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직장인의 일상은 고리타분하고 빤한 것이라 여겨져왔다. 드라마는 실장님에서 재벌2세, 전문직 급기야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외계인이나 초능력자들에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바빴지만 정작 우리 주변에 그렇게나 많은 월급쟁이, 즉 회사원들의 일상은 구태여 공들여 묘사하지 않았다. 그것은 틀에 박혀있으며 따분하고 늘 쳇바퀴를 맴도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내 tvN 드라마 ‘미생’이 열어젖힌 회사원들의 일상은 결국 연애나 하는(물론 연애가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 된 세상이지만) 재벌2세나 전문직, 외계인의 그것보다 더 스펙타클했다. 평범한 밥벌이는 그토록이나 치열하더라. 매일 얼굴을 맞대 지겨울 것이라 여겨졌던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의 관계 속에도 규정할 수 없는 수천개의 감정들이 피어났다. 그 일상을 자근자근 쪼개어 건져올린 ‘미생’은 마치 공기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처럼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무겁고 고단하며 또한 신성한 것인지를 돌이키게 해주었다. 그러니 대한민국 샐러리맨들이 이 드라마에 환호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내 밥벌이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으니.


화제의 드라마 tvN ‘미생’에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이 사람을 이야기한다. 바로 최길홍 캐스팅 디렉터.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직업인 캐스팅 디렉터는 할리우드에서는 꽤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최길홍 캐스팅 디렉터는 자신은 카메라 밖에서 조용히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때문에 인터뷰 용 사진을 찍는 것도 한사코 거절을 하느라 설득하기 위해 꽤 애를 먹어야 했다.인터뷰를 하는 와중에도 그에게는 꽤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그는 양해를 구하고 모든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지금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답답해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의도치 않게 엿들은 몇몇 대화에서 그는 감독 그리고 배우의 매니지먼트 양쪽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한 배우의 캐스팅을 성사시켰다. 그 대화의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몇 통의 통화만으로 그가 자신의 직업에서 갖춰야하는 자질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명확하게 정보를 전달해 판단하고 결정을 해야하는 위치에 놓인 사람을 균형감있게 서포트하는 것, 바로 그것이 캐스팅 디렉터의 필수자질이었다.


Q. ‘미생’은 캐스팅이 상당히 좋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비단 주연 뿐 아니라 조연, 단역까지도 마치 꼭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최길홍 : 연출을 잘 해주는 감독님, 대본을 잘 써주는 작가님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도전’에서와 비슷한 느낌을 ‘미생’에서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Q. KBS 쪽 드라마에 많이 참여했다고는 들었다. ‘정도전’ 캐스팅에도 참여했었나.
최길홍 : 그렇다. ‘정도전’ 당시에는 대 배우들이 연기로 좌지우지 하는 어떤 힘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이번 ‘미생’은 대 배우들은 아니었으나, 어떻게 보면 대중은 많이 알지 못하는 그렇지만 베테랑인 배우들이 엄청나게 힘 겨루기를 하는 것이 보인다. 표정, 대사, 리액션 하나 하나가 너무나 잘 살아 있다. 시청자들이 그런 것들을 잘 봐주시는 듯 하다.Q. 원작이 웹툰인 탓에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오는 남자, 순정 만화에서 나온 듯한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들을 가리키지만 최근에는 웹툰 원작의 영상물들이 늘어나면서 만화 속 캐릭터와 싱크로율이 높은 배우를 말하기도 한다)이라는 수식어를 선물받은 배우들도 여럿 등장했다.
최길홍 :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물론 감사드리지만, 실은 그 배우가 만화에 들어가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만화에 있는 인물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다(웃음).

Q. 듣고보니 그렇다. 새로운 용어가 나와야 할 것만 같다. 정말이지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좋은 배우들이 곳곳에 널려있어 배우 풍년이라는 느낌마저 드는 드라마다.
최길홍 : 우리 작품에는 대리들의 파워가 그렇게나 좋더라. 실제 조직 안에서도 대리급들이 일을 제일 많이 하고 반면에 성과가 보이지는 않는 위치에 있는데 우리 드라마도 대리들의 파워가 유독 좋다. 한석율의 상사 성대리(태인호)나 장백기(강하늘)의 상사, 강대리(오민석)도 그렇고 장그래의 김대리(김대명)는 말할 것도 없다. 한편으로는 내가 공감을 많이 하고 감정적으로 많이 와닿는 캐릭터가 안영이(강소라) 쪽 하대리(전석호)다.

