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원에게 ‘여배우’라는 타이틀은 몸에 착 붙는 옷과도 같다. 10년 넘게 다양한 작품을 통해 전대미문의 캐릭터들을 연기해왔지만, 그녀는 고성 위의 공주님이라기보다는 어느 날 버스 옆자리에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친근함의 거리로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다. 오히려 한 술 더 떠 동생들에게 술 사 먹이며, 어디서도 듣지 못한 절묘한 인생 코치를 해 줄 것 같은 기운 센 ‘언니’다.

만약 열화상 카메라로 예지원을 찍는다면 손끝부터 발끝까지 붉은 등고선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보통 여자들보다 많이 센” 여성을 연기해왔던 그녀는 <생활의 발견>에선 무반주 무용으로 남자를 당황시키고, <당신이 잠든 사이에>선 가진 것 없이 술김에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느라 바쁘다. 그럼에도 한 일가를 붕괴시킬 만큼 무지막지한 사랑을 받는 <귀여워>의 순이처럼, 결국은 연하남을 쟁취해내는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미자처럼 우리는 그 뜨거운 기운에 결국 잠식당하고야 만다.

현실에서도 늘 자신의 뜨거운 에너지를 춤으로, 노래로 서슴없이 분출하며 주변의 온도를 높이는 예지원. 물론 그것은 영화라는 세계 안에서 가장 폭발적이다. “언젠가는 꼭 슬픔, 아픔, 사랑 등 모든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서커스 영화를 찍고 싶다”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에선 10여 편의 작품을 거친 뒤에도 해갈 되지 않은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다음은 예지원의 갈증을 풀어주기도, 더 목마르게 하기도 하는 영화들이다. 영화를 처음 배울 때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들로 예지원은 오늘도 열정을 충전하고 우리 앞에 선다.




1. <퐁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u Pont-Neuf)
1991년 │ 감독 레오 까락스

“줄리엣 비노쉬를 정말 좋아해요. 대단한 미인도 아니고 엄청난 S라인을 뽐내지도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같아요. 이 배우도 센 역할들을 많이 연기했지만 영화 속에서 아름답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노숙자로 나오는데 전혀 추해 보이지 않잖아요. 거기에 등장했던 그림들도 모두 그녀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하니 정말 반할 수밖에요. 특히나 줄리엣 비노쉬와 드니 라방이 퐁네프다리 위를 뛰어다니며 함께 춤을 추던 장면이 잊히지 않아요.”

당신이 아는 낭만의 도시 파리는 여기에 없다.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헐벗은 모습의 도시에서도 가장 남루한 미셸과 알렉스는 거리에서 만나고, 폐허 같은 퐁네프다리에서 서로를 품는다. 보고 나면 온 몸이 아플 만큼 극단적인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몸의 언어는 절절하다. 레오 까락스 감독의 연작 중에서 그의 페르소나, 드니 라방이 가장 돋보인 작품. 감독이 가장 빛나던 필모그래피들을 쏟아내던 시기의 출세작이다.



2. <라빠르망>(L`Appartement)
1996년 │ 감독 질 미무니

“이 영화에서 막스와 리자가 아파트에서 너무나 멋지게 춤을 추잖아요. 그걸 보고 있으니 어찌나 부럽던지… 그래서 항상 다음에 연인과 함께 저런 춤을 춰봐야지 하는 로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생활의 발견>에서 홍상수 감독님이 영화 안에서 춤을 춰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셔서 너무 좋았죠. 물론 그 둘의 춤과는 달랐지만요. (웃음) 그리고 다른 영화에도 여러 번 함께 출연했지만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 커플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아요. 그들의 눈부신 모습에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 이야기였지만 흥이 나서 본 기억이 나네요.”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이라는 완벽한 조합의 커플을 탄생시킨 작품. 막스는 일하는 가게의 비디오에서 우연히 본 리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리자는 말없이 사라지고, 막스는 리자의 흔적을 따라가지만 그가 맞닥트린 사람은 리자가 아닌 의문의 여인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이들의 집착은 결국 파국을 향해 치닫고, 예상치 못한 마지막 장면은 그들이 사랑했던 것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2005년에 조쉬 하트넷이 출연한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3. <선라이즈>(Sunrise: A Song of Two Humans)
1927년 │ 감독 F. W. 무르나우

“이 영화는 제가 사회를 봤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라는 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됐던 작품이에요. 무성영화인데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사람을 웃겨요. 아무런 음악도, 대사도 없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아 그래 역시 영화는 영상이야’라는 기본 중의 기본을 다시 깨우치게 되었어요. 옛날 영화들은 그런 영상의 힘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더라고요. 대사가 없는 데도 주인공들의 엉뚱한 행동이 다 이해가 되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예요. 많은 분들이 꼭 봤으면 좋겠어요.”

