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윤준필 기자]
2015년 5월 18일, tvN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졌다. 세 번째 ‘응답하라’의 주인공들에게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대중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운 목소리가 가득했다. 모든 날카로운 화살이 여주인공 혜리를 향해 있었다.
2015년 11월 6일, ‘응팔’의 여주인공 성덕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 1회 만에 여주인공 혜리에게 쏟아졌던 차가운 시선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혜리는 성덕선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덕선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반했고, 덕선이의 해맑은 웃음에 같이 웃었다. 덕선이가 눈물을 흘릴 때에는 함께 가슴 아파했다. 김정환(류준열)과 최택(박보검)이 덕선이를 사랑했던 것만큼 시청자들도 덕선이를 사랑했다.2016년 1월 말, 쌍문동을 떠난 혜리를 만났다. 지난 1년 동안 성덕선으로 살았던 혜리는 덕선이와의 이별이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혜리에게서 덕선이 같은 모습들이 느껴졌다. 해맑은 웃음, 긍정적인 생각,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 등 많은 부분들이 덕선이와 닮아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덕선이스러운’ 혜리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10. 6개월 가까이 살았던 쌍문동을 떠났어요. 덕선이한테 정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혜리: 속으로는 덕선이를 보내줘야지 생각하는데, 마음처럼 쉽게 보낼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덕선이는 앞으로도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은 친구에요. 굳이 지금 떠나보내고 싶지도 않아요. 정말 많이 준비하기도 했고, 사랑스럽고 예쁜 친구라서 이별이 아쉽거든요.
10. ‘응답하라’ 세 번째 시리즈의 주인공이 혜리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굉장히 우려의 목소리가 컸잖아요. 그런 걱정 어린 목소리들이 신경 쓰이진 않았나요?
혜리: 진짜 많이 걱정하시더라고요. (웃음)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셔서 나까지 걱정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차근차근 준비를 많이 했었죠.10. 덕선이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었는지 궁금해요.
혜리: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감독님과 1대1 대본 리딩을 많이 했어요. 일주일에 2~3번 정도? 감독님과 함께 덕선이를 어떻게 좀 더 사랑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했어요. 덕선이와 참 촬영 전부터 많이 친해졌던 것 같아요. 감독님이 현장에서도 디렉팅을 꼼꼼하게 봐주시기도 했고요. 정말 꼼꼼하고 섬세하신 분이에요. 직접 연기를 보여주실 때도 있었고요. (웃음)
10. 신원호 감독과 함께 덕선이를 만들어 간 거네요. 감독님과 연기 연습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뭔가요?
혜리: 일단은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있는 그대로의 연기를 부탁하셨어요. 따로 연기 수업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고요. 감독님과 연기를 준비하는데 저보고 덕선이랑 똑같다는 거예요. “나는 덕선이보다 똑똑한데 뭐가 비슷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진짜 사나이’ 다시 한 번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감독님 말씀을 듣고 다시 ‘진짜 사나이’를 보는데 왜 저렇게 바보 같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저때 왜 저런 행동을 했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은 리얼리티나 관찰 예능에서 덕선이와 닮은 제 모습을 일찍 발견하시고, 제게서 그런 모습들을 다시 꺼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감독님이 알고 계시다는 게 신기했어요.
10. ‘나도 모르는 내 모습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혜리: 예를 들면 덕선이가 구부정한 자세로 눈치를 보거나, 혼나기 직전 겁먹은 표정이라든가, 평소에 바보 같이 짓는 표정이 제 평상시 모습과 비슷해요. 또,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고, 해맑고. 저는 제가 평상시 그렇게 해맑게 다니는지 몰랐어요.10. 김성균과 덕선의 개그콤비도 ‘응팔’을 보는 재미였어요. 그 시절 유행어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살리던데요?
혜리: ‘응팔’ 오디션 때 중요 준비한 질문 중 하나가 유행어를 잘 따라할 수 있는 지였어요. 아시다시피 성균과 덕선의 호흡이 중요했거든요. 그 시절 유행어는 아예 몰랐기 때문에 감독님이 보내주셨던 참고자료로 캐릭터를 준비한 것만큼 열심히 유행어 연습을 했어요. 많이 놀랐던 부분이, 준비할 때는 지금 사람들이 88년 유머코드를 재미있어 할까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따라 해주시더라고요.
