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여 간 만나온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한 뒤,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붙잡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나, 여자한테 그게 안 느껴지는 사람이야. 너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여자한테도. 여자라는 사람들 자체에 그걸 못 느껴. 나는 그걸, 남자한테 느껴. 나 그래. 이성보다 동성이 더 좋을 수도 있는 십대나 이십대가 아니야. 정체성의 혼란 같은 거 겪고 넘어간 지 벌써 오래 전이야. 나는 내가 많이 싫고, 많이 슬펐었어. 항상 뭔가 남모르는 범죌 저지르고 있는 것 같고 저주받은 것 같고 그랬었어. 그게 내 실체야. 그래서 너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미안해.” 눈물이 그렁했지만 망설이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SBS 에서 양태섭은 그렇게, 커밍아웃했다.

말을 삼키는 대신 먹먹한 눈빛을 만들다

현역 최고령 김수현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주말 가족극, 삼대가 한 집에 모여 살며 벌어지는 사건과 소소한 일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는 지극히 전통적인 가족 드라마의 구조 위에 세워진 이야기지만 갈등의 중심에 선 커플이 남자와 남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2010년 대한민국에서 믿을 수 없는 수준의 파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동성애자를 비하하거나 희화화하지 않고 그들의 고뇌를 진지하게 응시하는 태도로 일부 팬들로부터 ‘선진국 드라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이 작품에서 송창의는 대가족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장손이자 남자를 사랑하는 내과의사 태섭을 연기한다.

대부분의 인물이 쉬지 않고 탁구공을 주고받듯, 혹은 총알세례를 퍼붓듯 제 할 말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쏘아대는 김수현 특유의 캐릭터로 이루어진 가족들 사이에서 태섭은 종종 입을 다물고 말을 삼킨다. 새어머니 민재(김해숙)가 ‘훌륭한 계모’였음을 인정하지만 복잡한 가족사보다도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은 “다르게 태어난 놈이란 것보다 세상을 속이고 있다” 는 성적 지향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를 만나기 전까지 “동성애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송창의는 태섭 역을 연기하기 위해 외적으로는 체중을 다소 줄이고 내적으로는 태섭이 지니고 살아왔을 상처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며 태섭의 먹먹한 눈빛을 만들어냈다. 드디어 끓게 된 물 같은 배우의 온도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조용히 침잠해 있다가도 연인 경수(이상우)를 만나는 순간 꽃처럼 활짝 피어오르는 태섭의 두 얼굴을 섬세하게 연기해내는 송창의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역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채영(유민)에 대한 연민, 경수(이상우)에 대한 애정을 각기 다른 표정과 시선, 찰나의 손짓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정상적이지 않은”것과 “일반적이지 않은” 것의 차이를 고민할 만큼의 깊은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시작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를 유연하게 오가며 활동하던 지난 9년간 송창의는 물과 같은 배우였다. 어쩌면 배우로서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를 담백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는 한 순간에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가슴을 지닌 엘리트 (SBS ), 정조와 로맨틱 코미디의 커플처럼 티격태격하는 정약용 (MBC ), 매 순간을 불사를 듯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트랜스젠더 록가수 (뮤지컬 ), 한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무너뜨린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검사 (SBS ) 등 그가 오랫동안 “하고 싶어서 했으니 내 스스로 멋지게 해 내면 되는 거”라 생각하며 무대에 서 왔던 순간들이 쌓여 지금 한국 드라마 사상 전무했던, 그리고 어쩌면 후무할지도 모를 캐릭터인 양태섭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100℃에서 끓고 있는 이 물은 깊은 만큼 좀처럼 빨리 식지 않을 것 같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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