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잡지 에디터와 재벌가의 상속녀. 현실에서 이 둘의 격차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멀겠지만 드라마에서 그녀들을 묘사하는 드라마는 놀랍도록 흡사하다. SBS 의 편집장 박기자(김혜수)와 에디터들은 마감에 시달리는 초췌한 모습 대신 늘 풀메이크업과 드레스업한 차림으로 출근한다. KBS 의 강혜나(윤은혜)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패리스 힐튼은 경제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때 맞춰 잘 차려입는 것으로 재벌 3세의 소임을 다한다. 수면 위를 우아하게 유영하는 백조의 물 아래 동동거림을 완벽하게 제거한 채 여자들을 묘사하는 방식. 방송시간도, 주인공의 세계도 모두 다른 이 두 드라마에는 그렇게 같은 방식으로 여자들을 재단하고 있다. 조지영, 윤이나 TV평론가가 이 어설픈 스타일링에 엣지있는 충고를 보낸다. /편집자주

SBS 의 이서정(이지아)은 기획회의에서 말한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하는 군인들의 마음가짐이, 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우리 에디터들과 좀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아서요” 서정의 이른바 ‘트랜치 코트’ 기획안은 에디터들의 박수와 환영 속에 통과되지만, 시청자들은 여기에 쉽게 환영하거나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 한 가지는 부인할 수 없다. 어디로, 왜 뛰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달리는 것 같다.

기사는 누가 쓰나요?

등장인물들이 달린 거리의 누적을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많이 뛴 사람은 이서정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마냥 씩씩한 이 캐릭터는 굳이 구분하자면 ‘열혈’보다는 ‘민폐’에 가깝고, 그녀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나 노력이 아니라, 다만 인위적인 설정일 뿐이다. 이야기를 작동시키려고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이 설정은, 이서정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가령, 이서정이 ‘우리 아빠 수선집의 단골 할머니’로 소개하는 이방자(김용림)는 <스타일>의 지분을 가진 재력가이기도 하다. 이방자를 주주총회 자리에 인도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서정 본인이면서, “이방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섭외했어?”는 물음에 “그냥 할머니일 뿐인데요?”라고 반문하는 이서정이다. 그녀가 아무리 ‘엣지있게’ 프랑스 패션계에서 인정해 줄만한 기사를 쓴다고 해도 미덥지가 않은 이유다. 재능있(다고 하)는 포토그래퍼 박민준(이용우)는 딱히 일에는 관심이 없는 캐릭터이고, 소위 ‘발행인’ 서우진(류시원)은 쉐프 옷을 입고, 가끔 박기자(김혜수)와 입씨름을 하거나, 변호사를 만나는 일이 전부다. 그나마 오매불망 <스타일>을 살려 보려고 킬힐을 신고 뛰어다니는 박기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어떤 기획과 기사냐가 아니라, 리안 백화점을 끊고 H백화점의 줄을 잡을까 하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잡지는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 <스타일>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대관절, 누구인가? 설마, 서정과 기자, 민준을 제외한 <스타일> 식구들? 그들은 모두 책상 옆에 붙어있다. 아무도 취재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 모여 앉아있다. 다만 모여서 주어진 대사를 순서대로 할 뿐이다. 그들은 변형된 방자와 향단이 캐릭터들이다. 자신들의 삶은 없고, 춘향이와 몽룡의 서사를 해설하기 바빴던.

여자들의 꿈이라구요?

드라마가 재미만 있으면 되지, 리얼리티가 무슨 상관? 이라는 반론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회가 넘어가는 주 2회 장편 드라마에서, 기본적인 리얼리티가 답보되어있지 않으면 그, 재미가 보장되기 어렵다. 드라마에서 리얼리티란, 다른 의미로 ‘개연성’과도 같은 말이다. 실제로 패션잡지가 저렇다 안 저렇다의 논란을 떠나서, 등장인물의 선택과 갈등과 해결책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말끝마다 ‘패션필드’를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 <스타일>이 보여주는 것은 변형된 출생의 비밀, 알듯 모를 듯한 4각의 연애, 그리고 화려한 ‘협찬’이 전부다. 드라마의 외형은 화려한데, 전개하는 방식은 ‘올드 패션’이다.

