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JTBC ‘라이프’에서 상국대학병원 사장 구승효를 연기하는 배우 조승우. / 사진제공=씨그널엔터테인먼트그룹, AM스튜디오
JTBC ‘라이프’에서 상국대학병원 사장 구승효를 연기하는 배우 조승우. / 사진제공=씨그널엔터테인먼트그룹, AM스튜디오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에서 구승효(조승우)는 상국대학병원의 파괴자이자 구원자다. 의사들에게 그는 의료행위의 가치를 숫자로 판단하는 파괴자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병원의 ‘적폐’를 해결해줄 구원자이기도 하다. 가령 암센터가 감춘 투약 사고를 세상에 까발린 사건은 멀리서 보면 정의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훨씬 복잡하다. 구승효의 폭로는 의사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병원의 주인은 자신이며 그러니 자신이 제시하는 방향을 따르라는 선전포고.

상국대학병원은 정의와 적폐의 경계가 희미한 곳이다. 구승효가 상국대학병원 사장으로 부임한 후 처음 한 일은 소아청소년과, 응급의료학과, 산부인과를 지방 의료원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구승효는 의료 혜택에서 소외된 지방민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자가 가장 큰 과를 병원에서 퇴출해 매출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속내가 숨어 있다. 그의 속셈을 알게 된 의사들은 ‘공공재인 상급병원을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움직일 수 없다’며 파업을 결의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 역시 결국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구승효와 의료진 모두 선의를 내세웠지만, 누구도 정의롭지 않다.

구승효는 철저한 기업인이다. 합리적인 것을 지향한다. 병원의 적폐가 드러난 것도 그 덕분이다. 구승효는 암센터의 투약 사고를 알게 된 뒤 약품에 바코드를 부착하도록 투약 매뉴얼을 정비했다. 무면허 대리 수술을 용인했다는 김태상 부원장(문성근)도 엄하게 벌했다. 이노을(원진아)은 구승효를 “병원에 돌을 던져줄 사람”이라고 했다. 김태상이 과잉진료를 했다는 제보를 받아 상국대학병원에 현장 조사를 나온 예선우(이규형)가 병원 문화를 투명하게 바꿔 달라고 부탁한 대상도 구승효였다.

‘라이프’에서 구승효(맨 오른쪽)는 병원 운영 방침을 두고 의사들과 갈등한다. / 사진제공=씨그널엔터테인먼트그룹, AM스튜디오
‘라이프’에서 구승효(맨 오른쪽)는 병원 운영 방침을 두고 의사들과 갈등한다. / 사진제공=씨그널엔터테인먼트그룹, AM스튜디오
하지만 그는 사업에 매몰돼 의료행위의 고귀함을 보지 못한다. 그에게 의료행위는 서비스의 일종이다. “직원이 하는 일은 회사에 이익 주고 월급 타가는 것”이라면서 보험과 제약 영업을 강요하고 성과급제를 확대한다. 그 사이 공공의료는 붕괴한다. 하지만 구승효를 장사꾼이라고 힐난하는 의사들조차 생명의 존엄을 그에게 보여주지 못한다. 권력을 향한 야욕이나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 이기심에 눈이 가려져서다. “우리가 일반 회사원하고 같습니까?”라는 암센터장 이상엽(엄효섭)의 반발은 그래서 공허하다. 선과 정의에 대한 기준은 대기업 혹은 병원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힘을 잃는다.

‘라이프’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신념 대부분은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가끔은 자신이 무엇을 따라가는지도 희미해진다. 구승효는 자신에게 희망을 걸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이노을에게 “나는 그냥 내 일을 할 뿐”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 발생한 숱한 사고들도 ‘그냥’ 내 일을 하다가 발생했다. 그리고 지난 11회에 등장한 화정그룹 내부고발자 이서정의 사망 사건 역시 하나의 경고로 읽힌다. 취재 윤리를 어긴 기자가, 그룹에 충성한 기업인이, 신념 잃은 의사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시스템 안에서 무력해진 개인은 결국 포식자로서의 시스템을 더욱 공고하게 할 뿐이다.

‘라이프’에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 무엇이 좋은 의도이고 결과인지도 희미하다. ‘나쁜 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힌트는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적어도 ‘나쁜 놈’이 되지 않을 방법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정의로워질 수 있다.

이은호 기자 wild37@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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