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22일, 초로의 남자가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1967년 유학을 떠나던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 순간부터 세계인이 되어라” 라고 말했지만 남북 분단의 현실 속에서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던 그를 기다린 것은 입국 금지 조치로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의 무덤과 국가정보원이 미리 신청해 둔 체포영장이었다. 재독철학자 송두율은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고 언론에 의해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이 된 데 이어 국가보안법에 의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서울구치소 미결수 65번’이 되었다. 는 2004년 7월, 송두율 교수가 2심 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독일로 출국하기까지 1년여의 시간 동안 그와 한국 사회를 가까이서 혹은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다. 2003년 ‘스파이’였던 송두율은 어째서 2010년 ‘스파이’가 아닐 수 있을까. 그는 왜 ‘스파이’로 불리었으며 대한민국은 그에게 무엇을 원했을까.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송두율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보수는 광기에, 진보는 혼란에 휩싸여 있던 그 시간을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하는 데는 촬영보다 몇 배나 오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고,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는 이후 다수의 영화제에서 호평 받았다. 3월 2일 배우 권해효의 사회로 진행된 언론시사회에는 의 홍형숙 감독을 비롯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홍보대사인 제 3기 ‘다큐 프렌즈’ 박원순 변호사와 김C가 참석했다. 영화는 3월 18일 개봉한다.
“사고와 생각을 가로막는 것은 없으면 좋겠다”
처음 어떻게 해서 송두율 교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었나.
홍형숙 감독 : 2002년 발표한 가 분단으로 인한 아픔들을 다루기로 했던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2003년 송두율 교수의 귀국 이후 상황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었다. 2003년에 찍은 작품을 왜 이제야 발표하게 되었나.
홍형숙 감독 : 당시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 총체적인 문제점과 모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일상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속에 있었던 나, 나를 포함해 가까운 친구들이라 생각하거나 내가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집단조차도 이 공포스럽고 경악스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어 보기 싫을 때 거울 앞에서 정직하게 나를 바라보기가 쉽지 않았다. 거리두기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늦어졌다.
권해효 : 작품을 본 소감이 궁금하다.
박원순 :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올해가 일제강점으로부터 100년을 맞는 해인데 그동안 우리가 과연 어떤 나라를 만들어 왔던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아이들이 살아갈 이 땅이 어떤 세상인가 하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보기 힘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영화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 보고 분석하고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5만 명, 10만 명 보면 많이 보는 거라던데 는 온 국민이 다 봐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김C : 최근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처음에는 ‘일본 놈 참 나쁜 놈들이네’ 라는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가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찍고 어떤 느낌으로 편집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어쨌든 나의 사고와 생각을 가로막는 무엇인가는 없으면 좋겠다. 국가보안법이든 뭐든 내가 생각하는 틀 자체를 가로막는 것이 얼마나 안 좋고 불편한 것인가를 밖으로 드러나게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지닌 가치는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사자가 아니면 그것을 느끼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 작품이 가진 힘이 어느 순간 분명히 드러날 거라 믿는다.
“이 영화가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면 좋겠다”
권해효 : 영화 후반부에, 송두율 교수 사건이 일어난 지 5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이 거대한 문제에 대해 왜 어느 누구도 기억하거나 서술하지 않았을까에 대한 질문이 등장한다. 우리 사회가 단순히 망각한 것일까? 2009년에 를 들고 나오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홍형숙 감독 : 사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상영할 때마다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나도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사건을 기억 속에서 지나쳐 버리는 망각이냐고 한다면 단언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당시 모두에게 그 소용돌이는 굉장한 충격이자 당혹이었고 송두율 교수 본인을 포함해 옆에서 기록하고 지켜보았던 나 자신이나,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던 사람들이 내면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을 것 같다. 그러니 단지 그 상처가 지나간 사건이나 과거로서 기억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내가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앞으로 좀 더 지평을 확대해서 더 열심히 이야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권해효 : 전편이었던 가 재독철학자인 송두율이라는 사람이 30년 넘게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분단의 현실과 상처를 그렸다면 는 송두율 교수가 바라본 한국 사회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려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영화는 송두율 교수의 입국부터 1년 가까운 기간을 4단계로 나누어 한 사람의 학자가 굉장히 상처를 입고 독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게 되었다. 송두율 교수는 작품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다.
홍형숙 감독 : 1편에 대해서는 송 교수께서 ‘진흙탕 속의 진주’ 같은, 굉장히 과분한 평을 주셨다. 2편을 만들면서는 2006년 가편집 과정부터 구체적인 의견을 나누었고 최근에도 영화 개봉에 즈음해서 말씀을 하셨다. 깊은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아프지만 따뜻한 봄날이 오는 것처럼 이 영화가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감독으로서는 송 교수 본인과 그 가족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분들에게 마음의 빚이 꽤 있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진솔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여러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권해효 : 혹시 송 교수 스스로 삭제하고 싶어 하셨던 장면도 있나.
홍형숙 감독 : 굉장히 곤혹스럽고 힘든 것들이 많으셨겠지만 교수님께서 제작진의 기획 의도를 대승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하셨고 한국 사회의 진지한 성찰과 치열하게 미래를 이야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셨다. 만드는 과정에서 치열했던 것만큼이나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권해효 :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송두율 교수에게 민주 인사들조차 ‘전향’을 권유하거나 논의하는 대책 회의였던 것 같다. 그 답답한 순간 송두율 교수의 부인인 정정희 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신념을 말씀하시는 것이 유일한 활로라고 느꼈는데, 가까이 지켜본 사람으로서 정정희 씨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홍형숙 감독 : 강단 있는, 자신의 철학이 뚜렷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통 부부 관계를 이야기할 때 ‘동반’이란 말을 쓰는데 정정희 씨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반으로, 평생을 남편의 일이 아니라 본인의 일로 생각하고 사셨기 때문에 두 사람을 다른 영혼으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당사자인 송 교수가 말하기 힘들었던 측면을 정 선생님이 끝까지, 낮은 목소리로 주장하셨던 것 같다. 대책 회의 장면에 대해서는 박 변호사님도 해 주실 말씀이 있을 것 같다.
박원순 : 이 작품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무대에 섰다는 게 그런 의미다. 대책회의 장면이 참 절망스러웠지만 정정희 여사님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하는 양심과 철학을 이야기하셨다. 우리가 사실 지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전향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나. 민주화 후에도 준법서약서라는 것이 존재했고, 많은 논쟁 끝에 그것도 폐지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마치 완전한 민주사회에 들어섰다는 착각 속에 빠졌는데, 그 민주주의를 이끌었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전향’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슬픈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홍형숙 감독 : 부연하자면, 에 등장하는 개인에 대해서는 특별한 자막이나 정보가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들을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나 개인의 시선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책회의 테이블에 계셨던 분들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큰 걸음을 가기 위해 놓치셨던 것들, 작아 보이지만 놓쳤던 근원적인 가치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이전 관계자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여드렸고, 대부분의 대책위원회 선생님들은 이해해 주셨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 감독과 판단이나 견해가 다른 분들도 계셨기 때문에 그런 의견도 많이 들었고 개인적으로 크게 불편해하실 만한 상황으로 묘사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거나 따로 찾아뵙는 과정 등을 거쳤다. 어쨌든 많이 힘들어하고 불편해 하셨음에도 대승적 관점에서 일종의 허락을 해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권해효 : 앞서 영화를 본 사람들의 권유대로 을 만들 생각은 없나
홍형숙 감독 :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유보하고 있다. 다만 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된다면 1, 2편보다는 좀 더 발전적이고 나아진, 건강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사진제공. 시네마달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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