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은 혼란의 시대였다. 풍전등화였던 국운과는 반대로 서양의 문물은 적극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저자거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던 양인들을 서당과 의원을 대체할 학교와 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 병원인 제중원이 세워졌다. 백정, 역관의 딸, 기녀, 양반이 모여 의술을 배우는 그곳은 여전히 공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부딪치고 성장해나가는 제중원은 구한말의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조선의 축소판이다. 궁궐 안에서의 정쟁이 아닌 민초들의 일상으로 뛰쳐나온 사극이 대세인 이 때, 어의가 아닌 백성들의 의사가 집도하는 드라마는 어떤 모습일까? 강명석 기자와 윤이나 TV평론가가 SBS 을 수술대에 올렸다. /편집자주
1884년, 고종 21년. 김옥균과 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는 조선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정변을 일으키지만, 이 유례없는 위로부터의 개혁은 결국 3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SBS 은 그 시대에 저 홀로 외로이 싸우며 자신의 삶을 아래에서부터 개혁해 간 백정 소근개(박용우)의 이야기다. 구한말이 많은 것이 변해가는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서양인을 아이들의 혼을 빼내가는 ‘양귀’로 믿을 만큼 무지했으며, 신분의 경계가 흐려졌어도 백정은 여전히 이름마저 개 취급도 받는 천민이었다. 시대의 변화는 과연 백정도 고기 잡는 칼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칼을 잡게 해 줄 수 있을까. 은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메스를 들게 될 백정이 맞서게 될 세상
이 질문에 대한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분명 백정 소근개는 사람 살리는 칼 ‘메스’를 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백정이 양의학을 배우는 의생이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소근개는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게 소근개가 ‘사람 살리는 일’을 제 손으로 할 수 있음을 깨닫고, 서양의를 꿈꾸는 황정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개인의 성장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소근개의 ‘개혁’이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로 치환 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의 도덕이 결국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것에 있지 않고, ‘더 아픈 사람’을 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인류애에 있다면, 단순한 선악구도는 의 세계관을 그려냄에 있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은 이 지점에서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다. 예를 들어 “의사는 환자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의료선교사 알렌(션 리차드)의 철학과 돈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근개 어머니의 치료를 거부했던 와타나베(강남길)는 극중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선과 악이다. 하지만 황정은 백정이 산 짐승의 목숨을 대할 때 경건하게 임하듯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절실하지만 구차하지는 않게 제 운명에 맞서는 모습으로 도식적인 구도를 넘어선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제 발로 설 줄 아는 여인 석란(한혜진)과 최고 양반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서양의가 되고자 하는 백도양(연정훈) 모두 나름대로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지한 백성과 계몽의 선봉에 선 제중원
하지만 중심인물들 모두가 개화기에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물들로 그려짐에 따라 어느 순간 은 마치 계몽 드라마처럼 보인다. 백성들은 미신을 믿고 뜬소문에 부화뇌동하며 제중원과 서양의학을 불신하고, 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백성들의 무지함에 탄식하며 그들에게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증명하여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원한다. 마치 이미 개화가 되어있는 입장에서 당시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다. 어떤 시대를 그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리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인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의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선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무식한 백성과 그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주인공들이라는 구도는, 백정이 서양의사가 되는 드라마의 큰 이야기 줄기를 배반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의 은 천자문을 외는 음률에 맞추어 “검은 블래끄 푸른 블루”와 같은 식으로 영어 단어를 외는 황정의 모습과 같았다. 은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시대의, 또한 말해지지 않았던 계급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사극이지만, 제 앞의 난관을 해결하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공식은 지금까지의 사극에서 자주 보아오던 것이었고, 그 안에는 옛것과 새로운 것, 구한말을 보는 시선이 정리되지 않은 채 혼재되어 있다.
10회에 이르러서야 은 진짜 ‘제중원’의 이야기가 되었다. 의생들이 입학하고 본격적인 병원으로서의 모습이 갖추어지면서 ‘제중원’에는 시대를 대표할 만한 온갖 인물들이 모여들었고, ‘제중원’은 존재 그 자체로 구한말 조선이 되었다. 중심인물들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은 다양한 인물들에게로 나뉘어졌다. 예정되어있는 분량의 1/3을 지나면서 새로운 길에 접어든 셈이다. 과연 은 제 안에 남아있는 혼란을 정리하고, 지금 이 시대와 대화하는 진정한 의미의 ‘하이브리드’ 사극이 될 수 있을까.