10. 그래도 걸스데이 멤버인데, 덕선이를 연기하면서 ‘예쁨’을 많이 내려놓았어요.
혜리: 가수와 배우의 차이인 것 같아요. 걸스데이로 무대에 오를 때에는 메이크업도 진하게 하고, 속눈썹도 날아갈 것처럼 만들어야 빛이 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응팔’을 하면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덕선이가 그 시대 고등학생인데 메이크업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잖아요. 덕선이는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해야 하고, 단발머리가 어울리는 친구란 걸 납득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예쁨을 많이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또 감독님께서 그걸 잘 찍어주시고, 예쁘게 만들어주셨잖아요. 감독님만 믿었어요. 촬영 당시엔 몰랐는데 방송 이후에 다들 덕선이를 귀엽게 봐주시더라고요. (웃음)
10. 쌍문동 5인방 중에 실제로는 가장 막내였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들 사이에서 어려운 것은 없었나요?
혜리: 오히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더 좋았어요. 오빠들이 더 동생같이, 아기같이 예뻐해 주는 느낌을 받았죠. 그러면서 더 친해진 것 같아요. 오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웃음) 오빠들은 원래 아는 사이였고, 저는 전혀 친분이 없으니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을 좀 했거든요. 그랬더니 감독님께선 “쫄지 말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은 제가 연기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겁먹지 않을 것 같아서 뽑으셨대요. 안 그럴 건 알지만 그래도 쫄지 말라고 하셨어요.
10. 감독의 말처럼 ‘쫄지 않고’ 쌍문동 5인방에 잘 녹아들어간 것 같아요.
혜리: 오빠들이 대본 리딩을 하면 항상 잘한다고 칭찬을 해줬거든요. 오빠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옆에서 많이 배웠고 항상 감탄한 부분들이 많아요. ‘오, 이런 부분들 살리는 구나. 이런 게 디테일이구나’하고요. 특히 동휘 오빠가 “덕선아, 최고다. 넌 최고의 여배우야”라면서 격려를 많이 해줬어요. 그런 칭찬들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이렇게 잘하는 오빠들이 나한테 최고래! (웃음)
10. 칭찬의 힘이었나요. 1회에서부터 기대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줬어요. 특히 “나만 왜 덕선이야”라고 서러움이 폭발했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혜리: 그 장면을 위해 정말 준비를 많이 했어요. 지금도 대사를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요. 말 그대로 서러움이 폭발하는 연기를 원하셨어요. 그런데 대본 리딩을 할 땐 아무리 해도 그 장면에서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케이크 촛불에 불을 딱 켜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원래 연기를 할 때 울면 안 된대요. 대사 전달도 힘들고, 감정에 북받치면 뭘 하는지도 모를 수 있어서요. 그래서 혼자 ‘어떡하지’하면서 계속 대사랑 엄마, 아빠만 생각하고 그 순간에 몰입을 했었어요.10. 그 감정이 너무나 리얼해서 혹시 실제로도 둘째인가 생각했었어요. 고시원에서 언니가 사는 모습을 보고 오열하는 장면에서도 울컥했었고요.
혜리: 그 장면은 대본을 읽을 때부터 가슴을 한 대 딱 맞은 것 같았던 느낌을 받았어요.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거든요. 제가 동생에 대한 애정이 커요. 동생 말이라면 뭐라도 하려고 하는 언니인데요. (웃음) 제 동생이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는 상상을 하니까 너무 슬프더라고요. 그 신은 대본을 읽을 때부터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10. 둘째가 아니었네요. (웃음) 그러면 덕선이보단 보라(류혜영)에 좀 더 몰입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혜리: 덕선이를 연기하면서 ‘혹시 혜림이(동생)가 이런 기분이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연예인이라서 동생이 괜히 피해를 볼까봐 걱정이 좀 돼요. 그런데 저번에는 동생이 저보고 성보라랑 똑같다고 했어요. (웃음) 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보라가 덕선이한테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말투가 똑같대요. 극중에서처럼 엄청 싸우는 자매는 아니지만 제가 언니는 언니인가 봐요.
10. 개인적으로 19회에서 덕선이와 형제들이 퇴직한 아빠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장면을 가슴 뭉클하게 봤어요.
