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나날이 푸석해지는 피부와 그보다도 한 발짝 먼저 시들해지는 삶에 대한 감각. 도도히 흐르는 세월의 강물을 조용히 바라본다는 것은 말처럼 쉬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야 하는 배우에게 ‘나이 듦’이 때로는 연기력 평가의 척도가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배우 도지원이 도도히 걸어온 ‘연기자의 길’은 시간의 흐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난 1988년 한양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뒤 국립발레단의 일원으로 활약해온 그녀는 이듬해 KBS2 ‘절반의 실패’를 통해 연기자로 대중을 만났다. 서구적인 외모에 선이 고운 몸매로 그녀를 향한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는 그녀가 2001년 SBS ‘여인천하’의 경빈 박 씨 역을 맡을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다수 작품에 출연했지만, 도지원에게 남은 경빈 박 씨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래서일까. 올해 그녀가 출연한 MBC ‘황금무지개’는 의미가 작지 않다. 어린 시절 고아로 자란 뒤 복수와 회한 속에 한평생을 살아낸 윤영혜는 ‘배우 도지원’의 두 번째 변곡점과 다르지 않다. 감정연기에 목말라했던 그녀는 ‘황금무지개’로 ‘눈물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여배우로서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도지원’이라는 정체성을 그대로 가져가려 한다”고 말하는 도지원, 작품을 마친 그녀의 눈빛에서는 전에 없이 깊어진 감성과 여유가 느껴졌다.

Q. 41부작 드라마로 근 6개월을 영혜로 살았다. 작품을 마친 뒤 시원섭섭한 기분일 것 같다.
도지원: 쉽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윤영혜’라는 캐릭터 하나 보고 들어간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캐릭터가 녹아있어 부담도 컸지만, 나름대로 잘 마친 것 같다.

Q. 영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극과 극의 감정을 오가는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 또 어린 딸을 시모에게 빼앗기고 훗날 재회하기까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도지원: 아, 정말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났다. (웃음) 성인 배우들이 투입되면서 강대선 PD가 넌지시 “조금만 덜 울면 안 될까?”하고 묻더라. 대본에 너무 충실해서인지 정말 툭 건드려도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 모성애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닐까. 고아로 자라 항상 가족을 꾸리고 싶었던 영혜라면 분명히 그렇게 행동할 것만 같았다.

Q. 매 장면이 모두 슬펐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어땠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도지원: 한주(김상중)가 죽는 장면? 그날 연이은 밤샘 촬영에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는데 촬영장에 가서 한주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몸은 피곤한데 숨을 못 쉬겠는 정도로 쏟아지는 눈물. 정말 연기자로서 경험하기 힘든 정도의 몰입이었다.

Q. 앞서 인터뷰에서 “KBS2 ‘수상한 삼형제’(2009) 당시 안내상과 붙는 신에서 배우로서 첫 희열을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순간’이 없었나.
도지원: 이번에는 어린 김백원(김유정)과 붙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백원에게 가방을 던지면서 나가라고 소리치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라. 유정이가 어린 친구임에도 그렇게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이다.Q. 이번 작품에서 주연 배우들의 ‘로맨스’와 함께 또 다른 축을 이룬 것이 바로 영혜의 ‘모성애’이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경험해보지 않은 무언가를 표현해내야 한다는 건 쉽지 않았겠다.
도지원: KBS1 ‘웃어라 동해야’(2010)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이지만 순수한 감정이 담긴 캐릭터로 그려내는 게 숙제였다. 그래서 더 주변인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여 노력하는 편이다. 엄마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 혹은 나를 대하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며 은연중에 그런 감정을 포착해낸 것 같다.



Q. 그럼에도 약간 ‘어머니’ 역할을 빨리 맡은 감이 없지 않다.
도지원: 나이가 들어가니까 나름의 연기관이 생기고 결국, 캐릭터를 따라가게 되더라. 사실 여배우에게는 엄마 역을 하느냐 마느냐가 가장 힘든 고비다. 나도 처음에는 아기 엄마 역을 맡으면서 나름대로 잘 넘겼는데, ‘웃어라 동해야’ 때부터 아이들의 연령대가 올라가더라. ‘황금무지개’ 때도 캐릭터를 어떻게 풀지 고민하느라 미처 신경을 못 썼는데 아이들이 너무 큰 거다. (웃음) ‘아차!’ 싶기도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Q. 좀 더 여배우로서 표현해내고 싶은 것들이 있지 않나.
도지원: ‘황금무지개’ 전까지만 해도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보면 캐릭터의 한계가 느껴졌었다. ‘여인천하’ 때처럼 강하거나 보통의 엄마 역할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한때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대중에게 잊힐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에 나름대로 휴식기를 갖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환경을 탓하기 보다는 배우 자체가 바뀌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그게 어떤 역할인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Q. 나이가 들어가며 여자로서, 배우로서 느끼는 것들이 달라졌겠다.
도지원: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도지원’이라는 정체성을 그대로 가져가려 한다. ‘웃어라 동해야’ 때 정신연령이 9세에 멈춘 안나 레이커를 연기하며 문뜩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세운 좌우명이 떠오르더라. “순수함을 잃지 말자.” 나이가 더 들어도 그 마음만은 똑같다. 배우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



Q. 배우로서는 ‘황금무지개’를 통해 ‘여인천하’ 이후 두 번째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도지원: 나를 만나는 분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TV와 다르시네요”이다. (웃음) 나도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를 원한 건 아니다. ‘여인천하’로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다. 그래도 차차 작품을 해나가면서 그런 이미지가 많이 희석됐다는 걸 느낀다. 이미지 관리한답시고 휴식기도 가져봤지만, 배우는 딱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연기가 있더라. 좋든 싫든 작품을 마치고 나면 얻는 성과도 있다. 앞으로 나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좋은 작품과 그보다도 더 다양한 캐릭터들로 대중을 만나고 싶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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