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나 역시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처럼 지구를 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진 했던 것 같다. 그 때는 코스튬이라는 용어를 몰랐지만 분명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지구의 기아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인권 운동가가 아닌 코스튬 히어로였다. 지구를 위협하는 적은? 물론 외계인이었다.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에 등장하는 코스튬 히어로들은 이런 어린 날의 판타지를 실제로 이룬 애어른들이다. 그들은 폭동자들이나 가면을 쓴 악당을 소탕한 과거가 있지만, 법적으로 이런 활동이 금지되자 과거를 추억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며 일반인의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무기력해진 진짜 이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평화를 뜻하는 건 아니다. 연일 계속되는 핵전쟁의 위협 속에 뉴욕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있다. 이 숨 막히는 분위기는 애어른 코스튬 히어로가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그래서 <왓치맨>은 영웅과 악당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위태롭지만 명확한 적이 없는 시대에 영웅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니 과연 영웅이 필요한지에 대한 가장 심각한 형태의 질문이다. 차라리 외계인처럼 눈에 보이는 적의 침공이 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작년 하반기 티저 예고편만으로 2009년을 기다리게 했던 영화 <왓치맨>이 이제야 개봉한다. 원작자 스스로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이 작품이 잭 스나이더 감독의 과도한 영상 안에서 어떻게 구현될지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근 10년 중 민주주의와 인권의 적이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한 현재 한국에서 이 작품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과연 보이는 ‘적’만 사라지면 정의는 승리할 수 있을까.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