혜리: 그 장면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그 장면을 찍기 전까지 한 5일 밤을 새웠어요. 눈이 막 감기는 상황에서 에너지 드링크랑 커피로 버티면서 촬영을 했는데, 감독님이 갑자기 저보고 감사패 내용을 읽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원래 김성균 선배님이 그 감사패를 읽는 거였거든요. 감독님께 이거 읽으면 눈물나서 안 된다고 했더니 “이거 읽고 울라고 시키는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 눈물날까봐 걱정 되고, 선배들도 많아서 긴장도 됐는데 제가 그 감사패를 떨어트려서 감사패가 깨졌어요. 그거 다시 붙인다고 녹화가 지연되고… 리마인드 웨딩부터 감사패 전달까지 한 10시간을 찍었거든요. 어떻게 찍었는지 모르겠어요. 촬영이 끝난 다음에 선배님들께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덕선이가 잘 읽어서 눈물 났다”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10. 부모님한테 어떤 딸인가요?
혜리: 항상 하는 얘기인데, 제가 일하는 원동력은 가족이에요. 제가 연예인으로 데뷔를 한 이유 중에 가족도 있거든요. 큰 딸로서 책임감 같은 게 있어요. 저희 엄마가 고등학교 때 서울에 올라오셨는데 조금 늦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래서 어렸을 적에 시골 마을에 살다가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 왔어요. 서울에서 손바닥만 한 집에 네 식구가 7년 동안 살았어요. 시골에 살 때는 우리 집이 가난하단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데, 서울에 오니까 격차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우리 가족 이사시켜주고 싶었거든요. 부모님은 제가 그런 생각을 하면 어린 애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굉장히 속상해하셨어요.
10. 그러다가 언제 연예인이 된 거에요?
혜리: 캐스팅 제안은 그전부터 계속 받았는데, 연예인이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거절했었어요. 막연하게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열심히 연예인을 준비한 적도 없었으니까. 또, 연예인은 예쁘고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 생각해서 저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지금 회사 대표님을 만났고, 걸스데이를 하자고 제안을 받았죠. 다들 좋은 분들 같고, 느낌이 되게 좋았어요. 이걸 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17살 때 데뷔를 하게 됐어요. (웃음)
10. 어떤 연기를 할 때 제일 힘들었나요?
혜리: 눈물연기가 제일 어렵죠. 여러 커트를 찍으니까 그 때마다 울어야 하거든요. 눈물연기 한다는 것 자체가 초반에는 어려웠는데, 나중에는 울지 말아야 하는 신에서도 울더라고요. ‘이렇게 하면 더 감정이 슬퍼지는구나’하고 하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감독님도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주셔서 정말 뿌듯했어요.
10. ‘덕선이 남편은 과연 누구인가’는 전 국민의 관심사였어요. 본인은 언제쯤 남편이 택이라는 것을 알았나요? 결말이 만족스러웠는지도 궁금해요.
혜리: 택이와 영화를 보려고 했던 덕선이가 약속이 깨진 다음에 “요새 되는 일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독서실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덕선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가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물어봤더니 택이가 남편이라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좀 혼란스러웠어요. (웃음) 내가 이전까지 어떻게 행동했는지 생각하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어요.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감독님께 조금만 더 빨리 물어봤더라면 좀 더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전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말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전 덕선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10. ‘어남류’, ‘어남택’의 증거들은 극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덕선이의 마음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자아냈어요.
혜리: 제일 속상했을 때가 사람들이 덕선이 보고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진다)’라고 할 때였어요. 덕선이는 사랑에 대한 결핍이 심했던 아이거든요. 자기는 언제나 두 번째였고 어떤 것에서든 애정을 못 받고 자랐다고 생각하는 아이라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나도 좋아”라고 말하는 친구였어요. 그 시대 18살이 사랑을 알고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동룡(이동휘)이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찾게 된 거죠. 택이는 덕선이가 계속 신경을 쓰던 친구였어요. 밥은 먹었는지 춥진 않은지 약은 먹었는지 잠은 자는지 택이의 하나하나가 덕선이의 관심사였어요. 동룡이가 “네가 좋아하는 누군지 생각해봐”라고 말한 이후 택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10. 정환이의 마지막 고백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아요. 조금만 더 일찍 고백했으면 좋았을 텐데.
