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8년 봄, 야구장 외야석 잔디에 누워 맥주를 마시면서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야구공을 보는 순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프로야구 태동기를 맞이한 대한민국의 한 소년 역시 “80년대식으로 화끈한 야구”를 선보였던 해태 타이거즈의 어린이 회원 점퍼를 입고 동네를 활보하면서 꿈을 꾸었다. 소년은 자라서 소설가도 야구감독도 아닌, 영화감독이 되었다.

김현석 감독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유난한 ‘야구 애호’의 흔적을 의심하지 않기란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야구심판과 여배우의 오랜 인연과 사랑을 그린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시나리오를 썼고,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단을 다룬 으로 감독데뷔를 했으며,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김성한 선수 역할로 우정출연 했고, 가장 최근에는 고교투수 선동렬 스카우팅을 둘러싼 <스카우트>를 연출했다. 얼마 전 WBC 중계석에 앉아있던 김현석 감독을 발견한 사람들도 있으리라. “친한 친구가 KBS스포츠 PD라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 PD의 이름은 ‘광태’, 바로 그의 필모그라피 중 유일하게 야구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 다리 건너기가 무섭게 야구와 어떻게든 연결되고야 마는 김현석 감독의 추천테마가 ‘야구영화’인건 일견 너무 뻔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순리처럼 느껴진다.

현재도 배우 박철민 등과 함께 야구단을 꾸려가고 있기도 하고, 영화인들과 심심찮게 친선야구경기를 벌이는 그이지만 이제 ‘야구=김현석’이라는 수식은 사양하고 싶다고. “앞으로는 야구영화 안 만들 거예요. (웃음) 이것도 야구에 관한 마지막 인터뷰!”라고 선언하는 그를 당분간은 순수한 “야구애호가”로 놔 줘야 하나 보다. 물론 충무로에서 누군가 야구영화를 만든다면 그 감독은 여전히 김현석일 가능성을 99% 확신하지만 말이다.

1. <19번 째 남자> (Bull Durham)
1988년 │ 론 쉘톤

“케빈 코스트너는 마이너리그로 추락한 퇴물 포수로 나오고 팀 로빈슨은 메이저리그로 올라가기 직전의 젊은 투수로 등장하는데 어쩐지 나이가 먹어갈수록 더 생각이 나고 곱씹게 되는 영화인 것 같아요. 모두들 어릴 땐 자신이 팀 로빈슨 인줄 알지만 점점 나이 들수록 케빈 코스트너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메이저리거들이 뽑은 최고의 야구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던데 아마 대부분 선수들이 마이너리그를 거쳐서 올라오고, 이 영화가 그 과정이나 풍경을 꽤나 현실적으로 묘사해서 일거예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마이너리그 구단 ‘더램 불스’는 전도유망한 신인투수 에디(팀 로빈슨)를 영입하면서 한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노장 포수 크래쉬(케빈 코스트너)를 그의 파트너로 붙인다. 누군가에게는 출발점인 그곳이 누군가에게는 종착역이라는 인생의 잔인한 진실이 교차하면서 영화는 크래쉬의 야구인생 9회 말의 풍경을 천천히 따라간다.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유연애주의자 애니 역으로 출연한 수잔 서랜든과 팀 로빈스는 이 영화를 통해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2. <사랑을 위하여> (For Love Of The Game)
1999년 │ 샘 레이미

“<19번째 남자>, <꿈의 구장>, <사랑을 위하여>는 ‘케빈 코스트너 야구 3부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야구선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폼이 제일 정확한 배우기도 하구요. 이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감독이 샘 레이미라서 일거예요. 개인적으로 천재 감독들의 범작을 좋아하는데 그런 걸 보다 보면 나도 희망이 있다는 용기를 얻기도 하고(웃음) 좀 더 그 감독들이 인간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그 전에는 <이블 데드> 시리즈나 <다크맨>을 만들어 왔던 사람이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스파이더 맨>으로 많이 기억하잖아요. <사랑을 위하여>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영화인데 힘 빼고 만든 작품 같아서, 심장으로 만든 영화 같아서 좋아해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일을 동시에 쟁취 할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아마도 ‘퍼펙트게임’으로 기록 될 것이다. 은퇴를 앞둔 노장투수 빌리(케빈 코스트너)에게는 5년간 사랑해 온 여자 친구 제인(켈리 프레스톤)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야구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었던 빌리 옆의 제인은 외로움을 느끼고 결국 이별을 선언한다. 영화 초반 케빈 코스트너의 진짜 부모가 영화 속 빌리의 부모로 등장하기도 하고, 실제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심판이 출연하기도 했다. 개봉 지난해의 실제 양키선수들의 기록을 사용하는 등 열혈 야구팬들만 찾아 낼 수 있는 숨은 재미들로 가득하다.