Q. 하대리에 많이 와닿는다고? 여직원들은 싫어하겠다(웃음).
최길홍 : 하대리의 경우, 안영이에 대한 애증이 있다. 마냥 미워하기에는 내 새끼라는 생각도 갖고 있는데, 일을 할 때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까칠한 성격이기에 그 애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최근 에피소드에서는 트럭을 몰고 나간 안영이에 대한 마음을 일단 생사는 확인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것이 관심이 없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애정이 어느 정도 있지만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 그만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는 와닿는 점이 많은 캐릭터다.
Q. 캐스팅 디렉터라는 직업 자체에도 호기심이 많이 생긴다. 사실 아직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은 직종이다.

최길홍 : 얼마 전 노조에서도 사건이 있었는데 캐스팅 디렉터의 입장이 난해한 면이 있다. 연출부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기자 쪽에 속해 있지도 않다. 입장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이고, 미개척된 분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유명해지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명함도 없다. 그저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하는 직종이다.

Q. 할리우드에서는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종이라 들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미개척된 분야가 확실하고, 그런 직종이 당신의 직업이 된 히스토리도 궁금하다.
최길홍 : 내가 1세대는 아니다. 그 전에도 캐스팅을 하던 분이 계셨다. 그보다 더 전에는 단역 캐스팅을 감독이 직접 했고, 감독이 촬영을 나가게 되면 조연출의 담당이 된다. 그런데 연기자들이 언제까지나 단역만 하지는 않는다. 단역이 조연이 되고 조연이 주연이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 사람들과 가장 밀도가 많았던 사람이 단역 캐스팅을 도와주게 됐고, 그 일을 한 것이 바로 나였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그들의 정보를 제일 빨리 알게 되고 접촉도 가장 빠르다보니 결국 직업이 되어 버렸다.

Q. 캐스팅이라는 것이 마냥 배우들의 정보만 많다고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최길홍 : 그렇다. 대본을 읽고 분석을 하고 배역에 대한 성격이나 연출에 대한 느낌까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은 결코 아니다. 지금 스포트라이트가 내게만 와서 부담스럽기도 한데, 사실 우리 회사 전체 식구들이 다 함께 한 작업이다. 그런데도 캐스팅 디렉터라고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내 이름 뿐이라, 참.Q. 주연 캐스팅의 경우, 어느 정도로 관여를 하나. 그 외 캐스팅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나.
최길홍 : 주로 조연 위주로 많이 가고, 주연의 경우에는 배역에 적합한 배우의 이미지, 느낌만 잡는다. 드라마는 사업적인 부분도 있고 여러가지가 복합돼 있는 만큼, 제작사나 연출자가 직접 나설 때도 많다. 그럴 때 컨설팅을 해드린다. 일반적으로 엑스트라와 단역을 구분 못 하는데, 엑스트라는 어떤 신에서 역할을 하지 않는 일종의 배경이라고 보면 되고 단역은 신에서 어떤 방향성이나 사건을 읽게 해주는 존재다. 작은 역할이지만 분명한 기능이 있다는 점에서 엑스트라와 단역은 다르다. 출연료 책정도 단역의 경우, 엑스트라의 10배 이상 받는다. 단역 캐스팅은 전문 배우들로 꾸려지며, 연출과 조연출과 상의를 해서 결정한다.

Q. 캐스팅이 되기까지의 과정 속에는 여러 정치적 관계들도 개입을 하게 된다. 서로간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분명 있을테고. 그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캐스팅 디렉터라고 보면 되는 것인가.
최길홍 : 과거에는 연출자가 확실히 캐스팅 권력을 잡고 있었다면 지금은 작가와 연출, 제작사, 배우의 권력이 모두 상당하다. 캐스팅 디렉터의 역할은 균형을 잡는다기 보다 이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조명팀, 카메라팀과 같은 스태프다. 보이지는 않지만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제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하는 스태프처럼 우리 역시도 드라마를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알맞은 바퀴를 찾는 정보를 주는 것이다. 차체는 크고 좋은데 바퀴가 작거나 바퀴가 너무 커서 굴러가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지 않나. 우리는 그 배역에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알맞은 배우를 찾는 것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Q. 워낙 많은 배우들을 알고, 또 워낙 많은 작업을 해왔기에 이제는 배역을 보면 딱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을까.