혜리: 덕선이도 선우(고경표)보단 정환이를 더 깊게 좋아한 것은 맞지만 어린 시절 풋풋한 사랑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5년 후에 정환이가 고백하는 장면에서 덕선이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덕선이도 정환이의 고백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5년이나 지난 예쁜 추억, 소중한 기억으로 남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정환이의 순정을 듣고 “그래, 우리 정말 좋았지. 풋풋하고 예뻤어”라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 나타난 거죠.
10. 처음부터 남편이 누군지 궁금하진 않았나요?
혜리: 안 알려주시더라고요. 감독님과 작가님께서 누가 남편이 돼도 이상하지 않게 스토리를 만들어 가셨던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입장에선 늦게 알게 돼서 섭섭했어요. 일찍 알았으면 캐릭터를 좀 더 잘 잡아갔을 텐데.
10. 주변에서도 남편이 누구냐고 많이들 물어봤죠?
혜리: 전 끝까지 모른다고 했어요. (웃음) 그런데 제가 당사자라 그런지 저한테는 잘 안 물어보더라고요. 대신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들한테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물어봤다는데 스태프들도 절대 얘기를 안 했대요. 남편 정체는 초특급 비밀로 부쳤는데 마지막에 스포일러가 워낙 많이 떠서 많이 속상했어요. 우리가 며칠 밤을 새면서 정말 많은 공을 들였던 부분들이 스포일러 기사로 한순간에 사라지는 거잖아요. 또, 만드는 입장에서도 속상한 일이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도 속상한 일이고요. 정말 아쉬웠어요.
10. 택이 덕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려줬던 ‘호텔 키스신’이 상당히 진했어요. (웃음)
혜리: 2~3시간 정도 찍었던 것 같아요. 저희 둘 다 키스신이 처음이었어요. 보검 오빠도 뽀뽀는 해봤는데 키스는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꿈속에서 하는 키스를 찍을 때는 되게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그냥 연기더라고요. 아, 다들 키스신은 이렇게 찍는구나. (웃음) 호텔에서 키스신은 덕선이와 택이가 서로의 마음을 마침내 확인하는 장면이라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나올까 많이 고민도 하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마주보고 앉을까, 옆에 앉을까, 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웃음)
10. 실제로 혜리의 스타일은 정환이와 택이 중 어디에 가깝나요?
혜리: 욕심이 많아서 섞었으면 좋겠어요. 원래는 정환이처럼 까칠하지만 나만 좋아해주고, 따뜻한 매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정환이는 그게 너무 심해요. 전혀 여지를 주질 않잖아요. 그래서 택이의 다정하고 순수한 면들을 정환이의 매력과 합치면 좋을 것 같아요. 택이는 너무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할 게 많아서 적절하게 섞어야 할 것 같아요. (웃음)
10. 이야기를 나눌수록 덕선이는 혜리에게 맞춤옷 같은 역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자 혜리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은가요?
혜리: “이 역할은 혜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시청자들과 함께 작품에 빠져 있고, 같이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공감 능력이 큰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시청자들과 계속 공감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10. 차기작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텐데, 혹시 다른 캐릭터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혜리: 차기작에 대한 생각은 아직 없어요. 아직 제 스스로 연기에 여유가 없는 것 같고, 또 제가 연기에 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캐릭터에 도전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요. 모든 배우들이 그러겠지만 전 ‘응팔’을 하면서 정말 좋은 동료들과 스태프를 만나서 좋았어요. 차기작도 어떤 캐릭터를 하느냐 보단 마음이 잘 맞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작품에 애정을 쏟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10.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에서 덕선이가 폐허가 된 쌍문동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택이 방에 친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니들이 여기 왜 있어?”라며 울먹거리던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덕선이의 마음에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혜리: 원테이크로 찍은 장면이었는데, 촬영 내내 계속 눈물이 나더라고요. 뭉클하고, 여운이 강한 엔딩이었어요. 어른이 된 덕선이가 쌍문동 골목길을 둘러보다가 다시 추억을 맞이하는 장면이잖아요. 그 엔딩신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10. ‘응팔’로 1988년, 쌍문동 골목을 경험했잖아요. 혜리가 생각하는 그 시절 동네분위기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혜리: 제가 느끼기에 쌍문동 골목은 그냥 큰 가족 같아요. 이웃사촌이라는 말보다 더욱 깊은 사이라는 걸 많이 느꼈죠. 서로 어떤 사정인지 다 알고 있잖아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생활들인데, 잠시나마 성덕선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윤준필 기자 yoo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2015년 5월 18일, tvN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졌다. 세 번째 ‘응답하라’의 주인공들에게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대중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운 목소리가 가득했다. 모든 날카로운 화살이 여주인공 혜리를 향해 있었다.
