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는 왜 악녀로 환생 했을까?

SBS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문근영)은 SBS <패션왕>의 이가영(신세경)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가영은 가난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유학파 패션 디자이너 최안나(유리)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한세경도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노력으로 갖은 ‘스펙’을 쌓지만, 유학을 못 가고, 비싼 옷을 입어보지 못한 취향과 안목의 문제로 면접점수 ‘D’를 받는다. 이가영은 재벌 2세의 구애에도 돈보다 자신의 진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한세경은 노력만으로 꿈과 사랑 어느 것도 지킬 수 없었다. 그리고 별명이 ‘캔디’였던 한세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유한 남자를 만나 결혼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한세경처럼 신분상승을 원하는 여성 캐릭터는 요즘 드라마들에서 종종 볼 수 있다. KBS<세상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의 한재희(박시연)나 SBS <야왕>의 주다해(수애)는 신분상승을 위해 온갖 죄를 저지르고, JTBC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정혜윤(정소민)은 조건 좋고 착한 연인과의 결혼을 위해 수많은 계산을 한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은 모두 한세경과 비슷한 고민을 갖는다. 그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겉으로는 교양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있어 보이는’ 모습을 연출한다. 재벌과 정치인의 아내가 되는 한재희와 주다해는 물론, 한세경은 청담동 며느리가 되기 위해 샴페인을 마시는 방법을 배우고, 정혜윤은 “없어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부유한 시어머니(선우은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명품 백을 사야하는 것인지 고민한다.

죽도록 노력하되, 있어 보여야 하는 악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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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영 같은 가난한 캔디가 드라마의 주인공이던 시절, 캔디의 노력은 명품백을 멘‘있어 보이는’악녀의 취향과 안목을 이겼다. 그러나 한세경이 악녀가 되기로 작정한 시절에는 파리에서 패션쇼를 직접 보며 기른 취향과 안목이 곧 능력이 된다. “무엇이든 열심히”하는 한세경의 성격은 역설적으로 취향과 안목을 기르는데 최악의 조건이다. 한세경의 회사가 원하는 취향과 안목은 열심히 절약하고 뛰는 대신 무엇이든 사고, 여유있게 거리를 걸을 때 얻기 쉽다. 학벌이 필요하다고 해서 공부했다. 경력이 필요하다고 해서 공모전에 나갔다. 그러나 이제 사회는 한세경에게 돈이 아니면 해결하기 힘든 취향과 안목을 가지라고 한다. 능력이 계급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능력의 기준을 결정한다. <청담동 앨리스>에서 한세경이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고 하는 순간은 <패션왕> 같은 트렌디 드라마가 애써 잡으려하던 시대의 종언과도 같다. 성공의 룰이 바뀌는 순간, 캔디가 죽고 악녀로 환생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의 악녀는 캔디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한세경이 명품백을 들려면 직장일에 아르바이트까지 해야한다. 반면 청담동 사람들에게 어필하려면 품위와 매너와 여유까지 가져야 한다. 삶은 더 각박해졌지만, 겉모습은 전보다 더 부티나야 한다. 물 아래에서 수없이 발을 동동거려야 하는 백조, 아니 흑조. 발길질을 멈추면 물 밑으로 가라 앉는다. 대체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KBS <학교 2013>의 남경민(남경민)이 주석을 달아줄 것이다. 남경민은 집안 형편이 안 좋은 탓에 옆에서 “매니저” 역할을 해줄 부모나 학원 강사가 없다. 혼자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성적은 “언어 2등급 수리 4등급 외국어 3등급”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산다. 성적에 안 좋은 영향을 주면 친구든 담임 교사든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그러지 않으면, 학교 밖으로 내몰리는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같은 반 아이들의 삶처럼 될 수도 있다. 10대의 나이에도 이미 삶은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고, 표정은 점점 지치고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남경민이 죽을 힘을 다해‘스펙’을 쌓아도,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한세경처럼 취향과 안목을, 지친 표정 대신 ‘있어 보이는’ 얼굴을 요구받을 것이다. 악녀는 그 때 탄생한다. 죽도록 노력하되, 노력하는 것 자체를 숨겨야 하는 악녀가.

신데렐라와 캔디의 공석은 누가 차지할 것인가

캔디는 왜 악녀로 환생 했을까?
더 올라가고 싶은 욕망과 더 내려갈 수도 있다는 절망은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평온하게 꾸릴 수 있다는 희망은 없다. <청담동 앨리스>는 2013년이 재벌과의 결혼이 아니라 원하는 곳의 입사가 희망인 여성에게도 욕망과 절망을 각오해야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악녀가 되고 싶은 캔디라는 한세경의 캐릭터는 그런 시대의 문제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조금 더 좋은 직장, 조금 더 괜찮은 남자와 결혼하려면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직장 상사와 시어머니 앞에서는 ‘있어 보이는’ 언행을 해야한다. 어떤 여자든, 부유하지 않다면.



그러나 <청담동 앨리스>는 캔디와 악녀의 경계를 무너뜨리되, 그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말하지 않는다. 한세경과 재벌 2세 차승조(박시후)의 관계는 한세경의 진실된 모습이 차승조에게 받아들여지면서 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한세경이 악녀가 되기 위해 선택했던 각박한 삶의 방식은 드라마에서 사라져야할 것이 된다. 옳든 그르든 극도로 각박하고 피로했던 한세경의 삶은, 더 나은 대안을 찾는 대신 원래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통해 지워진다. 결국 삶의 딜레마에서 구원 받은 것은 재벌 2세와 불안하지만 그래도 행복할 가능성이 높은 삶을 약속받은 한세경 뿐이다. “검으려면 철저히 검어라”라는 드라마 속 대사는 <청담동 앨리스> 자체에도 적용된다. 시대가 낳은 어떤 여성을 보여주던 드라마가 진심, 또는 선악의 문제로 초점을 바꾸면서 드라마를 끌어가던 힘을 잃었다. 이것은 <패션왕>이든 <청담동 앨리스>든 재벌 2세와 평범한 여성이 사랑하는 트렌디 드라마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현실의 절망과 욕망이 드라마 속의 판타지마저 잠식하는 시대에, 트렌디 드라마는 무엇으로 현실의 공감과 판타지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신데렐라와 캔디는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여주인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 그게 가능은 할까. 드라마에서도 평범한 여자와 재벌 2세가 결혼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힘든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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