글 윤이나
착한 놈, 나쁜 놈, 멍청한 놈,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년. SBS 의 사람들은 이 네 부류로 나눠진다. 양의술로 사람을 구하는 황정(박용우)과 알렌(션 리차드)의 반대편에는 둘을 방해하는 백도양(연정훈)과 와타나베(강남길)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황정과 백도양이 모두 사랑하는 유석란(한혜진) 같은 여인들과 무지한 백성들이 있다. 그리고 ‘착한 편’과 ‘나쁜 편’은 나머지 두 부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백성들은 와타나베가 퍼뜨린 헛소문에 알렌을 아이 잡아먹는 귀신으로 오해하고, 백도양은 황정이 유석란에게 접근 못하도록 황정의 제중원 입학 시험지를 바꿔치기한다. 반면 황정과 알렌은 언제나 진심을 보여주며 상황을 역전시킨다. 그래서 고종(최종환)이 개화를 “무릇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의 세계관이다. 정형화된 선악 대결에 탈색된 인물들
개화는 정치적 방향 이전에 선한 사람이 우매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황정은 선한 마음으로 우매한 자를 “깨닫게 하는” 개화의 아이콘이다. 의 극적인 재미가 황정에게 집중된 것은 이 때문이다. 진짜 개화를 실천하는 황정은 악인에게 핍박을 받지만, 결국 백정에서 의사로 변신하며 자신과 세상을 바꾼다. 여유롭게 진행되는 백도양의 악행과 달리 황정이 위기를 탈출하려는 순간마다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연출은 이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러나 황정의 활약이 돋보일수록 ‘나쁜 편’은 점점 허물어진다. 의 시작 당시 백도양은 양반임에도 선비 대신 의사를 선택한 탈 시대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도양은 자신이 황정을 제중원에서 떨어뜨리면서도 아무런 고뇌 없이 “패배를 깨끗이 인정해야 하는데 실망이구나”라는 말을 할 만큼 뻔뻔한 악인이다. ‘일본의 히포크라테스’라는 와타나베는 술 마시며 알렌을 음해하려는 계획이나 짜는 협잡꾼일 뿐이고, 강남길, 윤기원, 이효정 등 황정 주변의 사람들이 한결 같이 높은 톤과 경박한 말투를 쓰며 자신이 악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MBC 은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인간의 인생을 바라봤다. SBS 에서 살인 사실을 감춘 범인은 양심과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갈등하다 조금씩 악인이 되어 간다. 하지만 두 작품의 감독과 작가가 만난 의 악인들은 마치 악행을 저지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황정이 신분 제도의 모순을 벗어나려는 의 초반부는 구한말 버전의 을 기대케 했다. 하지만 은 갈수록 백도양이 괴롭히고, 황정이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편으로 갈라지는 상황이 반복된다. 물론, 그래서 은 대중적인 장점을 갖는다. 황정의 인생을 망치면서도 최소한의 수치심조차 없이 공정함을 외치는 악인들은 시청자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이 시대에 상식적인 정의가 공공연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사람이라면, 이 단지 구한말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여인들에게서 개화의 희망을 발견하다
은 선이 악을 이기는 카타르시스에 충실하고, 그 한계 안에서 고유한 완성도를 가졌다. 특히 절대 선으로 보일 만큼 착한 황정을 아직은 어눌하고 투박하며, 때론 절박한 청년의 모습으로 소화하는 박용우의 연기는 유독 빛난다. 그러나 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황정과 백도양의 대립, 백성들의 무지와 변화만을 반복한다. 그 반복성을 황정의 극단적인 고난과 피가 낭자하고 살이 찢어지는 생생한 수술로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의 희망은 선과 악이 아니라 그 사이에 낀 여자들일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인다. 유석란은 여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 제중원 시험을 치고, 어떤 기녀들은 단지 빚을 갚으려고 제중원에 들어온다. 이미 갈 길이 뻔한 황정과 백도양과 달리, 그들은 선과 악 양쪽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들 중 기녀가 되고 싶던 낭랑(신지수)은 제왕절개 장면을 보며 의녀를 꿈꾸기 시작했다. 지금 에 필요한 건 좋은 놈이 나쁜 놈을 이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깨닫게 된” 사람들의 깊고 생생한 이야기 아닐까.