2015년 11월 6일, ‘응팔’의 여주인공 성덕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 1회 만에 여주인공 혜리에게 쏟아졌던 차가운 시선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혜리는 성덕선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덕선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반했고, 덕선이의 해맑은 웃음에 같이 웃었다. 덕선이가 눈물을 흘릴 때에는 함께 가슴 아파했다. 김정환(류준열)과 최택(박보검)이 덕선이를 사랑했던 것만큼 시청자들도 덕선이를 사랑했다.2016년 1월 말, 쌍문동을 떠난 혜리를 만났다. 지난 1년 동안 성덕선으로 살았던 혜리는 덕선이와의 이별이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혜리에게서 덕선이 같은 모습들이 느껴졌다. 해맑은 웃음, 긍정적인 생각,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 등 많은 부분들이 덕선이와 닮아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덕선이스러운’ 혜리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10. 6개월 가까이 살았던 쌍문동을 떠났어요. 덕선이한테 정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혜리: 속으로는 덕선이를 보내줘야지 생각하는데, 마음처럼 쉽게 보낼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덕선이는 앞으로도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은 친구에요. 굳이 지금 떠나보내고 싶지도 않아요. 정말 많이 준비하기도 했고, 사랑스럽고 예쁜 친구라서 이별이 아쉽거든요.
10. ‘응답하라’ 세 번째 시리즈의 주인공이 혜리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굉장히 우려의 목소리가 컸잖아요. 그런 걱정 어린 목소리들이 신경 쓰이진 않았나요?
혜리: 진짜 많이 걱정하시더라고요. (웃음)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셔서 나까지 걱정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차근차근 준비를 많이 했었죠.10. 덕선이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었는지 궁금해요.
혜리: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감독님과 1대1 대본 리딩을 많이 했어요. 일주일에 2~3번 정도? 감독님과 함께 덕선이를 어떻게 좀 더 사랑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했어요. 덕선이와 참 촬영 전부터 많이 친해졌던 것 같아요. 감독님이 현장에서도 디렉팅을 꼼꼼하게 봐주시기도 했고요. 정말 꼼꼼하고 섬세하신 분이에요. 직접 연기를 보여주실 때도 있었고요. (웃음)
10. 신원호 감독과 함께 덕선이를 만들어 간 거네요. 감독님과 연기 연습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뭔가요?
혜리: 일단은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있는 그대로의 연기를 부탁하셨어요. 따로 연기 수업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고요. 감독님과 연기를 준비하는데 저보고 덕선이랑 똑같다는 거예요. “나는 덕선이보다 똑똑한데 뭐가 비슷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진짜 사나이’ 다시 한 번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감독님 말씀을 듣고 다시 ‘진짜 사나이’를 보는데 왜 저렇게 바보 같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저때 왜 저런 행동을 했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은 리얼리티나 관찰 예능에서 덕선이와 닮은 제 모습을 일찍 발견하시고, 제게서 그런 모습들을 다시 꺼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감독님이 알고 계시다는 게 신기했어요.
10. ‘나도 모르는 내 모습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혜리: 예를 들면 덕선이가 구부정한 자세로 눈치를 보거나, 혼나기 직전 겁먹은 표정이라든가, 평소에 바보 같이 짓는 표정이 제 평상시 모습과 비슷해요. 또,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고, 해맑고. 저는 제가 평상시 그렇게 해맑게 다니는지 몰랐어요.10. 김성균과 덕선의 개그콤비도 ‘응팔’을 보는 재미였어요. 그 시절 유행어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살리던데요?
혜리: ‘응팔’ 오디션 때 중요 준비한 질문 중 하나가 유행어를 잘 따라할 수 있는 지였어요. 아시다시피 성균과 덕선의 호흡이 중요했거든요. 그 시절 유행어는 아예 몰랐기 때문에 감독님이 보내주셨던 참고자료로 캐릭터를 준비한 것만큼 열심히 유행어 연습을 했어요. 많이 놀랐던 부분이, 준비할 때는 지금 사람들이 88년 유머코드를 재미있어 할까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따라 해주시더라고요.
