석 되었고, 영화의 긴장감은 드라마 안에서 한층 희석되었다. 그러나 향단이만은 여전히 팽팽하고 발칙했다. 순박한 촌부의 모습으로 춘향의 곁을 지킬 때와 저돌적으로 몽룡을 유혹할 때 향단이 보여주는 눈빛의 간극에는 몽룡과 변학도가 잃어버린 일종의 광기가 있었다. 다만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해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인물 안에서 가장 큰 변신의 폭을 보여주려 애썼고, 그것이 상당부분 성공했다는 점에서 민지현은 용감한 배우다.

케이블 자체제작 드라마의 역사는 로부터 시작되며, 의 중심에는 김현숙이 존재한다. 만약 그가 다른 작품의 날씬한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일부러 살을 뺐다면 우리가 를 아홉 번이나 만날 수 있었을까. 김현숙이 극 중 장동건 과장과 잘 안 되는 상황을 연기하고 나서 실제로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영애의 삶을 사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점점 영애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는” 몰입의 경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여성 시청자들이 영애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을까. 시즌을 거듭하며 원준이 하차하고, 산호가 투입되고, 영민이 다른 배우로 교체되고, 영채가 유학을 다녀오는 동안 영애는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김현숙도 영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 tvN이 평일에도 과감하게 자체제작 드라마를 편성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국 드라마인 을 발 빠르게 수입한 OCN의 눈썰미는 대단했다. 그러나 셜록 홈즈 시리즈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브라운관에 집중하게 만든 이 시리즈의 예고편은 대단할 뿐 아니라 대담한 한 수였다. 구구절절한 설명은 과감히 생략하고 셜록과 왓슨의 대사를 교묘하게 편집한 뒤 멜랑콜리한 배경음악을 삽입한 이 예고편은 원작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구현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시리즈의 팬들이 은밀하게 공유하는 정서에 호소하는 영리한 연출이었다.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것은 물론, 출연배우이자 작가인 마크 개티스는 트위터를 통해 이 영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드라마 홍보로 채널 홍보도 톡톡히 했다. 선순환 구조란 이런 것이다.

글. 윤희성 nine@
글. 이가온 thirte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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