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KBS 는 지금 이 순간보다 앞으로 더욱 많은 날들 동안 이야기될 작품일 것이다.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죄와 속죄, 선택과 책임, 우연과 필연, 논리와 추리를 모두 건드리는 이 작품은 풋풋한 청춘 드라마와 서스펜스 가득한 스릴러, 그리고 추리 드라마의 미덕을 동시에 가진 새로운 무엇이다. 이 놀라운 드라마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담아 가 의 세계를 파헤쳤다. 수신고등학교의 아름다운 청춘들이 있는 현장과 연출을 맡은 김용수 감독이 직접 말한 , 그리고 를 본 사람들에게 유용한 몇 가지 팁과 캐릭터의 이야기들도 담았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 앞에 얼룩말 무리가 있다. 한 마리만 죽으면 다른 얼룩말들은 안전하다. 그 중 아픈 얼룩말이 있다면, 다른 얼룩말들은 그 얼룩말이 잡아먹히길 바랄까. KBS 의 김진수는 병든 얼룩말이었다. 수신고에서 조영재(김영광)에게 조롱당했고, 부유한 윤수(이수혁)에게 환각 속에 나오는 ‘구석괴물’ 취급을 받았다. 천재 최치훈(성준)의 기억 속에는 존재도 없는 동급생이었고, 친구인줄 알았던 양강모(곽정욱)에게 배신당했으며, 아름다운 은성(이솜)에게는 스토커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매뉴얼맨’인 모범생 박무열(백성현)에게 남은 희망마저 짓밟힌 뒤 자살했다. 김진수의 빈자리를 채운 전학생 이재규(홍종현)도 김진수와 비슷한 처지로 산다. 엘리트만 다니는 수신고도 누군가 병든 얼룩말 노릇을 해야한다는 진실. 이재규가 놀림 받고, 주목받지 못하는 병든 얼룩말이 아니었다면 그가 김진수의 일기를 여섯 명의 학생에게 편지로 보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험을 믿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 진짜 세상에 떨어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Bitter sweet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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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남은 여섯 명의 학생에게 김진수의 일은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얼룩말의 문제를 낸 연쇄 살인범 김요한(김상경)의 말처럼, 모든 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다. 김진수나 이재규가 없다면 그들 중 누군가는 병든 얼룩말이 된다. 귀가 불편한 양강모일 수도 있고, 돈으로 입학한 윤수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김요한이 자신이 죽인 교사 윤종일(정석원)과 달리 1:1 상담을 하는 이유다. 그는 학생들이 “함께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의 얼굴”이 다르다는 걸 안다. 수신고의 엘리트가 아닌 개인으로 분리되는 순간, 그들은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김요한이 그들에게 다수가 한 명을 배신할지, 한 명이 다수를 배신할지 묻는 이유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으면 모두 살지만, 한 명이라도 불신하면 내가 죽는다. 그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김요한은 살인자이지만 아이들과 대화 가능한 교사이자, 총을 든 마이클 센델이다. 1강.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그리고 소수의 피해자. 괴물은 그 피해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김요한은 차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여고생들을 죽인 이유에 대해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원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요한이 수신고의 교사 노릇을 하면서, 그는 학생들에게 계속 선택을 요구한다. 그 선택에는 명확한 답이 없다. 학생들은 박무열이 김요한을 살린 탓에 모두 위험에 빠진다. 우연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선한 의지는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답이 없는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답은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윤리관을 지킬 것인가, 나를 위해 타인을 죽일 것인가. 박무열의 말처럼 “모험을 믿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지나는” 18세의 청춘들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진짜 세상의 문제에 직면했다.

답이 없는 세상의 공포를 말하는 추리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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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요한은 동시에 학생들을 철저한 룰을 통해 움직인다. 그가 벌이는 게임에는 정확한 룰이 있고,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려 한다. 최치훈이 그를 한 번이나마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식사시간에 보여주는 규칙을 이용한 결과다. 의 캐릭터들은 우연과 우연이 겹친 사건마저도 논리와 룰의 세계를 통해 바라보려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의 빛나는 성취가 있다.

김요한이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는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구성을 보여준다. 우리 중 누군가 범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설정이나 미스터리의 전개 방식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를, “인터넷도 전화도 끊긴” 사실상의 밀실에서 과거에 죽은 인물로 인해 시작되는 사건의 전개는 과 닮았다. 최치훈이 이재규의 전학 시점과 학교의 공사 시기 등을 종합해 이재규가 편지를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아내는 과정은 시청자들에게 맞추라고 내는 추리 퀴즈나 다름없다. 그러나 김요한이 정체를 밝히는 순간부터 그들은 추리와 논리가 무용한 세계에 빠진다.

화재 경보기를 이용해 김요한의 총을 뺏으려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양강모의 귀가 들리지 않고, 학교를 벗어난 강미르를 조난에서 구해준 오정혜(이엘)는 김요한의 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미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1회에 박무열은 자신도 모르게 오정혜를 전화로 불렀고, 양강모의 귀는 처음부터 문제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논리적 추리의 세계관으로 움직이지만 우연 앞에서 좌절하고, 우연은 예비된 필연의 요소들을 통해 발생한다. 에서 다룰 법한 내용을 과 영화 을 반반씩 섞은 듯한 세계에서 보여준다. 시청자는 논리적인 추리가 우연 앞에서 무너지며 불안해지고, 는 그 불안함을 끝까지 이어가며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수신고 학생들이 논리적 틀을 벗어난 우연을 통해 변화의 시점을 맞이하듯, 시청자 역시 추리 드라마를 통해 생각의 틀을 깰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답을 요구하는 시대에, 가장 고전적인 방식으로 답이 없는 세상의 공포를 말하는 추리 드라마가 태어났고, 만들어졌다.

답은 소년, 소녀의 마음 거기에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Bitter sweet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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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들이 배우던 논리와 공부의 틀 대신 우연과 필연의 세계에 빠져든 학생들은 고통스런 사춘기를 통과한다. 김요한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한 조영재는 언제 폭주할지 모르고, 이재규는 사건의 원인제공을 했다는 죄책감과 그 사실을 감추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린다. ‘매뉴얼 맨’ 박무열이 그 어느 것도 자신의 매뉴얼대로 되지 않는 것에 좌절했을 때 얼마나 분노할까. 그리고 김요한의 ‘도플갱어’처럼 “뇌의 이쯤 되는 부분”이 약해 사람에 대한 감정이 별로 없는 최치훈의 선택은 괴물이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엘리트들의 두뇌로 지탱하던 세계가 무너진 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 지고 갈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들이 아직 “어른도 아이도 아닌” 18살이라는 것뿐이다. 어른처럼 선택은 할 수 있지만, 어른처럼 그것을 신념화하지 않는 나이. 깊은 정신적 고통을 겪은 뒤에도 서로의 생존에 기뻐하며 눈싸움을 할 수 있는 소년, 소녀의 마음. 공부로도, 추리로도 낼 수 없는 답이 거기 있다.

글. 강명석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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