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뭐하세요?” 길을 걷던 여중생들이 물었다.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담요를 머리에 포대기처럼 감고선 입으론 연신 “라라라-” 노래를 부르며 카메라 앞에서 춤추고 폴짝거리던 양익준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급기야 한 학생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야! 여기 어떤 아저씨가 머리에 담요 두르고 사진 찍고 있어!”라고 전파했으니 양익준을 모르는 학생도, 그가 누구인지 아는 인터뷰어와 포토그래퍼, 그리고 동행한 영화 홍보 담당자도 그 순간 공유했던 감정은 동일했을 것이다. ‘몰라, 뭐야. 얘, 무서워.’ 압구정동의 어느 허름한 놀이터에서 진행한 사진 촬영 중 벌어진 이 짧은 해프닝은 양익준이라는 사람의 독특한 포지션을 정확하게 말해준다. 냉정하게 말해 그는 오픈된 놀이터에서 사진을 찍어도 누군지 알아보는 이가 별로 없는 존재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리고 그럼에도 그가 이번 의 넘버원인 이유는, 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관심을 갖고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 유일무이한 그 무엇

아마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첫 퍼포먼스는 2009년 양익준이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 일 것이다. 이미 수많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한 마디 찬사를 첨언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한국사회와 가정에 고착화된 폭력을 소름끼치도록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과도 같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임순례 감독의 같은 작품이 있었지만 거친 폭력의 가해자 역시 더 크게는 폭력을 재생산하는 시스템 속의 피해자라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겁먹은 눈빛을 잡아냈다는 점에서, 는 그리고 양익준이 연기한 상훈이라는 캐릭터는 독립영화니 상업영화니 하는 구분 이전에 유일무이한 무엇이었다.

만약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 유일무이함은 일회적인 우연으로 치부됐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작품은 온전히 양익준이라는 창작자의 것이다. 일당백의 싸움 실력을 보여주는 조폭 영화의 주인공보다 입에 “씨발라마”를 달고 다니는 용역 깡패 상훈이 더 두렵게 느껴지는 건 그의 폭력과 욕설이 흉내나 관념이 아닌 날것 그대로이기 때문이었고, 이는 “지식으로 쌓은 게 아니라 내 경험치 안에서만 이야기 하는” 양익준의 표현 방식으로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는 “남들보다 독한, 구석으로 몰리는 경험”을 통해 한국사회에서의 폭력을 몸으로 체득한 어느 민감한 영혼의 몸부림 같은 것이다. 그에게 제 4회 미쟝센 영화제 배우상을 안겨줬던 단편영화 의 손원평 감독은 작품이 끝난 후 그를 “배우로서 좋은 예민함을 지닌 배우”라고 평가했다. 그 예민함은 다른 게 아닌, “감정을 만드는 과정이 남에게 보이지 않아서 침범 받고 상처 받는” 배우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귀찮게 하는 것을 감독에게 다 이야기”하는 태도다. 그는 상처를 참지 않고 그 환부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타입의 인간이고, 역시 그런 태도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힘의 서열이 우선되는 중고등학교 시기와 계급이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군대 안에서 지옥 같은 폭력을 경험했던 건 양익준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 이에 대한 고발을, 심지어 예술적 성취를 통해 해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양익준이 특별한 건 그래서다.세상 모든 엄숙주의에 날리는 ‘퍽큐’

어쩌면 사람들의 눈길을 끈 두 번째 퍼포먼스일지 모를 청룡영화제에서의 ‘퍽큐’ 사인은 “예전부터 충성, 아니면 받들어 총, 국기에 대한 맹세만” 요구하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시스템을 말 그대로 엿 먹이는 행동이었다. 시스템이 무서운 건, 의 영어제목인 ‘Breathless’ 그대로 숨 쉴 수 없는 답답한 하류 인생의 삶을 그려내는 작품조차 상이라는 이름으로 권위를 부여하고, 독립영화라는 이름으로 한정시켜 일종의 박제처럼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엄숙주의에 마치 알레르기 같은 즉각적인 거부 반응을 보인다. “머리 써서 하면 포기하는 게 많아요. 느껴질 때 하면 돼요.” 그의 이런 반응은 마치 영화 속 상훈처럼 무뢰배의 그것처럼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지만, 그 불편함은 강요된 화해 혹은 포섭을 잠시 유예시킨다. 즉 그가 의 성공에 대해 심드렁한 태도를 보일 때,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파괴력의 유통기한은 좀 더 늘어날 수 있다. 그가 지금 독립영화와는 거리가 먼 에서 주연을 맡은 사실은 그래서 통쾌한 일면이 있다.

을 찍었던 이하 감독, 그리고 다분히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배우인 지진희, 이문식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이 독립영화의 정신을 배신하는 행위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에게 중요한 건 “나와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인건비를 주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었을 뿐, 자신의 작업을 굳이 독립영화라 규정한 적은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단어가 아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다. 인디 문화의 새로운 대안처럼 소개되는 것에 염증을 느낀 그가 다른 무엇에 집중하기 위해 을 택한 건, 자신을 규정하려는 무리에게 다시 한 번 ‘퍽큐’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이것이 선택에서 그쳤더라면 그저 일회적인 제스처만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10년차 감독 지망생이자 잘 속고 잘 웃고 잘 웃는 동민 캐릭터를 심지어 잘 표현하며 상업영화의 주연배우로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의 기자 시사회에서 그가 보여준 상체 노출 퍼포먼스가 의미심장한 건, 비주류의 악동이 주류,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움직일 때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 예지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익준은 똥파리다. 권위적이고 때로 폭력적인 사자의 주위를 앵앵거리며 귀찮게 구는 똥파리. “인위적으로 4대강을 만들고 빌딩을 세우지만 정작 인간이 자유롭고 건강하게 사는 것에는 무심한”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그는 작고 하찮은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시상식에서, 시사회에서, 놀이터에서 거리낌 없이 미친 짓을 하는 똥파리가 사자입장에서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가끔 동료가 잡아먹혀도 자기 차례만 아니면 안심하는 초식동물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다. 앞으로 “영화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가 영화 바깥에서 보여줄 새로운 퍼포먼스가 기대되는 건 그래서다. 그가 불법다운로드로 의 수익 구조가 무너지는 걸 보며 경험한 “내가 고민하지 않으면 피해는 결국 나에게 온다”는 깨달음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여기서 연대의 가능성은 열린다. 과연 자유로운 날갯짓을 하며 앵앵거리는 이 똥파리는, 언젠간 떼를 이뤄 거만한 사자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릴 수 있을까.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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