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접어드는 11월의 찬바람이 무색하게도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리조트의 골프 코스는 푸른 풀빛으로 빛난다. 신발도 벗어 던지고 그린 위를 나뒹구는 지현우의 입에서는 대사와 함께 입김이 뿜어져 나오지만 야속한 햇살은 봄날처럼 눈이 부시다. 현대에 환생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은 이 골프 코스에 청춘을, 순정을, 인생을 걸었다. 덕분에 <천하무적 이평강>에서 그린은 그저 배경으로서의 잔디밭이 아니라 극의 중요한 열쇠로 기능한다. 이 ‘주연급’ 코스가 세수라도 하는 날인지 연신 스프링쿨러는 차가운 물줄기를 토해낸다. 그리고 그 아래에 누워 있는 지현우는 온 몸으로 물을 맞고 푹 젖어버린다. 휴대용 난로를 들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스타일리스트는 애가 타지만, 이정섭 감독님은 예서 만족하지 않는다. “온달 얼굴이 말랐다. 물 좀 뿌려줘!”

그런 지현우와 달리 멀끔하게 골프웨어를 차려입는 김흥수는 틈틈이 퍼팅 연습까지 하며 여유를 즐긴다. 심지어 양말을 벗어 말리던 지현우도 전동카트 안에서 대본을 읽던 남상미도 뛰어나와 응원하는 대망의 키스신을 찍을 차례가 되자 그의 어깨에는 한층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줄기를 파라솔로 막아내며 앙탈하는 차예련을 잡아 입을 맞추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스프링쿨러 방향을 손으로 조정하느라 물귀신 몰골이 되어 버린 스태프들도, 흘러내린 물에 발이 젖는지도 모르고 모니터를 응시하는 감독님도, 무거운 파라솔을 내내 한 손으로 들고 있느라 팔이 덜덜 떨려오는 김흥수도 결국엔 파랗게 풀빛으로 입술이 질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잔디보다 푸른 것은 그것만은 아니다. “어이구. 이 추운 날! 젊네 젊어.”지나가던 갤러리의 한마디 처럼 푸르게 젊은 열정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이들은 겨울 추위 앞에서 천하무적이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