최길홍 : 결코 아니다(웃음). 대본을 오래 보고 배우들 느낌을 잡고 또 연출자와 소통을 해봐야만 그 배역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시간이 상당히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드라마 작업이 빠르면 첫 촬영 3개월 전에 캐스팅을 시작할 때도 있어 급하게 그러나 깊이있게 작업한다.Q. ‘미생’처럼 준비기간이 긴 드라마의 경우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더 좋은 캐스팅이 된 것이라 보면 될까.
최길홍 : 물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생’은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 인물 자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각 캐릭터 하나하나가 분명한 역할이 있고 그 캐릭터가 없으면 신 자체도 무의미해지는 것들이 많아 성격에 맞게 캐스팅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심지어 다 무슨 과장, 대리, 부장인데 누가 누군지 우리끼리도 헷갈려 애먹었다(웃음).

Q. 결과적으로는 좋은 캐스팅이 상당히 많았다. 박대리 역 최귀화의 경우에도 좋은 캐스팅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최길홍 :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최귀화 씨도 그렇지만 변요한 씨 캐스팅도 어려웠다. 또 김부련 부장 역 김종수 씨 캐스팅도 힘들었다. 감독님(김원석)이 주문하신 것이 만화 싱크로율에 맞추지 못한다면 아예 회사원 같은 사람들로 가자고 했다. 그런 배우를 찾기 위해 영화도 많이 보고 드라마도 많이 봤다. 시사회도 많이 가는데, 시사회의 장점은 우선 직업상 전화들이 많이 걸려오는데 시사회는 전화를 받는 것이 양해되는 분위기이고(웃음), 멀리서 배우를 볼 수 있기에 그 느낌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친한 배우들을 통해 모르는 배우들 소개도 많이 받는다.

Q. 그렇게 찾아내더라도 그 배우가 캐스팅이 되기까지는 조율할 것들이 산더미일 것이다.
최길홍 : 사실 최고의 캐스팅은 가장 처음 생각한 배우들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생각한 배우들이 캐스팅 되는 경우는 많이 없다. 머리가 빠진다. 그래도 그 안에 최적의 캐스팅을 하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생각을 물어보고 내 생각을 가감없이 전달한다. 감독의 선택이 맞다, 내 선택이 맞다의 문제가 아니라 감독이 선택을 쉽게 할 수 있게끔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저같으면 이렇게 할 것 같습니다’라거나 ‘이 캐스팅의 문제는 이것입니다’라고 분명히 전달한다. 또 결국은 신뢰의 문제다. 연출과 스태프 사이에 신뢰가 깨지면 일하기는 어려워진다.

Q. 캐스팅해달라는 배우들의 읍소도 상당할 것이다.
최길홍 : 배우들 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에서도 많다. 하지만 최대한 부담을 안가지려고 노력한다. 또 일 외에는 소통을 하지 않으려 한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Q. 가장 뿌듯한 순간은 언제인가.
최길홍 : 캐스팅으로 배우와 연출이 기뻐할 때가 가장 즐겁다. 가끔 연출자에게서 ‘캐스팅 잘 해줘서 고맙다’고 문자고 오면 신이 난다. 그렇지만 대체로 연출자들이 그런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웃음). 안좋은 것들은 표현을 많이 하지만.

Q.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외라는 생각도 많이 든다. 미개척 분야의 직종이지만 성장 가능성이 큰 직종인만큼 캐스팅 디렉터의 영향력이 더 커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라 막연하게 추측했지만 그 반대였다.
최길홍 : 할리우드처럼 캐스팅 디렉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방식으로 해야한다고 본다. 영화나 드라마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캐스팅 디렉터의 이름은 중간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지만 그건 모든 스태프들이 마찬가지다. 특정 누군가의 힘이 세지는 것보다 힘의 균형이 맞춰졌으면 한다. 균형적인 성장으로 자리잡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캐스팅 디렉터가 중요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더욱 우리 중에 유명한 사람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카메라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그 뒤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출자들의 경우에도 유명해져서 CF를 찍거나 하면 자기의 본업이 힘들어지지 않나. 그러니 본업에 충실할 수 있게 다각도로 응원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 기반들만 생겼으면 좋겠다. 거품처럼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려운 부분 중 하나다. 즐겁고 소박하게 일했으면 좋겠다.

Q.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힘의 균형이란.
최길홍 :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면서 연출의 입장, 연기자의 입장, 작가의 입장, 제작사의 입장이 다 존재한다. 그 사이에서는 연출자의 힘이 더 커져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한 배를 타게 된 상황에서 선장은 연출자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해야하고, 그 이상의 힘이 커지면 위태로워진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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