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크고 눈이 큰 소녀가 있었다. 세 자매 중 막내, 내성적인 언니들과는 달리 유난히 씩씩했던 소녀는 열다섯, 중학교 2학년 때 탤런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라인’이 뭔지도 몰라 수성 사인펜으로 눈 화장을 하고 나가 2위로 뽑힌 미스 빙그레 선발대회가 첫 번째 무대였다. 단역으로 따라 나선 SBS 현장에서 주연으로 발탁됐다. 어리지만 성숙한 눈빛, 또래는 물론 성인 연기자에게도 보기 드물게 고혹적인 분위기에 러브콜이 쏟아졌다. ‘고교생 탤런트’가 거의 없던 시절, 아이돌 스타들과 함께 활동하는 소녀는 여고생들의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일찍 얻은 인기로 왕따 아닌 왕따도 당해보고 자신을 겨냥한 루머에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2000년, MBC 으로 정상에 올랐을 때 소녀는 스물한 살이 되어 있었다.

그 이후, 10년 동안
김소연│10년 만에 시작된 완벽한 반전 드라마
김소연│10년 만에 시작된 완벽한 반전 드라마
집 나간 엄마, 폭력적이었던 아버지, 끝없는 가난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9시 뉴스앵커가 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해치우고 마는 의 허영미가 지독한 악역임에도 보는 이들로부터 응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김소연의 똑 부러지는 말투와 한 점 흔들림 없는 표정 연기 덕분이었다. 아나운서보다 더 아나운서답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뉴스 리포팅은 물론 라이벌 진선미(채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팜므 파탈로서의 모습까지, 김소연은 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러나 대중을 열광시킨 강렬한 캐릭터는 그 후 10년간 김소연에게 굴레로 남았다. 차갑고 도회적인, 예쁘지만 어딘가 무기질적인 미녀의 이미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MBC 에서 밝고 당찬 캐릭터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의 그림자를 지우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남들이 한창 학교나 직장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을 이십대 중반 넘어 그는 근 3년의 공백을 가졌다. 자의 반, 타의 반의 휴식이었다. “매일 밤마다 기도하고 일이 생기길 기다렸어요. 배역이 바뀐 적도 있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서 ‘연기자를 안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지금도 저는 연기 아니면 할 게 없는 사람인데 그 당시에는 정말 마음에서 뭐가 빠져나간 것처럼 허했거든요. 누굴 만날 때도 자신감이 없고, 남을 도와주려 해도 ‘내가 이런데 무슨. 내가 도와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랬어요. 엄마는 제가 안쓰러우니까 시집가라고 하시고. (웃음)”

김선화와 마혜리로 끝나지 않는다
김소연│10년 만에 시작된 완벽한 반전 드라마
김소연│10년 만에 시작된 완벽한 반전 드라마
슬럼프를 점프의 기회로 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배우가 대중으로부터 잊힌 다는 것, 여배우가 하루하루 나이 들어간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무대가 없어도 TV 속 다양한 인간군상을 관찰하고 모방하며 연기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던 김소연은 2008년 SBS 에 이어 2009년 KBS 의 북한 공작원 김선화로 인상적인 복귀에 성공했다. 선화 역을 위해 긴 머리를 싹둑 잘라야 했을 때 문득 “안 자를 수도 있지만 뭐 하러 이런 걸 고집하나” 하는 생각에 바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기다림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 때는 진짜 절실했어요.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그 배역이 저에게 오기까지도 정말 힘들었고, 마지막이란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예쁘게 보일 여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죠” 그리고 블록버스터 액션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소연은 깡마른 체구와 독기 어린 눈빛,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며 김선화를 의 중요한 축으로 만들어냈다.

그런 김소연에게도 SBS 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의 도전이었다. 실제로 밝고 애교 넘치는 성격이지만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와 기존의 차가운 이미지는 김소연과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 사이에 항상 물음표를 던졌고 그에게는 다시 김선화라는 새로운 그림자가 생겨나 있었다. 그러나 김소연은 핫 핑크와 킬 힐, 하이 톤의 빠른 말투로 대표되는 의 검사 마혜리를 캐릭터와 연기자 사이에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연기해내며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완벽히 지워냈다. 조직의 질서를 모두 무시하고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하지만 편견이 없고 본바탕이 따뜻한 마혜리는 얼음공주 같던 이 미녀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김소연은 음지 끝의 허영미에서 양지 끝의 마혜리로, 10년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으며 연기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기에 바친 끝에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편해진다는 것을 경험한” 결과였다.

에서 김소연의 성공적인 변신이 단순히 ‘변신’에만 의미를 둘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소연이 마혜리를 통해 보여준 것은 어릴 때부터 대중에게 알려졌고 이른 나이에 정점을 찍었던, 한 때는 아무도 그에게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던, 그래서 그의 시대가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던 한 배우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함으로써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김소연이라는 완벽한 반전 드라마의 시즌 2를 기대하고 있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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