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고,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가 낮은 음색으로 ‘취중진담’을 말하는 순간 여자의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어수선한 주변의 공기에서 남녀만 동그랗게 오려내 둘만 남길 수 있는 목소리의 소유자. 그 남자의 1번 모습이다.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는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름지게 빗어 넘긴 긴 머리와 촌스러운 양복은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칼을 쓰고, 자신의 이익에 배반되면 친구까지 손쉽게 제거한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내 배를 향해 단도를 쑤셔 넣을 것 같은 악인의 얼굴. 그 남자의 2번 모습이다. 송곳 하나 꽂을 자리 없이 빡빡한 상사. 굳은 얼굴로 오차 따윈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도 예외는 없다. 버럭거리며 실수를 지적하며, 수술실의 긴장감을 그대로 일상으로 가져오는 의사. 사랑고백마저 버럭 소리 질러 할 정도로 서툴지만 사랑스러운 까칠남. 그 남자의 3번 모습이다.

, , 등 이범수의 비교적 최근작만 살펴보아도 이렇게나 다른 얼굴의 남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20년 경력의 배우라고 하지만 그만큼 매번 자신의 모습을 무너뜨리면서 대중의 예측을 빗나간 사람이 있을까? 개성 있는 조연으로 스크린에 등장한 이후, 악역이나 코믹한 캐릭터에 강점을 보여 온 이범수가 수트가 잘 어울리는 훈훈한 남자로 멜로의 대상이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그리고 이제는 멋진 역할만 할 것 같았던 의 성공 이후 이범수는 다시 코믹한 액션물 로 돌아왔다. “도회적인 멜로 이미지가 지향점이었지 종착역은 아니었으니까요. 남들 같았으면 그 좋은 이미지로 쭉 갔을 텐데 그게 바로 이범수와 다른 배우들의 다른 점 아닐까요? (웃음) 코믹이든 악역이든 상관없어요. 뻔히 예상 가능한 단순한 포석으로 가고 싶진 않아요. 다양한 것, 늘 새로운 걸 하고 싶어요.”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공존하는 배우에게 그것들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분위기가 있다면 바로 유쾌함이다. 토크쇼에서 패션에 대한 예찬을 벌일 때도,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특유의 창법으로 캐롤을 부를 때도 이범수는 늘 주변사람을 웃게 만들고 그의 입에서 나올 유머를 기대하게 한다. “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를 사랑한다는 그가 고른 영화들은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12월을 유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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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illy Elliot)
2000년 | 스티븐 달드리
“빌리란 한 아이의 성장 드라마죠.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릎 쓰고 무용가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인데 그 안에 가족애와 소년의 꿈이 있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빌리의 무용학교 공연 날이 참 감동적이었어요. 아버지도 오고, 친구도 와 있는 와중에 빌리가 그랑주떼를 하면서 영화가 끝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무대 사이드에서 몸을 풀고 있는 빌리의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졌달까요? 극장에서 보고 나올 때까지 그런 기분 좋은 설렘이 가득했어요.”

영국의 북쪽에 위치한 탄광 마을.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우울한 공기는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한 정서다. 가난과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아이들은 꿈을 꾸기 보다는 포기하는 편을 선택하지만 빌리만은 다르다. 그래서 호모라는 놀림도, 레슨비를 지불하기 어려운 사정에도 마침내 빌리는 한 마리의 백조가 되어 날아오를 수 있었다. 로열발레단 댄서인 필립 말스덴의 어린 시절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진 영화는 내년 8월 한국에서 뮤지컬로 재탄생한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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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Incredibles)
2004년 | 브래드 버드
“실사 영화와는 다르게 애니메이션은 그 장르만의 상상의 세계가 있잖아요. 카메라 앵글이나 편집 같은 것들이 무한대로 표현 가능하니까요. 한 장의 그림에서 비롯되는 매력이 에 잘 살아있어요. 가족이 하나같이 멋지게 활약하는 모습이 랑도 비슷하죠? (웃음) 이 영화 역시 보는 내내 신이 났어요. 특히 슈퍼 히어로 가족의 막내, 갓난아이가 절 많이 웃겼어요.”