글 강명석
글. 강명석 two@10asia.co.kr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1884년, 고종 21년. 김옥균과 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는 조선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정변을 일으키지만, 이 유례없는 위로부터의 개혁은 결국 3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SBS 은 그 시대에 저 홀로 외로이 싸우며 자신의 삶을 아래에서부터 개혁해 간 백정 소근개(박용우)의 이야기다. 구한말이 많은 것이 변해가는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서양인을 아이들의 혼을 빼내가는 ‘양귀’로 믿을 만큼 무지했으며, 신분의 경계가 흐려졌어도 백정은 여전히 이름마저 개 취급도 받는 천민이었다. 시대의 변화는 과연 백정도 고기 잡는 칼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칼을 잡게 해 줄 수 있을까. 은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메스를 들게 될 백정이 맞서게 될 세상
이 질문에 대한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분명 백정 소근개는 사람 살리는 칼 ‘메스’를 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백정이 양의학을 배우는 의생이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소근개는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게 소근개가 ‘사람 살리는 일’을 제 손으로 할 수 있음을 깨닫고, 서양의를 꿈꾸는 황정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개인의 성장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소근개의 ‘개혁’이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로 치환 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의 도덕이 결국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것에 있지 않고, ‘더 아픈 사람’을 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인류애에 있다면, 단순한 선악구도는 의 세계관을 그려냄에 있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은 이 지점에서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다. 예를 들어 “의사는 환자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의료선교사 알렌(션 리차드)의 철학과 돈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근개 어머니의 치료를 거부했던 와타나베(강남길)는 극중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선과 악이다. 하지만 황정은 백정이 산 짐승의 목숨을 대할 때 경건하게 임하듯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절실하지만 구차하지는 않게 제 운명에 맞서는 모습으로 도식적인 구도를 넘어선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제 발로 설 줄 아는 여인 석란(한혜진)과 최고 양반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서양의가 되고자 하는 백도양(연정훈) 모두 나름대로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지한 백성과 계몽의 선봉에 선 제중원
하지만 중심인물들 모두가 개화기에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물들로 그려짐에 따라 어느 순간 은 마치 계몽 드라마처럼 보인다. 백성들은 미신을 믿고 뜬소문에 부화뇌동하며 제중원과 서양의학을 불신하고, 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백성들의 무지함에 탄식하며 그들에게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증명하여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원한다. 마치 이미 개화가 되어있는 입장에서 당시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다. 어떤 시대를 그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리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인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의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선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무식한 백성과 그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주인공들이라는 구도는, 백정이 서양의사가 되는 드라마의 큰 이야기 줄기를 배반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의 은 천자문을 외는 음률에 맞추어 “검은 블래끄 푸른 블루”와 같은 식으로 영어 단어를 외는 황정의 모습과 같았다. 은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시대의, 또한 말해지지 않았던 계급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사극이지만, 제 앞의 난관을 해결하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공식은 지금까지의 사극에서 자주 보아오던 것이었고, 그 안에는 옛것과 새로운 것, 구한말을 보는 시선이 정리되지 않은 채 혼재되어 있다.
10회에 이르러서야 은 진짜 ‘제중원’의 이야기가 되었다. 의생들이 입학하고 본격적인 병원으로서의 모습이 갖추어지면서 ‘제중원’에는 시대를 대표할 만한 온갖 인물들이 모여들었고, ‘제중원’은 존재 그 자체로 구한말 조선이 되었다. 중심인물들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은 다양한 인물들에게로 나뉘어졌다. 예정되어있는 분량의 1/3을 지나면서 새로운 길에 접어든 셈이다. 과연 은 제 안에 남아있는 혼란을 정리하고, 지금 이 시대와 대화하는 진정한 의미의 ‘하이브리드’ 사극이 될 수 있을까.