그나마 배우 김혜수의 열연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스타일>을 간신히 떠받친다. 마치 박기자가 극중 <스타일>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아침, 저녁으로 레드카펫에 설 것처럼 성장하는 그 드레스에는 동의하기 어렵고, 심지어 의상이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이지만, 박기자가 손 회장(나영희) 앞에서 입술을 깨무는 순간만큼은 MBC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 우용길(김창완) 원장에게 머리 숙이는 장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서정은 <스타일>이 ‘여자들의 꿈’이라고 말했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꿈 그것이 <스타일>이라고. 이 말은 ‘박봉에 시달려도 버릴 수 없는 열정’이 있다고 서우진에게 꿈꾸듯 고백하던 장면과도 공명한다. ‘꿈’과 ‘열정’을 말하고 싶은가? 이들이 말하는, 꿈과 열정이란, 가끔 번지르르해 보여도 전혀 와 닿지는 않는다. 마치, 박기자가 숨차게 갈아입는 그 옷들처럼. 박기자가 지치듯, 시청자들도 함께 지쳐간다. 드라마에도, ‘엣지’가 필요하다. 다름아닌 ‘개연성’이라는 ‘베이직’한 엣지가.
글 조지영

가십과 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 핫 셀러브리티 재벌2세. 집사나 메이드의 존재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궁전과 같은 집에 살며, 세상 모든 사람이 제 아래 있다고 믿는 KBS <아가씨를 부탁해>의 강혜나(윤은혜)에게서 KBS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구준표와 강혜나의 연관성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본다면 <아가씨를 부탁해>는 오히려 90년대 트렌디드라마와 닮아 있다. 물론 10년 전이었다면, 주인공은 모든 것을 다 가진 혜나가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해 꿈을 이루려는 캔디 걸 의주(문채원)였어야 한다. <아가씨를 부탁해>는 이와 동일한 배경 속에서 포커스만을 이동한다. 예전 그대로라면 악역이었어야 하는 혜나는 권력과 부, 화려한 외모를 모두 가진 히로인이며, 드라마 속의 남자들은 신데렐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캔디 의주가 아닌 원래부터 ‘공주님’이었던 혜나를 선택한다.

철없는 공주님의 갈등 없는 연애담

<아가씨를 부탁해>의 혜나는 지금까지의 트랜디 드라마들에서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 혹은 일에 있어서의 더 나은 실력을 가지지 못해 악역이나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던 세컨드 히로인들의 길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이 드라마는 수도 없이 많은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온 신데렐라 이야기가 전복되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흔하게 접해 온 도식적인 사각구도 속에서 사랑을 얻지 못하던 여인이 사랑을 얻을 때, 과연 그녀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던져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혜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춰 두고도 정작 그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그리면서 <아가씨를 부탁해>는 철없는 공주님의 연애 이야기 말고는 볼 게 없는 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는 수민(왕석현)과 혜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서 거의 동일한 정신연령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단선적으로 처리되는 주인공들의 감정 역시 어린아이들의 그것과 같다. 연습을 빌미로 기습키스를 하고도 아직 제 마음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동찬(윤상현)이나,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낀 다음에야 혜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태윤(정일우), 단순히 자기보다 가진 것이 많은 혜나에 대한 반발심으로 태윤을 좋아하기로 한 수아(장아영) 모두 “너 나 좋아해?”라는 혜나의 질문에 딱 맞는 수준의 감정과 태도 보여준다. 그래서 이들의 애정은 갈등을 유발하지도 못하고, 관계에 대한 성숙한 시선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이 드라마의 또 하나의 갈등 요소여야 했던 혜나와 동찬 사이의 주종관계 역시, 동찬이 어린아이와 같은 혜나를 어르고 달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아주 극단적인 방식이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소년에게 굴복하는 평범한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준표와 잔디(구혜선) 사이의 계급차를 드러내며 갈등의 소지를 만들어갔던 <꽃보다 남자>와는 달리, <아가씨를 부탁해>에서는 그 계급차가 드러내는 갈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이들에게 ‘하찮은 것들’이라고 일갈하면서도 정작 그 하찮은 것들에게서 오는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고, 사랑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곤 고작 ‘집사의 도움을 받아 농촌 봉사 활동에 가기’가 전부인 혜나의 캐릭터 때문이다. 도움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만,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법도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와 같은 혜나는 6회에 이르도록 거의 성장하지 않았다.

아가씨의 성장을 부탁해

그래서 동찬이 혜나에 대해 정의하는 “아가씨는 아주 예쁜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알고 보니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에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쌍한 감정은 혜나의 진짜 모습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돈 말고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동정심에 가깝다. 아무리 반복해서 “난 강혜나니까!”를 외친다 한들, 그 안에 진짜 ‘강혜나’라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혜나는 반복해 옷만 갈아입는 종이 인형처럼 보일 뿐이다. 올 가을 패션 트렌드라는 한껏 치켜 올라간 파워 숄더의 끝은 날카롭지만 이야기의 날은 무디고, 그 세련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오히려 현실보다 촌스럽다. 지금의 <아가씨를 부탁해>는 <꽃보다 남자>가 이미 지나칠 정도로 소비해버린 판타지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걸어 나가지 못한 채, 성장하지 못한 히로인 혜나와 함께 멈춰있다.
글 윤이나

글. 조지영 (TV평론가)
글. 윤이나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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