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꽉 찬 지하철. 서 있는 임산부를 보고 자리를 양보할까 망설이는 남학생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마음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행동은 보인다.” 길게 이어진 계단. 허리에 손을 짚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를 남학생이 지켜본다. 그리고 흐르는 내레이션. “생각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배려는 보인다.” 마음과 생각보다 행동과 실천을 제안하는 AC 재팬의 CF다. 캠페인임에도 딱딱한지 않은 문구가 30초 만에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실제로 시청자들 사이에서 호평이 많았던 작품이다. 인사로 활기찬 하루를 살자는 메시지를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발랄하게 연출한 ‘인사의 마법’ 편도 화제 만발이었다. 템포를 빠르게 조절한 리믹스 버전까지 나오며 네티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1974년 공중도덕, 매너 개선을 위해 설립된 공공광고기구 AC재팬의 CF는 항상 좋은 평가가 많았다. 적절한 상황 제시와 발전적인 제안이 일본인들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다르다. 동북대재앙 이후 AC 재팬의 CF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AC 재팬은 끝내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AC 재팬이 뭐길래

상황은 이렇다. 동북 지역 대지진으로 주요 방송사의 프로그램들은 자연스레 결방됐다. 그 자리는 재해 관련 뉴스 프로그램으로 채워졌지만 프로그램 사이를 메우던 CF는 애매한 처지가 됐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패닉 상황에서 코미디언, 가수가 나와 햄버거를 먹고 쇼핑을 하자는 광고는 갈 길을 잃은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숙의 의미로 각 방송사에 CF 중지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이 AC 재팬의 CF들이다. AC 재팬은 미디어를 통해 공공광고 활동을 벌이는 공익단체로 일본 내 1204사의 기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모든 활동은 회원들의 회비와 기부금으로 이루어지며 광고 역시 그 돈으로 제작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기에 AC 재팬의 캠페인 광고들이 지진 이후 방송이 중단된 상업광고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일본 CM총연구소 발표에 의하면 3월 11일 지진 발생부터 각 방송사가 CF를 재개한 3월 16일 아침까지 전파를 탄 8173개 CF 중 77%가 AC 재팬의 것이었다. 이게 문제였다. 지진 속보, 원전 관련 뉴스를 듣기 위해 TV를 켠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AC 재팬의 캠페인에 지쳤다. AC 재팬 홈페이지, 전화로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AC 재팬은 3월 17일 홈페이지에 사죄문을 올렸다. 인터넷에는 AC 재팬의 메시지를 조롱하는 패러디 영상도 나왔다. AC 재팬은 이후 방송되는 CF에서 마지막 로고의 사운드를 삭제하고, 재해 복구 응원 CF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위기 상황에서 광고가 취해야할 자세

AC 재팬 CF에 대한 불쾌감은 CF 출연자에게까지 번졌다. AC 재팬이 지진 복구 응원을 위해 제작한 CF ‘일본의 힘을 믿는다’ 편에 출연한 토타스 마츠모토는 셔츠의 버튼을 푼 채 출연했다는 이유로 원성을 들었고(결국 이 CF는 버튼이 잠긴 버전으로 교체됐다), m-flo의 VERBAL은 “어울리지 않는 수트 모습”, “공무원인 줄 알았다”, “누구? 이런 CF엔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 출연해야 하는 게 아닌가” 등 자신의 본래 모습보다 캠페인을 지나치게 의식한 차림새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호평과 감동을 자아낸 CF도 있다. 산토리의 ‘메시지 CF’는 사카모토 류이치, 야자와 에이키치, 다케우치 유코, 오구리 ㅅㅠㄴ, 오카다 마사키 등 일본의 유명 스타 71인이 출연 (上を向いて?こう), (見上げてごらん夜の星を)를 함께 부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CF는 시청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을 받으며 회자되고 있다. 유투브의 총 재생횟수는 70만회를 넘었다. 자연재해 앞에서 엔터테인먼트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무엇보다 시청자와 특히 더 가까운 CF는 그 위치가 미묘해진다. 좋은 의도도, 긍정적인 메시지도 상황에 따라서는 동정이나 위선처럼 다가갈 수 있다. AC 재팬의 CF를 둘러싼 일본 내 잡음은 고난과 역경 속 일본인들의 심난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엔터테인먼트가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글. 정재혁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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