10. 그래도 걸스데이 멤버인데, 덕선이를 연기하면서 ‘예쁨’을 많이 내려놓았어요.
혜리: 가수와 배우의 차이인 것 같아요. 걸스데이로 무대에 오를 때에는 메이크업도 진하게 하고, 속눈썹도 날아갈 것처럼 만들어야 빛이 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응팔’을 하면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덕선이가 그 시대 고등학생인데 메이크업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잖아요. 덕선이는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해야 하고, 단발머리가 어울리는 친구란 걸 납득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예쁨을 많이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또 감독님께서 그걸 잘 찍어주시고, 예쁘게 만들어주셨잖아요. 감독님만 믿었어요. 촬영 당시엔 몰랐는데 방송 이후에 다들 덕선이를 귀엽게 봐주시더라고요. (웃음)
10. 쌍문동 5인방 중에 실제로는 가장 막내였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들 사이에서 어려운 것은 없었나요?
혜리: 오히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더 좋았어요. 오빠들이 더 동생같이, 아기같이 예뻐해 주는 느낌을 받았죠. 그러면서 더 친해진 것 같아요. 오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웃음) 오빠들은 원래 아는 사이였고, 저는 전혀 친분이 없으니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을 좀 했거든요. 그랬더니 감독님께선 “쫄지 말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은 제가 연기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겁먹지 않을 것 같아서 뽑으셨대요. 안 그럴 건 알지만 그래도 쫄지 말라고 하셨어요.
10. 감독의 말처럼 ‘쫄지 않고’ 쌍문동 5인방에 잘 녹아들어간 것 같아요.
혜리: 오빠들이 대본 리딩을 하면 항상 잘한다고 칭찬을 해줬거든요. 오빠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옆에서 많이 배웠고 항상 감탄한 부분들이 많아요. ‘오, 이런 부분들 살리는 구나. 이런 게 디테일이구나’하고요. 특히 동휘 오빠가 “덕선아, 최고다. 넌 최고의 여배우야”라면서 격려를 많이 해줬어요. 그런 칭찬들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이렇게 잘하는 오빠들이 나한테 최고래! (웃음)
10. 칭찬의 힘이었나요. 1회에서부터 기대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줬어요. 특히 “나만 왜 덕선이야”라고 서러움이 폭발했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혜리: 그 장면을 위해 정말 준비를 많이 했어요. 지금도 대사를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요. 말 그대로 서러움이 폭발하는 연기를 원하셨어요. 그런데 대본 리딩을 할 땐 아무리 해도 그 장면에서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케이크 촛불에 불을 딱 켜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원래 연기를 할 때 울면 안 된대요. 대사 전달도 힘들고, 감정에 북받치면 뭘 하는지도 모를 수 있어서요. 그래서 혼자 ‘어떡하지’하면서 계속 대사랑 엄마, 아빠만 생각하고 그 순간에 몰입을 했었어요.10. 그 감정이 너무나 리얼해서 혹시 실제로도 둘째인가 생각했었어요. 고시원에서 언니가 사는 모습을 보고 오열하는 장면에서도 울컥했었고요.
혜리: 그 장면은 대본을 읽을 때부터 가슴을 한 대 딱 맞은 것 같았던 느낌을 받았어요.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거든요. 제가 동생에 대한 애정이 커요. 동생 말이라면 뭐라도 하려고 하는 언니인데요. (웃음) 제 동생이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는 상상을 하니까 너무 슬프더라고요. 그 신은 대본을 읽을 때부터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10. 둘째가 아니었네요. (웃음) 그러면 덕선이보단 보라(류혜영)에 좀 더 몰입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혜리: 덕선이를 연기하면서 ‘혹시 혜림이(동생)가 이런 기분이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연예인이라서 동생이 괜히 피해를 볼까봐 걱정이 좀 돼요. 그런데 저번에는 동생이 저보고 성보라랑 똑같다고 했어요. (웃음) 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보라가 덕선이한테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말투가 똑같대요. 극중에서처럼 엄청 싸우는 자매는 아니지만 제가 언니는 언니인가 봐요.
10. 개인적으로 19회에서 덕선이와 형제들이 퇴직한 아빠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장면을 가슴 뭉클하게 봤어요.