픽사가 내놓은 작품치고 우리를 실망시킨 작품이 있었던가? , , , 까지 최고의 애니메이션 기술진과 CG를 뛰어넘는 스토리텔링으로 늘 재미와 감동 그 어느 것도 허술하지 않은 영화들을 선보인 픽사의 또 하나의 히트작. 슈퍼 히어로 가족의 활약도 명불허전이지만 이제는 평범한 소시민이 되어 살고 있는 슈퍼 히어로들의 측은한 뒷모습 또한 눈물 나게 웃긴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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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asino Royale)
2006년 | 마틴 캠벨
“파워풀함 그 자체죠.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통쾌함이 좋았어요. 007의 액션은 말할 것도 없구요. 제 생각에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최고의 007인 것 같아요. 사실 악당 역을 할 것처럼 생겼는데 (웃음) 터프하고 남자다운 매력이 넘치죠. 최근의 007들은 강한 남성미가 좀 부족했던 것 같거든요. 사실 007이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다니엘 크레이그는 참 멋진 배우예요. 저도 그런 남성미가 부각되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워낙 액션이라는 장르를 제가 좋아하기도 하구요.”

제임스 본드라기보다는 레밍턴 스틸에 가까웠던 피어스 브로스넌에 이어 6대 007이 된 다니엘 크레이그가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말쑥한 바람둥이로 각인되었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맡기엔 그는 너무 거칠어보였다. 그러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진창에서 구르며, 다니엘 크레이그는 테스테론으로 가득 찬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만들어냈다. 몬테네그로를 배경으로 제임스 본드가 삐뚤어진 바람둥이가 된 기원을 짐작할 수 있는 가슴 아픈 순정과 액션 그리고 도박이 펼쳐진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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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Mamma Mia!)
2008년 | 필리다 로이드
“아바의 노래를 그렇게 멋들어지게 하나의 테마로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게 참 흥미로웠어요. 워낙 아바의 노래가 좋으니까 장면, 장면 더 큰 감흥이 있었구요. 그리고 는 낭만적인 영화잖아요.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마치 지중해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런 게 영화를 보는 큰 행복 아닐까요? 영화에 등장한 아바의 모든 노래가 좋지만 ‘댄싱 퀸’과 ‘슈퍼 트루퍼’가 특히 좋았어요. 좋은 음악에 아름다운 화면에, 영화 보는 내내 전율이 흘렀어요.”

뮤지컬로 먼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에는 뮤지컬의 제작자들이 참여해 브로드웨이의 무대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물론 그리스 올 로케이션으로 무대에선 볼 수 없었던 지중해의 풍광에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등 꽃중년들의 종합선물세트까지 업그레이드도 잊지 않았다. 완벽한 결혼식을 위해 자신과 함께 입장할 아버지를 찾으려는 소피의 귀여운 고군분투는 아바의 히트 넘버들과 어우러져 영화를 보는 동안 단 1초도 딴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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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菊次郞の夏)
1999년 | 기타노 다케시
“원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들이 독특하잖아요. 그의 그런 독특함을 좋아하지만 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옆집 아이랑 할일 없는 동네 아저씨가 동행하면서 벌어지는 소박함과 진솔함에 ‘역시 좋은 감독이구나!’ 하고 감탄했죠. 어렸을 적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 지를 때까지 들어오지 않고 쏘다니던 어린 범수로 돌아가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마사오에겐 여름방학이 반갑지 않다. 친구들도 다 놀러가고 심심한 어느 날, 돈 벌러 간 엄마를 찾아 나선다. 보호자 명목으로 얼렁뚱땅 동네 건달 아저씨가 동행하지만 훼방꾼일 뿐이다. 경륜장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히치하이킹에 노숙까지 갖은 고생을 시킨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만난 이상하고 무섭고 신기한 사람들 때문에 마사오는 전에 없던 멋진 여름방학을 보낸다. 화내고 소리만 지르는 것 같아보여도 은근히 순수한 기쿠지로 아저씨와의 추억으로 채워지는 소년의 그림 일기장처럼 보는 이의 마음 또한 여름 햇살로 충전된다.
“가는 걸음이 길이 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이범수│극장 문을 나설 때 상쾌함을 주는 영화들
“수많은 방향의 길을 달려온 거 같아요. 제가 봐도 맡은 캐릭터들의 스펙트럼을 넓게 가져 보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했거든요.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남이 갔던 길을 간다기보다 제가 가는 걸음이 그냥 길이 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범수 같은 배우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거니까요. (웃음)” 앞일을 내다보는 점성술사가 아닌 이상 이범수의 미래를 밝게만 점치는 건 섣부르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분명 이범수 이전에 이범수 같은 길을 걸어온 배우는 없었다. 귀납적으로 봐도 그가 미래에도 ‘다른’ 배우로 여전히 전진하고 있을 거라는 추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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