3. <메이저리그> (Major League)
1989년 │ 데이빗 S. 워드

“20년 전 문을 연 서울극장의 개관작이었는데 1관에서 <미스 코뿔소 미스타 코란도>, 3관에서는 <첩혈쌍웅>, 그리고 이 영화가 1관에서 상영되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사실 야구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기란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 꼭 야구영화를 좋아하란 법도 없고요. 실재 경기는 각본 없는 드라마이지만 영화는 어쨌든 각본이 필요한데, 관객들은 이미 주인공이나 팀이 결국엔 이길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걸 감안하고도 흥미를 잃지 않게, 또 부끄럽지 않게 만들 수 있기란 정말 힘든 거라는 거죠. 그런 면에서 <메이저리그>는 그 수많은 야구영화들 중 오락적인 측면에서는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30년간 우승한 번 못한 야구팀 ‘클리브랜드 인디언즈’. 설상가상 새로 취임한 쇼걸 출신의 새 여자 구단주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괴상한 계략을 짠다. 팀을 완패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이곳저곳에서 불러 모은 선수들의 꼬락서니는 가관이다. 포수는 무릎부상으로 공도 제대로 못 던지는 상태고, 투수는 속도는 빠르지만 방향을 못 찾고, 내야수는 바로 눈앞의 공도 놓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기회가 인생의 마지막 등판임을 아는 오합지졸 외인부대는 예상을 깨고 무서운 속도로 우승을 향해 달려간다. 쉬지 않고 코미디를 던지고 가끔은 뭉클한 드라마를 쳐내는 <메이저리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통쾌한 즐거움의 홈런을 선사한다.

4. <아는 여자> (Someone Special)
2004년 │ 장진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는 여자>가 야구영화는 아니잖아요. 주인공이 야구선수이고 야구장에서 결정적인 선택이 많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요. 가만히 보면 꼭 동치성이 야구선수일 필요도 없어요. (웃음). 하지만 영화 전반에 야구광으로 알려진 장진 감독의 야구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요. 전형적인 멜로는 아니지만 자기만의 멜로 스타일을 완성했던 것 같아요. 저런 영화를 만들다니, 감독은 정말 사랑에 빠져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들만큼. 아, 특히 제목이 좋아요. 제목이.”

애인에게 차인 것도 모자라, 3개월 시한부 인생의 판정까지 받은 야구 선수 동치성(정재영). 괴로움에 술을 퍼먹은 다음날 그는 자신에게 첫사랑도, 내년도, 그리고 주사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치성을 어린 시절부터 짝사랑해 온 이연(이나영)은 어느 날 술에 취한 동치성을 돌보게 되고, 그런 인연을 통해 동치성으로부터 ‘아는 여자’라는 타이틀을 획득한다. 사랑을 향해 진심으로 돌진하는 이나영의 사랑스러운 연기는 청룡영화제가 여우주연상으로 화답했다. 엇박자로 허를 찌르는 ‘장진식 유머’가 순도 높은 사랑이야기를 만날 때 발생하는 놀라운 화학작용을 확인 해 볼 수 있다.

5. <배터리> (The Battery)
2007년 │ 타키타 요지로

“고시엔을 배경으로 한 만화나 영화도 그렇지만 학생리그나 아마 야구는 프로야구랑 다른 야구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 같은 걸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 사실 요즘 야구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20세기 스포츠 같구나, 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경기시간도 너무 길고, 횡으로 움직이는 축구와 달리 종으로 움직이는 스포츠다 보니 ‘와이드TV의 시대’에 역행하는 것도 같고. 그래서인지 야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련해져요. 80년대 소년기를 거친 우리 세대에게 있어 야구는 곧 그 유년에 대한 기억이잖아요.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고 구단에서 주는 점퍼입고 배트 들고 다니고 하던. <배터리>는 그저 야구가 너무 좋아서 달려든 중학생들 이야기라서 더 공감의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어요.”

중학교에 입학한 천재 투수 타쿠미(하야시 켄토)는 듬직한 또래친구이자 포수인 고(야마다 켄타)를 만나게 된다. 아사노 아스코의 6권짜리 장편소설을 영화로 한 <배터리>는 중학교 야구단을 배경으로 소년들이 야구를 통해 세상이라는 마운드에 두 발로 서게 되는 과정을 담은 풋풋한 성장영화다. 제목인 ‘배터리’는 투수와 포수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타쿠미와 고가 한 쌍으로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다. 백색의 야구 유니폼을 입은 남자 중학생들의 싱그러운 모습, 특히 주인공 타쿠미 역의 하야시 켄토를 보고 있으면 ‘미모’라는 수식이 소년에게 쓰여지는 것도 전혀 이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2008년에 NHK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23살 때 당시 나의 고민이 보이더라고요”

80년대 멜로영화의 거장, 배창호 감독의 팬으로 알려진 김현석 감독은 <스카우트>를 끝낸 이후 5월부터 공연되는 뮤지컬 <기쁜 우리 젊은 날>의 각본을 썼다. 한 여자를 향한 미련하리만큼 우직한 순정을 가진 남자. 김현석 감독을 그저 ‘야구영화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억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변에는 넘쳐나지만 영화의 주인공으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남자들을 드물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초 남성의 판타지에 복종하지도 않고 왕자님처럼 자체발광하며 여심을 유혹하지 않는다. 한없이 소심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그래서 미덥고 사랑스러운 남자들.

하여 김현석 감독이 차기작으로 준비중인 <시라노 프로젝트>는 가장 그다운 영화가 될 듯하다. 14년 전 대종상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된 본인의 시나리오 <대행업>을 원전으로 하는 이 영화는 바로 제라드 드빠드듀가 주연한 프랑스 영화 <시라노>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으로 고백을 못해 괴로워하는 남자의 의뢰를 받아 그 여자가 결국 의뢰인을 좋아하게 만들어 주는 가상의 집단을 배경으로 한다. “작년 9월에 초고를 마쳤는데, 13년 전 썼던 작품을 내 손으로 고치다 보니 23살 때 당시 나의 고민이 보이더라고요. 왜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날 안 좋아할까, 뭐 이런 (웃음)”. 이제 6월이다. 야구장에서 캔 맥주를 나누는 것도, 함께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다. 고백하기에도, 사랑하기에도, 야구하기에도 좋은 그런 날인 것이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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