혜리: 그 장면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그 장면을 찍기 전까지 한 5일 밤을 새웠어요. 눈이 막 감기는 상황에서 에너지 드링크랑 커피로 버티면서 촬영을 했는데, 감독님이 갑자기 저보고 감사패 내용을 읽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원래 김성균 선배님이 그 감사패를 읽는 거였거든요. 감독님께 이거 읽으면 눈물나서 안 된다고 했더니 “이거 읽고 울라고 시키는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 눈물날까봐 걱정 되고, 선배들도 많아서 긴장도 됐는데 제가 그 감사패를 떨어트려서 감사패가 깨졌어요. 그거 다시 붙인다고 녹화가 지연되고… 리마인드 웨딩부터 감사패 전달까지 한 10시간을 찍었거든요. 어떻게 찍었는지 모르겠어요. 촬영이 끝난 다음에 선배님들께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덕선이가 잘 읽어서 눈물 났다”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10. 부모님한테 어떤 딸인가요?
혜리: 항상 하는 얘기인데, 제가 일하는 원동력은 가족이에요. 제가 연예인으로 데뷔를 한 이유 중에 가족도 있거든요. 큰 딸로서 책임감 같은 게 있어요. 저희 엄마가 고등학교 때 서울에 올라오셨는데 조금 늦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래서 어렸을 적에 시골 마을에 살다가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 왔어요. 서울에서 손바닥만 한 집에 네 식구가 7년 동안 살았어요. 시골에 살 때는 우리 집이 가난하단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데, 서울에 오니까 격차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우리 가족 이사시켜주고 싶었거든요. 부모님은 제가 그런 생각을 하면 어린 애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굉장히 속상해하셨어요.
10. 그러다가 언제 연예인이 된 거에요?
혜리: 캐스팅 제안은 그전부터 계속 받았는데, 연예인이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거절했었어요. 막연하게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열심히 연예인을 준비한 적도 없었으니까. 또, 연예인은 예쁘고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 생각해서 저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지금 회사 대표님을 만났고, 걸스데이를 하자고 제안을 받았죠. 다들 좋은 분들 같고, 느낌이 되게 좋았어요. 이걸 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17살 때 데뷔를 하게 됐어요. (웃음)
10. 어떤 연기를 할 때 제일 힘들었나요?
혜리: 눈물연기가 제일 어렵죠. 여러 커트를 찍으니까 그 때마다 울어야 하거든요. 눈물연기 한다는 것 자체가 초반에는 어려웠는데, 나중에는 울지 말아야 하는 신에서도 울더라고요. ‘이렇게 하면 더 감정이 슬퍼지는구나’하고 하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감독님도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주셔서 정말 뿌듯했어요.
10. ‘덕선이 남편은 과연 누구인가’는 전 국민의 관심사였어요. 본인은 언제쯤 남편이 택이라는 것을 알았나요? 결말이 만족스러웠는지도 궁금해요.
혜리: 택이와 영화를 보려고 했던 덕선이가 약속이 깨진 다음에 “요새 되는 일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독서실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덕선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가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물어봤더니 택이가 남편이라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좀 혼란스러웠어요. (웃음) 내가 이전까지 어떻게 행동했는지 생각하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어요.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감독님께 조금만 더 빨리 물어봤더라면 좀 더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전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말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전 덕선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10. ‘어남류’, ‘어남택’의 증거들은 극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덕선이의 마음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자아냈어요.
혜리: 제일 속상했을 때가 사람들이 덕선이 보고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진다)’라고 할 때였어요. 덕선이는 사랑에 대한 결핍이 심했던 아이거든요. 자기는 언제나 두 번째였고 어떤 것에서든 애정을 못 받고 자랐다고 생각하는 아이라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나도 좋아”라고 말하는 친구였어요. 그 시대 18살이 사랑을 알고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동룡(이동휘)이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찾게 된 거죠. 택이는 덕선이가 계속 신경을 쓰던 친구였어요. 밥은 먹었는지 춥진 않은지 약은 먹었는지 잠은 자는지 택이의 하나하나가 덕선이의 관심사였어요. 동룡이가 “네가 좋아하는 누군지 생각해봐”라고 말한 이후 택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10. 정환이의 마지막 고백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아요. 조금만 더 일찍 고백했으면 좋았을 텐데.
