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감독과 작가들로만 출연진을 구성한 토크쇼를 만든다면 장항준 감독은 그 주의 ‘강심장’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고정’ 한 자리쯤은 꿰찰 인물임이 틀림없다. 사십대 초반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군살 하나 없이 얄팍한 몸피를 한 그는 손짓발짓에 눈짓까지 동원해가며 수많은 이야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다. 좋아하는 드라마 MBC 에서 춘섭(최민식)이 영숙 어머니(남능미)를 상대로 ‘동물원 코끼리가 어린애 잡아먹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며 우겨대는 장면을 완벽히 재연하고, “정원에서 야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하필 대입을 앞두고 가세가 기운 사연, MBC 에 부실한 형제로 특별 출연하며 형 역의 윤종신과 “우리 나이도 먹고 애 아빤데 이래도 될까?” 하며 고민했다는 일화까지 그의 이야기는 종횡무진하며 듣는 이의 폭소를 자아낸다.
물론 그가 “영화과랑 비슷한 덴 줄 알고 갔던” 서울예대 연극과에서 신춘문예 당선을 꿈꿨지만 내내 연기만 하다 졸업한 뒤 스물일곱 나이에 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2002년 로 꽤 성공적인 감독 데뷔작을 내놓았음을 돌이켜본다면 여기에는 자유자재, 혹은 다재다능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옳을 것도 같다. 서른 살 백수, 다방 아가씨, 무명 배우 등 하나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인생으로부터 드라마를 이끌어내는 것이 특기인 장항준 감독은 보통 사람들을 관찰하며 아이디어를 얻는다. 최근 부인 김은희 작가와 공동집필한 tvN (이하 )에서는 평소 즐겨 흉내 내던 ‘성령 충만한 목사’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배철수 씨가 ‘사람은 나이 마흔이 넘으면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세상을 욕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우리가 만든 세상이잖아요. 의 인물들도 겉으로는 열심히 사는 서민들이지만 각자 구린 구석을 조금쯤 가지고 있고, 순수했던 복규(신하균) 역시 작은 실수로부터 점점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거든요.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 있고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을 그리고 싶어요.” 그래서 어느 다른 차원의 특별한 삶이 아니라 지상에서 복작이는 인간들의 일상을 꾸준히 들여다보는 장항준 감독이 자신에게 인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드라마들을 추천했다. MBC
1994년. 극본 김운경. 연출 정인
“김운경 선배가 를 쓰실 때 작가실에서 종종 뵙곤 했는데 1000자 원고지 뒷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대본을 쓰시고 한 신이 끝나면 박스를 딱 치고, 재밌는지 보라며 직접 읽어주시기도 했는데 드라마로 나온 것보다 대본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은 그 김운경이라는 작가가 가장 빛을 발했고 서민을 그린 드라마로 궁극의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에요. 김운경 선배야말로 ‘루저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죠. 그들을 등장시켜도 드라마가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요.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행복해지길 기대했고 그렇게 될 것 같았지만 홍식(한석규)의 죽음으로 깊은 여운을 남겼죠.”
MBC
1997년. 극본 김정수. 연출 최종수
“대가족에서 고지식한 장남, 운동만 하면서 동생들 군기 잡는 차남, 말썽 일으키는 막내딸,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며느리 등 구성원들의 캐릭터가 참 잘 살았어요. 박원숙, 양택조, 최불암 선생님의 앙상블도 정말 재밌었죠. 그런데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반은 엔딩이 차지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선장이었던 아버지의 소원대로 자식들이 바다에 새 배를 띄워드리고 ‘beyond the blue horizon’이 흘러나오면서 롱 테이크로 쭉 그 광경을 보여주는데, 이 현실적이라서 좋았다면 의 엔딩은 그동안 힘들게 평지풍파를 겪어 온 가족에게 가장 아름답고 희망적인 마무리라서 좋았어요.”
MBC
2007년. 극본 이기원. 연출 안판석
“제 작품을 쓸 때도 인물이 입체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올바르게 생긴 인물이 올바른 처신과 행동을 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어요. 그런 면에서 은 장준혁(김명민)이라는 인물 자체가 갖고 있는 입체감이 인상적이었어요. 고향에 있는 어머니를 신경 쓰기도 하고, 외로워하면서도 권력에서 밀려나고 싶지는 않고 결국 그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게 되는 복잡한 심리가 정말 잘 그려졌죠. 악인에게 느끼는 연민이 얼마나 큰 극적 시너지를 불러일으키는지를 느낀 작품이에요.”
“뭘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한 스타일이라 뭔가를 해야 해요.” 장항준 감독은 4월부터 또 새로운 장르에 뛰어든다. ‘감독, 무대로 오다’의 세 번째 주자로 그가 극본과 연출을 맡은 작품은 . 대중과의 타협은 쓰레기라고 생각하던 무명 감독이 생활고 때문에 재일교포 사업가 와타나베의 자전적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이 작품에서 그는 외골수로 살아온 한 남자에 대한 연민을 넘어 ‘무엇이 일류이고 무엇이 삼류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예정이다. 5월 중순에는 바람피우는 남편을 부인과 여고 동창생들이 힘을 합쳐 죽이려 하는 코미디 영화 이 크랭크인 하고 연말에는 김은희 작가가 집필하고 그가 연출하는 미니시리즈 (가제)에 들어갈 계획이다. “코미디를 위한 코미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사람을 두 시간 동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건 어떤 장르도 하지 못하는 장점이지만 ‘그냥’ 코미디보다는 어떤 정서를 담거나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좋겠어요.” 타고난 코미디언의 날카로움이 허허실실 웃음 속에 한층 더 번뜩인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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