글 윤이나
착한 놈, 나쁜 놈, 멍청한 놈,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년. SBS 의 사람들은 이 네 부류로 나눠진다. 양의술로 사람을 구하는 황정(박용우)과 알렌(션 리차드)의 반대편에는 둘을 방해하는 백도양(연정훈)과 와타나베(강남길)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황정과 백도양이 모두 사랑하는 유석란(한혜진) 같은 여인들과 무지한 백성들이 있다. 그리고 ‘착한 편’과 ‘나쁜 편’은 나머지 두 부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백성들은 와타나베가 퍼뜨린 헛소문에 알렌을 아이 잡아먹는 귀신으로 오해하고, 백도양은 황정이 유석란에게 접근 못하도록 황정의 제중원 입학 시험지를 바꿔치기한다. 반면 황정과 알렌은 언제나 진심을 보여주며 상황을 역전시킨다. 그래서 고종(최종환)이 개화를 “무릇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의 세계관이다. 정형화된 선악 대결에 탈색된 인물들
개화는 정치적 방향 이전에 선한 사람이 우매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황정은 선한 마음으로 우매한 자를 “깨닫게 하는” 개화의 아이콘이다. 의 극적인 재미가 황정에게 집중된 것은 이 때문이다. 진짜 개화를 실천하는 황정은 악인에게 핍박을 받지만, 결국 백정에서 의사로 변신하며 자신과 세상을 바꾼다. 여유롭게 진행되는 백도양의 악행과 달리 황정이 위기를 탈출하려는 순간마다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연출은 이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러나 황정의 활약이 돋보일수록 ‘나쁜 편’은 점점 허물어진다. 의 시작 당시 백도양은 양반임에도 선비 대신 의사를 선택한 탈 시대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도양은 자신이 황정을 제중원에서 떨어뜨리면서도 아무런 고뇌 없이 “패배를 깨끗이 인정해야 하는데 실망이구나”라는 말을 할 만큼 뻔뻔한 악인이다. ‘일본의 히포크라테스’라는 와타나베는 술 마시며 알렌을 음해하려는 계획이나 짜는 협잡꾼일 뿐이고, 강남길, 윤기원, 이효정 등 황정 주변의 사람들이 한결 같이 높은 톤과 경박한 말투를 쓰며 자신이 악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MBC 은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인간의 인생을 바라봤다. SBS 에서 살인 사실을 감춘 범인은 양심과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갈등하다 조금씩 악인이 되어 간다. 하지만 두 작품의 감독과 작가가 만난 의 악인들은 마치 악행을 저지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황정이 신분 제도의 모순을 벗어나려는 의 초반부는 구한말 버전의 을 기대케 했다. 하지만 은 갈수록 백도양이 괴롭히고, 황정이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편으로 갈라지는 상황이 반복된다. 물론, 그래서 은 대중적인 장점을 갖는다. 황정의 인생을 망치면서도 최소한의 수치심조차 없이 공정함을 외치는 악인들은 시청자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이 시대에 상식적인 정의가 공공연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사람이라면, 이 단지 구한말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여인들에게서 개화의 희망을 발견하다
은 선이 악을 이기는 카타르시스에 충실하고, 그 한계 안에서 고유한 완성도를 가졌다. 특히 절대 선으로 보일 만큼 착한 황정을 아직은 어눌하고 투박하며, 때론 절박한 청년의 모습으로 소화하는 박용우의 연기는 유독 빛난다. 그러나 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황정과 백도양의 대립, 백성들의 무지와 변화만을 반복한다. 그 반복성을 황정의 극단적인 고난과 피가 낭자하고 살이 찢어지는 생생한 수술로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의 희망은 선과 악이 아니라 그 사이에 낀 여자들일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인다. 유석란은 여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 제중원 시험을 치고, 어떤 기녀들은 단지 빚을 갚으려고 제중원에 들어온다. 이미 갈 길이 뻔한 황정과 백도양과 달리, 그들은 선과 악 양쪽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들 중 기녀가 되고 싶던 낭랑(신지수)은 제왕절개 장면을 보며 의녀를 꿈꾸기 시작했다. 지금 에 필요한 건 좋은 놈이 나쁜 놈을 이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깨닫게 된” 사람들의 깊고 생생한 이야기 아닐까.
글 강명석
글. 강명석 two@10asia.co.kr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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