시골에 살고 있는 평범한 부부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묘령의 여인. 이 여자는 순진한 남편을 꼬드겨 아내를 없애고 함께 도시로 가자고 유혹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둘의 사랑을 확인한 부부가 행복한 결말을 맞기까지의 과정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특히 영화 중간 삽입되는 도시의 광경은 시골의 풍광과 오버랩 되면서 별다른 영화적 장치 없이도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폭스가 당시로는 120만 달러라는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할 정도로 영화계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무르나우 감독의 무성영화.



4. <디 아워스>(The Hours)
2002년 │ 감독 스티븐 달드리

“니콜 키드먼은 여배우의 얼굴이 작은 변화만으로도 깜짝 놀랄 만큼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그렇게 아름다운 배우가 코를 살짝 높이는 약간의 분장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잖아요. 그리고 그 목소리하며… 종전의 니콜 키드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에 정말 감탄했어요. 저도 언젠가 그런 작은 변화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변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영화예요.”

파격변신을 한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로 제27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움켜쥐었다. 오늘도 집필 중인 소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버지니아, 완벽해 보이지만 마음 한 켠에 응어리를 쌓아가며 가정을 돌보는 로라, 누구보다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연인의 죽음을 지켜만 봐야 하는 클래리사까지. 니콜 키드먼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세 여자들의 상처와 고민은 각기 다른 시대임에도 놀랍도록 흡사하다.



5. <제8요일>(Le Huitieme Jour)
1996년 │ 감독 자꼬 반 도흐마엘

“마망 세뚜와~” 이 노래 너무 좋지 않았나요? 슬픈 결말로 끝나지만 제게는 참 아름답게 기억되는 영화예요. 조지가 친구들을 데리고 아리에게 찾아가는 장면도, 조지와 아리의 가족이 함께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도 음악과 함께 굉장히 몽환적으로 표현되었고요. 영화 안에서 음악이 제게 주는 것은 참 커요. 음악이 좋은 영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거기에 멋진 안무까지 들어가면 언제까지나 두고 보는 영화가 되거든요. 게다가 <제 8요일>은 프랑스 영화니까요. 전 프랑스와 전 인연이 깊잖아요. (웃음)”

아내와 별거 중인 아리는 우연히 조지를 만난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조지는 죽은 어머니를 찾아다니는 정신적인 혼란 속에서도 순수한 본성으로 아리와 교감한다. 그러나 냉정한 세상은 결코 두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서커스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감독에 의해 조지와 친구들의 모습이 몽환적인 분위기의 서커스처럼 그려진다. 실제 다운증후군 배우 파스칼 뒤켄의 연기는 연기 이상의 호소력으로 결말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무대에서 뿜어내는 예지원의 아우라를 만나다



현재 SBS <일요일이 좋다> ‘골드미스가 간다’에 출연 중인 예지원은 “커플 성공 축하 전화를 너무 많이 받는다”며 버라이어티쇼가 아닌 다음 작품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변신할 수 있는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녀는 배우가 아닌 다른 모습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의 영화라고 주저하지 않는 <집시의 시간>의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과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추기도 했을 만큼 그녀와 뗄 수 없는 춤이 바로 그것이다. 예지원은 춤을 추는 사람이 주인공이거나 독특한 안무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면 “저 안에 들어가서 어찌나 추고 싶은지”라며 아쉬움을 거듭 밝힐 정도로 몸이 만들어내는 언어에 의욕적이다. 안은미 현대무용가와 함께 공연을 계획 중인데, 2009년에는 스크린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예의 그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예지원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배우 예지원,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그녀야말로 집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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