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한혜리 기자]

기승전결(起承轉結). 동양의 전통적인 시작법 중 하나로, 작품 내용의 흐름을 뜻한다. 오늘 날 온라인 상에서는 ‘기승전XX(결국엔 XX더라)’로 변형돼 자연스런 흐름을 강조하는 말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 감히 ‘기승전’을 붙이고 싶은 배우가 있다.

‘믿보황’. 요즘 수요일, 목요일만 되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소리. ‘믿고 보는 황정음’이란 뜻으로, 황정음의 뛰어난 활약을 찬양하는 말이다. 2002년 아이돌 그룹 슈가로 데뷔 후, 2년 뒤 탈퇴를 선언했고 연기자로 변신했다. 허나 황정음은 연기력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이렇다 할 흥행 작품도 내놓지 못했다. 새로 도전한 연기자의 길은 녹록치 않았다.어느 순간 황정음이 달라졌다. 불안한 연기력은 차츰 자기 색깔의 맞는 배역을 맡으며 안정권을 접어들었다. 무명과도 같았던 과거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황정음은 여러 흥행작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했다. 이제 황정음은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 이상을 바라보는 배우가 됐다. 아이돌 그룹 슈가의 멤버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여배우가 되기까지. 황정음이 ‘믿보황’으로 거듭나는 과정 속 ‘기승전결’을 살펴보자.



일어날 기(起) : 2009-2010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이하 하이킥)’ 황정음
당시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 중이던 황정음은 발랄한 매력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매력은 스타 등용소라 불리는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 출연으로 이어졌다. 황정음은 이전에도 수차례 연기에 도전했지만, 별다른 성적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던 상황. 황정음이 이를 갈았던 것일까. 오랜 공백기를 가진 후 다시 TV를 찾은 황정음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이게 웬걸. ‘하이킥’에서 보여준 황정음의 모습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이야. 황정음은 미역을 몸에 감거나, 마스카라가 번진 우스꽝스런 분장도 마다하지 않고 시청자들을 빵빵 터트리게 했다. 대단하다고 할 만큼 웃음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황정음은 ‘하이킥’으로 코믹과 러브라인을 오가며 연기자로서 제대로 된 걸음을 뗐다. 지난 14일 방송된 포털사이트 네이버 ‘V앱’ 에서 ‘하이킥’을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꼽은 것도 그 이유이리라. 그렇게 ‘하이킥’은 ‘믿보황’의 시작이 됐다.



이을 승(承) : 2011 MBC ‘내 마음이 들리니(이하 내마들)’ 봉우리
황정음은 2010년 SBS ‘자이언트’라는 60부작 정극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친정과도 같은 MBC로 돌아왔다. 30부작 ‘내 마음이 들리니’로 전작의 긴 호흡을 이어갔다. ‘자이언트’로 흥행과 함께 연기적 호평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정음에겐 ‘하이킥’의 발랄한 이미지가 강했다. 연기자로서 고충이 될 법도 했을 텐데, 황정음은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하기 보단 진화를 선택했다.황정음이 분한 ‘내마들’의 봉우리는 일곱 살짜리 정신연령의 아버지와 함께 씩씩하게 살아가는 발랄한 20대 중반 여성. ‘내마들’ 속 황정음은 풋풋한 로맨스와 동시에 애틋한 가족애를 그리며, 눈물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특히 ‘내마들’에서는 황정음의 연기 열정을 엿볼 수 있는 포인트가 등장했다. 바로 의상. 황정음은 ‘여주인공은 가난해도 예쁜 옷을 입는다’라는 법칙을 깨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인물 설정에 맞게 ‘의상 돌려 입기’를 선보였다. 사소할지라도 TV 드라마 주인공으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행보였다. 황정음은 ‘의상 돌려 입기’를 통해 극의 리얼리티를 돋보이게 했으며, 봉우리로 완벽 변신을 꾀했다.



바꿀 전(轉) : 2013 KBS2 ‘비밀’ 강유정
애절함, 슬픔, 처연함. 그동안 황정음에게선 느끼기 어려웠던 감정들. 황정음은 ‘비밀’에서 교도소에 수감되고, 아들을 잃는 등 온갖 불행을 겪는 강유정으로 분했다. 그동안의 황정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떨칠 수 없어 보였던 ‘하이킥’의 발랄함은 완전히 잠재워버렸다. ‘비밀’ 속 황정음은 비극의 슬픔을 완벽히 표현했다. 황정음은 그나마 남아있던 연기력 논란까지 모두 떨쳐냈다.황정음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대신 교도소에 들어가고, 사랑하는 아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인간이 겪는 불행 중 가장 극한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밝디 밝은 황정음이 과연 이 어려운 감정들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우려가 된 건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걱정이었다. 황정음은 결국 ‘비밀’로 그 해의 ‘연기대상’ 최우수 연기상을 거머줬다. “연기로 칭찬받은 게 처음이라 더 의미 있는 상.” 감격스런 수상소감처럼, 황정음은 모두에게 ‘연기자’로 인정받게 됐다.



맺을 결(結) : 2015 MBC ‘그녀는 예뻤다’ 김혜진
변신의 끝을 보여줬다. 외적인 변신을 망설이지 않는 황정음이 망가지는 분장의 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예뻤다’에서 황정음이 보여준 김혜진은 파격적이었다. 주근깨와 홍조, 수습 불가능한 뽀글머리까지. 김혜진으로 분한 황정음에게서 여배우로서 외적인 ‘아름다움’ 보다, 배우의 ‘아름다움’이 감지됐다. “‘예쁜’ 황정음 어디갔어?”라며 놀랬던 것도 잠시, 시청자들은 뽀글머리 김혜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예쁘지 않은 황정음은 역설적이게도 더 ‘예뻤다’.황정음 표 ‘의상 돌려 입기’가 또 시작됐다. 검은 슬랙스에 연겨자색 니트. 일자 청바지에 연 보라색 니트. 몇 가지 아이템으로만 돌려가며 코디함으로서, 황정음은 현실 20대의 옷장을 보여줬다. 리얼리티만 살린 게 아니었다. 황정음 표 의상은 ‘짹슨’이라는 캐릭터까지 구축했다. 검은 로퍼에 흰 양말. 전설의 가수 마이클 잭슨을 떠올리게 하는 복장으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황정음의 노력이 시청자들에게도 전달됐던 것일까. 초반 5%대였던 시청률을 12%대로 끌어올리는 등, 황정음은 또 다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예전엔 연기가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 즐기고 있다.” 지난 14일 방송된 ‘V앱’에서 황정음은 이렇게 말했다. 힘든 시간을 지나 연기를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즐기는 자의 열정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이제 황정음의 부족한 연기력을 논할 자는 없다. 황정음은 그간 다수의 작품들로 ‘믿보황’을 거듭 증명했다. 대한민국에 배우는 많지만, 황정음처럼 신뢰도가 높은 배우는 드물다. 웃음과 감동을 함께 전할 수 있는 배우도 드물다. 드라마가 재미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라인업을 확인해라. 그곳에 황정음이 있다면, 못해도 ‘중박’일 테니까.

한혜리 기자 hyeri@
사진. 조슬기 인턴기자 kelly@, MBC ‘지붕뚫고 하이킥’, ‘내 마음이 들리니’, ‘그녀는 예뻤다’, KBS2 ‘비밀’ 방송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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