혜리: 덕선이도 선우(고경표)보단 정환이를 더 깊게 좋아한 것은 맞지만 어린 시절 풋풋한 사랑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5년 후에 정환이가 고백하는 장면에서 덕선이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덕선이도 정환이의 고백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5년이나 지난 예쁜 추억, 소중한 기억으로 남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정환이의 순정을 듣고 “그래, 우리 정말 좋았지. 풋풋하고 예뻤어”라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 나타난 거죠.
10. 처음부터 남편이 누군지 궁금하진 않았나요?
혜리: 안 알려주시더라고요. 감독님과 작가님께서 누가 남편이 돼도 이상하지 않게 스토리를 만들어 가셨던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입장에선 늦게 알게 돼서 섭섭했어요. 일찍 알았으면 캐릭터를 좀 더 잘 잡아갔을 텐데.
10. 주변에서도 남편이 누구냐고 많이들 물어봤죠?
혜리: 전 끝까지 모른다고 했어요. (웃음) 그런데 제가 당사자라 그런지 저한테는 잘 안 물어보더라고요. 대신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들한테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물어봤다는데 스태프들도 절대 얘기를 안 했대요. 남편 정체는 초특급 비밀로 부쳤는데 마지막에 스포일러가 워낙 많이 떠서 많이 속상했어요. 우리가 며칠 밤을 새면서 정말 많은 공을 들였던 부분들이 스포일러 기사로 한순간에 사라지는 거잖아요. 또, 만드는 입장에서도 속상한 일이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도 속상한 일이고요. 정말 아쉬웠어요.
10. 택이 덕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려줬던 ‘호텔 키스신’이 상당히 진했어요. (웃음)
혜리: 2~3시간 정도 찍었던 것 같아요. 저희 둘 다 키스신이 처음이었어요. 보검 오빠도 뽀뽀는 해봤는데 키스는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꿈속에서 하는 키스를 찍을 때는 되게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그냥 연기더라고요. 아, 다들 키스신은 이렇게 찍는구나. (웃음) 호텔에서 키스신은 덕선이와 택이가 서로의 마음을 마침내 확인하는 장면이라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나올까 많이 고민도 하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마주보고 앉을까, 옆에 앉을까, 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웃음)
10. 실제로 혜리의 스타일은 정환이와 택이 중 어디에 가깝나요?
혜리: 욕심이 많아서 섞었으면 좋겠어요. 원래는 정환이처럼 까칠하지만 나만 좋아해주고, 따뜻한 매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정환이는 그게 너무 심해요. 전혀 여지를 주질 않잖아요. 그래서 택이의 다정하고 순수한 면들을 정환이의 매력과 합치면 좋을 것 같아요. 택이는 너무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할 게 많아서 적절하게 섞어야 할 것 같아요. (웃음)
10. 이야기를 나눌수록 덕선이는 혜리에게 맞춤옷 같은 역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자 혜리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은가요?
혜리: “이 역할은 혜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시청자들과 함께 작품에 빠져 있고, 같이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공감 능력이 큰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시청자들과 계속 공감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10. 차기작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텐데, 혹시 다른 캐릭터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혜리: 차기작에 대한 생각은 아직 없어요. 아직 제 스스로 연기에 여유가 없는 것 같고, 또 제가 연기에 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캐릭터에 도전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요. 모든 배우들이 그러겠지만 전 ‘응팔’을 하면서 정말 좋은 동료들과 스태프를 만나서 좋았어요. 차기작도 어떤 캐릭터를 하느냐 보단 마음이 잘 맞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작품에 애정을 쏟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10.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에서 덕선이가 폐허가 된 쌍문동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택이 방에 친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니들이 여기 왜 있어?”라며 울먹거리던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덕선이의 마음에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혜리: 원테이크로 찍은 장면이었는데, 촬영 내내 계속 눈물이 나더라고요. 뭉클하고, 여운이 강한 엔딩이었어요. 어른이 된 덕선이가 쌍문동 골목길을 둘러보다가 다시 추억을 맞이하는 장면이잖아요. 그 엔딩신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10. ‘응팔’로 1988년, 쌍문동 골목을 경험했잖아요. 혜리가 생각하는 그 시절 동네분위기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혜리: 제가 느끼기에 쌍문동 골목은 그냥 큰 가족 같아요. 이웃사촌이라는 말보다 더욱 깊은 사이라는 걸 많이 느꼈죠. 서로 어떤 사정인지 다 알고 있잖아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생활들인데, 잠시나마 성덕선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윤준필 기자 yoo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