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1960년대 초, 베를린 장벽에 둘러싸여 있던 동독에서 태어났고 이십대에 미군이었던 애인을 만났다. 결혼해 미국으로 가기 위해 무허가 성전환 수술을 받지만 실패한 수술의 흔적으로 성기 1인치가 남았고, 남편은 그를 떠났다. 몸 파는 일과 아기 보는 일로 먹고 살았지만 그는 절망과 자기연민 대신 음악을 통해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삶은 “그래서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아니다. 나약하고 이기적인 십대 남자아이는 그의 ‘1인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떠났고, 자신의 이름으로 그의 음악을 팔아 성공한다. 분노와 배신감, 미련으로 이루어진 재회에서 둘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확인하지만,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소년은 다시 그를 짓밟는다. “모르는 여자다. 여자가 아닌 것도 몰랐다”
이 기이한 이야기는 5월 초 국내에서 여섯 번째 시즌의 막을 올린 뮤지컬 의 내용이다. 1994년 미국 뉴욕의 한 드랙퀸 클럽에서 발표된 짤막한 쇼에서 출발, 어느덧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은 한국에서도 2005년 초연 이후 30만 명에 이르는 관객을 만났다. 독일 동베를린, 성별이 모호한 육체, 요란한 가발과 화장으로 치장한 중년의 록가수를 키워드로 가진 은 2000년대의 한국과 조금도 접접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 특히 젊은 여성 관객들은 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뮤지컬 시장의 주요 소비층이 2, 30대 여성 직장인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은 캐릭터 자체가 스토리이자 치유와 구원의 아이콘이며, 그것은 한국의 여성들에게 나라와 성별과 취향을 뛰어넘어 독특한 공감을 선사한다.
이성애자 남성을 제외한 모든 성에 가해지는 폭력성
지구상의 ‘문명화’된, 혹은 전쟁이나 내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 않은, 혹은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낀 나라 중 한국은 여성이 살아가기 유독 힘든 나라다. 신문에는 여성 대상 살인, 강도, 강간 사건 기사가 이어지고, 거리에 나가면 직장 상사를 비롯한 온갖 ‘갑’들의 성희롱과 젊은 여성만 골라 위협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걸인까지 다양하고도 무수한 폭력이 일상 속에서 태연하게 고개를 내민다. 인터넷에는 ‘된장녀’에서 ‘보슬아치’에 이르는, 젊은 여성들을 악의적으로 매도하고 성적으로 비하하는 단어들이 포털 사이트의 댓글란과 인터넷 게시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린다. 헤드윅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정체성 때문에 사회로부터 배척당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성애자 남성을 제외한 모든 성, 여성과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이 모두 그들의 ‘性’을 향한 전사회적 관음증과 폭력에 시달린다.MBC 에서 구애정이 ‘비호감 연예인’으로 찍힌 뒤 겪는 일은 한국에서 여성이 어떤 종류의 정신적 폭력에 시달리는지 보여준다. 구애정은 ‘비호감’이라는 이유로 온갖 루머에 시달리고, 심지어 ‘걸레’라는 비난까지 듣는다. 구애정은 “그냥 일반 직장생활을 십년 정도 했으면 입사 초에 동료랑 다투거나 사내연애 한 번 한 거 가지고 아직까지 씹히진 않겠지?” 라며 한탄한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실수를 하지만 연예인의 사랑은 ‘스캔들’이고, 실수는 ‘사회적 논란’이 된다. 인터넷 매체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대중’ 혹은 게시판 아이디로 인용되는 몇 명의 ‘시청자’를 등에 업고 이를 문제 삼거나 부풀린다. 가십이 중요한 뉴스로 대우 받으며 포털 사이트를 휩쓸고, 대중을 지배한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인격과 삶 자체가 부정되고 조롱당하는 것을 본다. 그 중에서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모독의 수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동시에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진다.
잔인한 5월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
드라마 속의 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24일, MBC 스포츠플러스 를 진행하던 송지선 아나운서가 19층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근 그는 두산 베어스 임태훈 선수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사적인 문제들이 미니홈피와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고 기사화되며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송지선 아나운서는 순식간에 ‘추문에 휩싸인 여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고,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분야에서 일하는 행운을 얻었고, 그 일을 좀 더 잘 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의 죽음 뒤에나 관심을 얻었다. 유명인의 사생활에 대해 떠들고 조롱하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사생활일 뿐이고, 그의 공적인 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대중과 미디어는 송지선 아나운서의 일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드는 동시에 방송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시했다. 누군가를 사랑한 것 이상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한,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더 이상 그 세계에 남아있을 수 없을 것이 확실해진 서른 한 살의 여성에게 앞으로의 생은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을까.
송지선 아나운서가 사망한 다음 날, 그와 함께 를 진행해 온 동료 김민아 아나운서는 방송 말미에 “송지선 아나운서가 이제 함께 할 수 없게 됐습니다”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비극적인 소식을 전했다.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끔찍한 삶을 견딜 수 없었던 이들에게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럼에도 살아 있어주면, 지금 그 고통의 순간을 조금만 더 견뎌주면, 우리와 함께 있어주면 고맙겠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 그런 말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이라도 가졌다면 좋겠다. SNS, 가십 기사, 악성 댓글에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정체성의 사람을, 약자를, 여자를 얼마나 천박하고 폭력적으로 대했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세상에서 나는 과연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잔인한 달 5월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사진제공. 쇼노트
글. 최지은 five@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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